안식일의 금지 규정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만약 우리의 동네에 아름다운 공원이 있고 구청이나 시청에서 그 공원 안에 아름다운 잔디밭과 꽃밭을 만들고 나무 그늘과 바위 정원과 그리고 오리들이 한가롭게 헤엄치는 작은 호수를 만든 다음 이것들의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그 옆에 “꽃을 꺽지 맙시다,” “잔디를 밟지 맙시다”라고 팻말을 박아 놓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옳은가? “왜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 놔두지 않고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는가”라고 항의해야 옳은가? 만약 시청 당국이 이같은 항의들을 두려워하여 공원 내의 여러 설치물들에 대해 금지 조치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공원의 꽃밭이 그대로 남아 있고 꽃밭의 꽃들이 그대로 남아날 것인가? 아름답고 유쾌한 공원이 계속해서 아름답고 유쾌한 공원으로 유지가 될 것인가? 물론 공원이 사람을 위해 있고 사람이 공원을 위해 있지 않지만 공원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하려면 공원이 공원이 되도록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68.1)
 우리들은 자칫 한 주일을 혼란스럽고 병적으로 들떠 있는 삶으로 채우기 쉽다. 안식일은 이같은 한 주일의 삶 안에 마련된 호젓하고 깨끗한 공원 같은 시간이다. 안식일은 단조롭고 부자연스러운 우리의 사막 같은 일상 안에 마련된 하나의 작은 오아시스이다. 세속적인 우리의 공동체 안에 마련된 거룩한 성전이다. 공원 같고 오아시스 같고 성전 같은 이 안식일에 의하여 우리의 일상은 질서와 활기와 신성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과 신성모독적인 경망스러움과 파괴적인 본성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이 공원 같고 오아시스 같고 신전 같은 우리의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고 유지시켜야 할지에 대하여 현실적인 판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마땅히 우리들의 안식일을 “너희는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하고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여러 가지 금지 규정들에 의하여 경계되고 보호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쉼과 은혜와 거룩을 누릴 안식일은 더 이상 우리에게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169.1)
 안식일 곧 “사바트”“멈추다” “정지하다”를 뜻하는 상형문자이다. 안식일의 정신에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던 일을 제칠일에 중단해야 한다. 멈추어서야 한다. 일상의 그 열병 같은 활동들을 제껴 놓아야 한다. 돈버는 일을 중단하고 다투던 일을 중단하고 요동하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찿아야 한다. 생명의 고요한 중심에 서야 한다. 영어의 holy(거룩한), whole(온전한), healthy(건강한)는 모두 같은 어원에서 나온 낱말들이다. 생명의 중심을 묘사한 낱말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의 말씀을 “안식일을 기억하여 온전히 지키라” 또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건강히 지키라”로 번역할 수 있다. 건강한 신체와 지성과 영성으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이다. 신체와 지성과 영성의 중심을 찿는 날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이다. (169.2)
 영원한 복음의 가장 오래된 설교자는 제칠일 안식일이다. 제칠일은 에덴 시절부터 매주일 마다 24시간씩 사람들을 하나님의 준비하신 영원한 안식으로 초청해 왔다. 예수님이 태초에 창조의 작업을 마치시고 제칠일에 안식하셨으며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오신 후에는 다시 십자가에서 구속을 다 이루신 후에 안식하신 엄연한 사실을 해소시킬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제칠일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안식일이요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완전한 창조와 구속의 표징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안식일을 바르게 지킨다면 만물을 창조하시되 자신의 눈에 보시기에도 “좋게,” “심히 좋게” 창조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신앙으로 안식일을 바르게 사용한다면, 그들은 그들의 삶에 하늘이 새롭게 열리는 경험을 반복하여 살게 될 것이며 믿는 자들을 위해 남겨 있는 저 영원한 “사바티스모스”로 들어가는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1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