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이 3개 1조 기적들을 하나 하나씩 연구하고, 그 사이의 막간들도 살펴볼 것이다.

 첫 번째 3 1조 기적들. 첫 3개 1조(8:2-15)는 세 개의 치료 기적들을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문둥병자, 로마 군대의 이방인 장교의 종,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다. 이 모두는 치료의 기적이기도 하지만, 이 셋은 모두 이스라엘의 종교에 참여할 수 없도록 축출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134.1)
 문둥병은 고대 세계에서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한 질병이었다. 문둥병자의 신체가 붕괴되는 것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가정의 안락과 공동체로부터 이런 사람들을 격리시키는 사회적인 추방이었다. 그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는 즉시 그 문둥병자는 인간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모세는 이렇게 기록했다.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레 13:46). 예수 당시에 문둥병자들은 예루살렘을 포함해서 성벽이 둘린 모든 도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처럼 그들은 성전 예배에서 배제되었던 것이 명백하다. 레위기의 규정들에 따르면,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은 그들의 옷을 찢고, 그들의 머리를 빗지 말고, 그들의 얼굴 아랫부분을 가리우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레 13:45)라고 소리질러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건강한 사람이 그들과의 접촉으로 인하여 그들 자신의 건강을 위태롭게 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134.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문둥병자를 고치셨다! 그는 그 문둥병자를 고치셨을 뿐 아니라 “손을 내밀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다. 그는 그가 나음을 입기 전에 손을 “저에게 대”셨다(8:3). 그 행위가 가르치는 교훈은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질병들 가운데 가장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질병을 다스릴 권세가 있으셨다. 예수께서는 문둥병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135.1)
 두 번째 기적은 이방인의 종을 치유한 일이다(5-13절). 유대인의 생각에, 문둥병자만이 이방인보다 더 부정했다. 문둥병자들은 예루살렘에 전혀 들어갈 수 없었던 반면에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성전에서 온전한 예배드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방인의 바깥뜰 안쪽의 성전 복합 건물(complex)로는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135.2)
 이 백부장은 유대인이 볼 때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놀라운 믿음을 나타내었다. 예수를 군대의 지휘관인 자신에 비유하면서, 그 백부장은 예수께서 그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 그의 집으로 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저 명령만 하시면 고침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백부장은 마태복음에 등장한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의 권위의 범위-즉 예수께서는 그의 말이 수행되도록 하기 위해 몸소 임재하실 필요조차도 없으시다-를 이해한 첫 번째 사람이다. 그처럼 예수께서는 질병에 대해서 뿐 아니라 거리(距離)에 대해서도 권세를 가지셨다. (135.3)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을 인해 백부장을 칭찬하셨을 뿐 아니라 그 기회를 이용하여 유대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한 장면을 제시하신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실 때 큰 잔치가 베풀어질 터인데, 모든 유대인들이 참석하여 먹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방인들은 거기 참석할 수 없을 것이다. (135.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이야기를 약간 각색하셨다. 그에 따르면, 많은 이방인들(“동서로부터” 올 자들)이 그 잔치에 들어올 것인 반면에,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들(“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11, 12절). (135.5)
 그처럼 이 한 마디의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두 가지 주제들을 제시하셨다. 그 첫째가 이방인들의 구원이다. 이 주제는 1장의 족보에서 예수의 여성, 이방인 조상들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제2장의 박사들(또한 이방인들)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으로 계속된다. 그리고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마태복음의 끝 부분에 있는 복음 사명 위임에서 그 절정에 도달한다(28:18-20). (135.6)
 두 번째 주제는 그들이 메시야를 거절한다면 유대인들이 불확실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그 주제는 마태복음 전체를 통하여 맥이 이어지고 있는데, 메시야로서의 아기 예수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배척에서 시작하여 예수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에 대한 유대인 당국자들의 배척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메시야가 베풀 잔치 때 이방인은 가납되지만 유대인은 배척된다는 이중의 주제는 그의 동료 유대인들을 각성시키기 위한 이중의 자극 역할을 한다. (136.1)
 첫 3개 1조에서 세 번째 기적(8:14, 15)은 예수께서 질병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셨다는 사실을 깊이 각인(刻印)시키는 반면에 또한 여성들—충만한 성전 특권들을 누리지 못한 또 다른 그룹—에 대한 그의 긍휼하심을 나타내 준다. 그들 모두 건강하고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성전 지역에서 여인의 뜰 너머로는 나아갈 수 없었다. (136.2)
