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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원하심
 구약성경은 고대 근동지방의 창조신화인 ‘에누마 엘리쉬’나 애굽의 신화들과는 대조적으로 신들의 기원과 관계가 있는 신들의 계보나 신들의 싸움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1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시작이 있지만, 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무한하게 존재하시는 분이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영원하신 야훼의 이름’을 불렀다(창 21:33). 상록수인 에셀나무는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의 표시였다. 성경은 하나님을 ‘영원하신 야훼’(창 21:33) ‘영원하신 하나님’(신 33:27) ‘영원하신 하나님 야훼’(사 40:28) ‘영원하신 왕’(딤전 1:17) ‘영원하신 성령’(히 9:14)으로 부른다. (107.1)
 ‘야훼’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훼’‘나의 영원한 이름’이라고 말씀하셨다(출 3:15) ‘자존자’(自存者), ‘존재케 하는 자’라는 의미의 ‘야훼’는 영원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추상적인 무시간적(無時間的) 초월성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그분의 형상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류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영원한 언약을 세우고,2 영원한 기업을 약속하고,3 영원한 축복을 베푸신다.4 (107.2)
 2. 전능하심
 천지창조와 심판 사건들은—대홍수, 바벨탑, 소돔과 고모라— 하나님이 천지를 뒤흔들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고,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등 그분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심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발휘된다. 창세기 3:15에 약속하신 원복음을 성취하시기 위해 인간의 역사를 지배하시고, 또한 나이 들어 닫힌 태를 여셔서 약속의 자손을 태어나게 하셨다(창 17:1; 18:14). 천지를 창조하신 분께는 능치 못한 일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웃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라를 보며 ‘야훼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다(창 18:14. 비교, 렘 32:17, 27). 창조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은 전적으로 믿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명령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성취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눅 1:37). (108.1)
 족장들의 이야기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의 역사들을 기억하게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꿈속에 나타나서 경고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래의 일로 꿈속에서 아비멜렉과 대화하심으로 사래를 구원하셨고(창 20:3) 도망자 야곱의 꿈 속에 나타나서 용기를 북돋으셨고(창 28:12-13) 바로의 꿈 속에 미래에 발생할 풍작과 흉작에 대해 알리시고 요셉을 통해 해몽하게 하심으로 주님의 백성들을 위해 살 길을 예비하셨다(창 41; 45:7-8). 하나님은 무자비하게 무력을 행사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슬기와 지혜로 자비를 구현하신다. (108.2)
 3. 전지하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성경에는 추리를 통해 지식을 획득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제시하는 곳은 전혀 없다. 어디에서든지 단지 알고 계시는 하나님만을 제시한다.5 (109.1)
 창조세계를 볼 때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깨닫게 된다. 물리적인 세계를 지으시고, 삼라만상이 유지되도록 자연법칙을 세우신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속마음을 아신다. 가인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는 죄의 권세를 인지하여 경고하셨고(창 4:7) 대홍수 시대에 인류의 마음속의 계획들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창 6:5). 아비멜렉의 온전한 마음 상태를 아셨기에 그를 죄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막으셨다(창 20:6). (109.2)
 하나님은 미래를 아신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사백년 동안 객이 될 것을 아셨고(창 15:13) 리브가의 태중에 있던 쌍둥이인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의 미래를 알려주셨다(창 25:23). 전능성과 전지성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실현되며, 하나님의 백성은 그 섭리 안에 사는 축복의 대상이다. (109.3)
 하나님은 인간의 영적인 실상을 아신다.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선악의 판단의 기준은 절대적인 선이신 하나님이 기준이다. ‘오직 전지하신 하나님만이 선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아신다.’6 인간에게 선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하나님은 궁지와 위기 가운데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친히 행하셔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시고 언제나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내신다. (109.4)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믿음은 고난 가운데 오해 받으며 살아가는 경건한 이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며, 숨은 악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삶을 살도록 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날마다 간구하며 살 수 있도록 격려를 한다.7 (110.1)
 4. 무소부재하심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신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110.2)
 하나님은 인간적 판단으로는 그렇게 되기를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인간을 만나신다. 잉태한 몸으로 여주인 사래를 피해 도망갔던 하갈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라고 외쳤다(창 16:13). 형을 피해 도피하던 길에 야곱은 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야훼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말했다(창 28:16) 종으로 팔려간 애굽 땅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다(창 39:2, 3, 21, 23). (110.3)
 하나님의 편재성(遍在性)8에 대한 믿음의 표현은 제단을 쌓는 것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의식이 없다면 제단을 굳이 쌓아야 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임재의 표를 아벨의 제사에 주셨고, 노아의 제사를 흠향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다(창 4:4; 9:20, 21; 12:7, 8; 13:4, 18). 야곱은 위기의 때에 이전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추억하며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고 신앙부흥을 경험했다(창 35:1, 3, 7). (110.4)
 하나님의 편재는 온 세상을 대상으로 한다. 홍수 후에 노아와 맺은 언약의 표인 무지개는 하나님이 온 땅 위의 생물들을 돌보고 계신다는 표이다(창 9:10-17). 무지개는 ‘나(하나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이다(창 9:13) 노아와의 언약은 ‘모든 생물’과의 언약이며, 이것은 모든 생물을 주관하는 분이 모든 곳에 계신다는 생각을 뒷받침해준다(창 9:15). 주님은 무지개 보증을 통해서 온 세상에 그분이 편재하신다는 증거를 주셨다. (111.1)
 하나님이 모든 곳에 계시기 때문에 성도는 어디에 살든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하늘까지 동행할 수 있으며(창 5:24) 노아처럼 부도덕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창 6:9).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서든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에서 동떨어진 세계는 없으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늘 아래 어디에서든지 하나님과의 거리는 동일하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성별해 드리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 (111.2)
 참고 문헌
 1. Horst Dietrich Preuss, Old Testament Theology, ed. James L. Mays, et. al. The Old Testament Library, vol. 1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5), 239.

 2. 창 9:16; 17:7, 13, 19.

 3. 창 13:15; 17:8; 48:4.

 4. 창 49:26.

 5. ‘G. Vos,’ ‘Omniscience’, ISBE 3:599.

 6. Bruce K. Waltke and Charles Yu, An Old Testament Theology: An Exegetical, Canonical, and Thematic Approach, 1st ed.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7), 275.

 7. Vos, 600.

 8. 편재성(遍在性, omnipresence)은 하나님이 모든 공간과 장소의 제한을 초월하여 어디든지 실재(實在)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전지성(全知性, omniscience), 전능성(全能性, omnipotence)과 함께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에 해당한다.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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