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holy--qodesh)에 대한 히브리 사상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의미는 “떼어놓다,” “분리되다”이다. 안식일에 적용하면, 그 날의 신적인 거룩성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다른 여섯 날로부터 떼어놓으신 것에 있다. 여기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떼어놓으신 것이 강조되고 있다. 안식일의 거룩성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로부터가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로부터 나온다. 신자들은 안식일의 거룩함을 그날에 자신들의 행동을 바꾸므로 경험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임재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생애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그들의 일을 중단한다. (55.2)
 죤 스키너는 지각력 있게 지적하기를 안식일은 “사람이 준수하므로 존재하거나 중단되는 어떤 제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쉼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실이며, 따라서 그 날의 신성성은 사람이 그 유익성을 얻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따르는 하나의 사실이다”103)고 한다. (55.3)
 “거룩하게 하다”(to sanctify--yeqaddesh)라는 히브리어 동사의 언어 형태는 리우폴드(H. C. Leupold)가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사역형의 느낌과 평서문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선언하셨고 또 그 날이 인간을 위한 거룩함의 한 방편이 되도록 하셨다는 뜻이다.104) 성경에서 “거룩”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경우는 제단이나 성막, 또는 사람과 같은 사물이 아니고, 일곱째 날(창 2:3), 곧 시간이었다. (55.4)
 안식일의 거룩성의 의미는 구속사가 드러나면서 더욱 명확하게 된다. 예를 들어, 출애굽에서 안식일의 거룩성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현현과 관련을 가지므로 그 뜻이 더욱 명확하게 밝혀진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시내산으로부터,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는 명령의 선포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성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 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초청으로 시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신 5:15 참조), 그 날의 거룩성이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그날을 거룩하게 하신 것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강조하므로 닫고 있다(출 20:11)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히브리어에서 똑 같은 단어가 두 경우에 사용되고 있다. (55.5)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경험은 예배의 날(안식일)에, 그리고 후에는 예배를 드리는 장소(성막)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육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장면은 이것들 모두 시내산, 안식일, 성막에서 발견되며, 또한 그것들을 함께 묶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가 온 백성 앞에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출 19:11),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직면하도록 그들 스스로를 준비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그 준비는 개인적인 성결(출 19:10)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둘러 쌓여져야 할 그 산 주위의 경계를 점검하는 것을 포함했다. (55.6)
 안식일의 거룩성과의 연관관계는 결코 도외시 될 수 없다. 실로, 개인적인 준비와 보통의 시간과 거룩한 시간 사이의 경계를 정리하는 것들은 안식일의 거룩함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다. 사람들이 안식일에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고자 할 때 필요한 준비를 하지 않고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혹은, 개인적인 이익과 즐거움을 제쳐두는 그 시간에 경계를 정리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거룩한 일곱째 날에 임재하시는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56.1)
 하나님의 거룩성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시내산에서 구름 속으로 모세를 불러 자신의 임재를 가까이서 나누는 경험을 하도록 초청하시므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 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 칠일(seventh day)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 24:15-18). (56.2)
 하나님께서 모세를 제 칠일에 자신의 영광스러운 임재 속으로 들어오도록 초청하시므로 창조 때 있었던 하나님의 안식일의 거룩함에 대한 신비스런 의미를 드러내셨다. 안식일의 거룩성은 이제 이 날에 하나님에 의해서 주입된 마술적인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에 그리고 안식일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들의 생애 속에 계신 그분의 신비스럽고도 위엄스런 임재로 설명된다. (56.3)
 안식일의 거룩성에 대한 의미는 후에 장막에 대한 계시의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 31:31)는 말씀 가운데서 더욱 힘있게 제시된다. 안식일의 신성성은 이제 분명히 당신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임재와 같은 위치에 있다. 이제서야 창조 안식일의 거룩성에 대한 신비가 벗겨진다. 그 신비는 정밀하게 그분의 백성들의 생애 속에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구성된다. (56.4)
 엿새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를 선한 사물들과 살아있는 존재들로 채우셨으나, 그러나 일곱째 날에 그는 그곳을 자신의 임재로 채우셨다. 이 세상과 인간의 생활 속에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임재의 상징과 보증이 되는 이 안식일은 하나님의 사랑의 돌보심에 대한 가장 탁월하고 가장 영구적인 표현을 제시한다. (56.5)
 안식일의 영구 불변성
 창조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지배하시는 상호 관계의 이상적인 질서를 세우신 것을 배운다. 그분께서는 안식일제도, 결혼제도, 노동제도 등을 세우셨으며, 이 세 제도들은 후에 십계명에서 공식화되었다. (56.6)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었을 때(창 3:6), 그들의 결혼과 일은 죄의 저주의 결과로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안식일은 그렇지 않았다. “안식일은 타락의 결과로 인한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 다른 두 창조 제도와는 달리, 안식일은 낙원의 작은 한 부분을 남겨 놓았다. 따라서 그것의 가치는 그 주위의 악화된 상황에 의해 오히려 더 높아졌다. 이제 그 일은 지치게 하고, 안식일은 노동을 중단하고 필요 되는 쉼을 마련한다. 더욱 중요하게도, 그 인간들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으로부터 차단되어, 그들은 타락 이전에 그들이 그러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분의 지배 아래 머물러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105) (56.7)
 타락이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인간의 생명과 관계를 지배하시기 위해서 제정하신 바로 그 질서를 삭제하지 아니하셨다. 비록 결혼과 노동 제도가 더욱 어려워졌지만 그것들을 남겨두셨다. 이와 똑 같은 방법으로, 비록 안식일이 그 날을 범하게 하고 또 안식일 시간을 할애하려는 많은 개인적인 일들이 빈번히 안식일 준수를 어렵게 만들고 있지만, 그 안식일을 남겨두셨다. (56.8)
 앞에서 고찰한 빛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쉬시고, 복 주시고, 그리고 거룩하게 하시므로 인간을 위해 진행되는 주일 주기(weekly cycle)를 묘사할 수 있는 한 날을 창조하셨으며, 그리고 그 안식일에 특별한 방법으로 그분과 교제를 나누도록 그들을 초청하고 계신다고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으며, 흙으로부터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 활력을 불어넣으시고, 그분 자신이 “안식하시므로” 안식일을 창조하셨다. (57.1)
 이스라엘이 있기 오래 전, 곧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애의 기본적인 요소들인 결혼과 노동 제도와 함께 안식일을 제정하시므로 인간 가족을 위해 그 날을 영구적인 한 제도로 만드셨다(막 2:27). 다른 아홉 계명들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인간 가족을 묶는 우주적인 원칙들이 된 이상, 후에 안식일이 십계명의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 계명의 보편성을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보편성을 지지하고 있다. (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