 그와 같이, 첫 3개 1조의 기적들은 두 가지—질병을 다스리는 예수의 권위와 그의 왕국에서의 시민권의 포괄적인 성격—를 입증해 준다. D. 헤어(Hare)가 지적하듯이, “예수는 축출당한 사람들을 그의 권세와 권위를 통하여 포함시키기는 메시야이다”(Hare, 90). (136.3)
 첫 번째와 두 번째 3 1조 사이의 막간. 마태복음 8장9장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기적의 3개 1조 사이에서 우리는 제자도(弟子道)에 관한 막간을 발견한다. 이 주제는 마태가 10장에 접근하면서 형성해 나가고 있는 주제이다. 이 막간(8:19-22)의 주인공은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두 사람이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를 따르기를 원하는, 학식은 있지만, 열성이 지나친 서기관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제자가 될 때 치러야 할 대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제자가 되기를 원한 두 번째 사람은 열성이 덜한 추종자이다. 그는 그 당시의 관습에 따라 그의 아버지가 죽어 장사되는 즉시 제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여러 해가 걸릴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지금 당장 결정을 내려야 할 긴급성을 그의 마음에 깊이 각인시키신다(21, 22절). 예수를 따르려는 결정은 무한정 연기될 수 없다. 왕국의 사업은 긴급하며, 그 왕에 대한 사람의 반응은 극히 중요하다. 마태는 8장 23-9장 8절에서 예수에 대한 있음직한 반응들을 계속 부각시킬 것이다. (137.1)
 기적들에 대한 두 번째 3 1. 두 번째 3개 1조에서, 마태는 예수의 권세, 즉 폭풍을 잠잠케 하심으로써 자연계를 주관할 그의 능력(8:23-27), 귀신들린 두 사람을 치료하심으로써 귀신들을 주관할 그의 권세(28-34), 그리고 중풍병자를 용서하시고 치료하심으로써 죄를 주관할 그의 권세가 그에게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137.2)
 중풍병자를 용서하심으로써 나타난 죄를 주관할 수 있는 예수의 권세는 자연계와 귀신들린 자들을 다루고 있는 기적들이 암시하고 있는 바를 명백하게 해준다. 즉, 이 세 이야기 가운데서 나사렛 예수께서는 자신이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시고 있다. 유대인의 사상 가운데에, 이 두 번째 3개 1조의 이 분야 모두를 다스리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만 갖고 계신 대권이었는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런 통치권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입증하신다. 그처럼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라고 묻는 백성들의 놀람에서 시작하여(8:27)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귀신들이 확인해 주는 것으로(29절),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께서 공개적으로 자신이 죄를 용서할 하나님의 대권을 가지고 계신다고 주장하시는 것(9:2-6)까지 고조되는 점층법을 본다. 마태는 예수를,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셨을 뿐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제시하고 있다. (137.3)
 두 번째 3개 1조 기적들은 또한 그것들이 모두 구경꾼들의 반응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폭풍을 잠잠케 하신 후에, 그 결과는 놀람과 질문이었다.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8:27).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미해결 상태로 놓여져 있다. 귀신들린 사람들을 치료하신 후에, 사람들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온 시내가 예수를 ...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34절). 중풍병자를 고치신 후에, 군중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9:8). (137.4)
 그처럼 두 번째 세 기적은 우리를 마태복음 2장의 주요 쟁점 사항의 하나—즉 하나님의 메시야적 아들 예수께 반응할 필요성—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물론 이것은 첫 막간인 8:19-22에서 제자가 되기를 원한 두 사람의 이야기의 주제이기도 하다. (138.1)
 두 번째와 세 번째 3 1조 사이의 막간. 예수에 대한 반응은 두 번째 막간을 이루는 두 제자 이야기의 주제이기도 하다. 첫 이야기는 예수에 대한 두 반응을 묘사한다(9:9-13). 하나는 마태의 이야기로서, 그는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돈이 잘 벌리는 세금 징수 직업을 기쁜 마음으로 포기한다(9절). 그는 8:19-22의 제자 이야기들에 예시된 희생과 즉각적인 반응의 공과들을 배웠던 것이다. (138.2)
 이 첫 이야기에서 또 다른 반응은 바리새인들의 이야기이다. 마태가 그의 회심과 부르심을 경축하기 위하여 차린 “큰 잔치”에서 그들은 예수께서 세리들과,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잡수시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 기분이 언짢아진다(눅 5:29; 15:1, 2도 보라). 바리새인들에게 대답하시면서 예수께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참된 상태가 어떠한지 꿰뚫어 볼 영적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13절에서 호세아 6:6을 인용하시면서 구약에 비추어 볼 때 바리새인들이 영적인 이해력이 부족하다고 명백하게 지적하신다(미 6:6-8도 보라). 그들은 율법 외적인 준수에는 매우 탁월했지만, 유대교의 정신에서는 완전히 실패한다(마 23:23, 24). 그들은 영적으로 잃어버린 바 되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께서 구원하러 오신 죄인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9:13; 또한 1:21을 보라). 그들은 의사가 필요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9:12). (138.3)
 두 번째 막간에서 마지막 제자 이야기는 침례자 요한의 제자들을 다룬다(9:14-17). 그들은 분명히 바리새인들의 영향을 받아 예수에 대하여 비평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요한의 제자들이 물은 질문은 ‘왜 예수께서 죄인들과 잔치하면서 잡수시느냐?’(앞의 제자 이야기에서처럼)가 아니라 ‘도대체 왜 그가 잔치하고 잡수셔야 하느냐?’이다. (1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