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 제2부 모형과 메시야 제10장 성소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곳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 찌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 찌니라”(레 16:21~22). (61.5)
 따라서 대제사장은 상징적으로 눈에 보이는 염소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죄를 올려놓았고, 그 후에 염소는 마치 죄가 수화물인 것처럼 죄를 지고 진영 밖으로 내보내졌다(레 16:21~22). (62.1)
 제사의식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한다. 모든 것에 마음이 열려있는 어린이들은 성인들보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연결을 잘 감지하는 것 같다. 내 딸은 세 살이 되었을 때 내가 뒤뜰에서 부메랑을 던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연습을 통해 부메랑을 던지면 원을 그리며 날아서 내 발에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사라는 그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자신도 해 보겠다고 시도했지만 그녀의 부메랑은 불안정하게 가다가 그녀의 몇 피트 앞에 떨어졌다. 똑같은 결과가 되풀이 되었다. 그녀는 점점 기가 꺾이더니 부메랑을 공중으로 던졌다. 그것이 떨어졌을 때 그녀는 “하나님이 부메랑을 잡지 않으셨어!”라고 소리쳤다. (62.2)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에 사라에게 어제 한 말의 의미를 물어 보았다. 나에게 부메랑이 되돌아 온 것은 하나님께서 그걸 잡으셨다가 다시 나에게 던지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내가 하나님과 잡기 놀이를 하면서 신의 영역과 교통하고 있는 줄 생각했던 것이다! (62.3)
 만일 사라가 옳았다면 나는 제사의식에서 일어나는 그런 교통에 참여했던 것이다. 부메랑 용어를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제물을 “잡으셨고”, 용서 같은 것으로 복을 “되돌려 주셨다”고 말할 수 있다. (62.4)
 제사의식에는 힘이 있다. 그것은 일반적인 대화로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게 한다. 언어와 같이 제사의식은 상징적인 의미로 대화를 한다. 그러나 제사의식으로 대화하는 힘은 그 의미가 실행된다는 사실에 있다. (63.1)
 만일 당신이 제사의식의 힘을 의심한다면 1963년 11월에 있었던 존 F. 케네디의 장례식을 기억하라. 대통령의 젊은 과부는 그 예식을 계획했고, 그것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드라마 중의 하나가 되도록 했다. 재클린 케네디가 잘못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제사의식에 있어서는 아주 완벽했다. 기수 없는 말과 고독한 백파이프의 비통한 소리, 그리고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화염을 누가 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한 상징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제사의식은 만마디의 말을 표현하는 활동사진이다. 세상은 이해했다. 그리고 세상은 흐느껴 울었다. (63.2)
 우리는 이스라엘 성소의 제사의식이 특별한 종류의 활동 체계임을 발견했다. 제사의식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바라봄으로 우리는 큰 범주의 활동 체계에서 시작했고, 초점을 규정된 활동 체계에 맞춰 좁혔고, 그리고 “제사의식”의 독특한 범주로 다시 좁혔다. “제사의식”의 독특성은 제사의식들이 실질적, 물질적 세계의 범주를 초월한 어떤 것이나 누군가와 교통한다고 믿어지는 사실에 있다. (63.3)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격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쳐지지는 않았다. 그분께서 기별을 보내주시고 우리는 그분께 기도할 수 있다. 인간 사이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던 이스라엘의 성소에서 그분은 친밀한 교통을 제공하셨다. 제사의식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고 그분을 마치 만질 수 있는 것 같았다. (63.4)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의 질병과 죄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킬 수 있는 “버블” 없이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분을 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질고와 죄들은 그분을 죽게 만들었다(사 53:3~5).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언젠가 가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다. (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