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새 연구 제 9 장 세상 역사의 초점(단 8장)
 나) 현저한 뿔 — 알렉산더 대왕
 수염소의 두 눈 사이에 두드러진 현저(顯著)한 뿔(a notable horn)은 천사에 의해 헬라(그리스)의 첫째 왕으로 확인되었으며(8:21), 그것이 틀림없는 알렉산더 대왕임은 그 다음 절의 설명과(8:22), 11장 3, 4절 설명에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이 분명해 진다. 실상은 수염소도 수양과 마찬가지로 두 뿔이 있는 것이 정상인데, 이 곳의 상징에서는 두드러진 한 뿔(a prominent horn)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 것은, 세계사의 비범(非凡)한 존재인 알렉산더의 신분을 두드러지게 강조한 것이다. (168.30)
 여기에서 알렉산더 대왕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마케도니아의 역사적 배경을 약술하고자 한다. (168.31)
 ① 알렉산더의 출생지인 마케도니아는 지리적으로 헬라반도(지금의 발칸반도) 북부에 위치하여 있으면서, 에게해(the Aegean Sea · 多島海) 북부에 이미 자리잡고 있던 헬라인들에 의해 바다로 나갈 길을 차단당하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인들(the Macedonians)은, 헬라인들과 인종적으로 혈족관계가 있기는 했지만, 헬라사람들에 의해 야만인 취급을 받으며, 기원전 350년까지도 원시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168.32)
 ② 그러나 견강(堅强)한 국민성을 바탕으로 호전적(好戰的)이고, 그들의 왕에게 충성심을 지닌 마케도니아인들은 기원전 359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즉위한 왕 필립 2세(Philip Ⅱ)를, 그들의 왕으로 맞으면서 새로운 역사의 장(章)을 열게 된다.

 한 때 그리스의 강력한 도시국가 가운데 하나였던 데베(Thebes)에 인질(人質)로 잡혀가 있는 동안, 거기서 새로운 전술을 관찰한 바 있는 필립은, 자신이 왕이 된 후, 즉시 중앙 집권제의 정부를 구성하고, 기병대와 경보병을 주축으로한 국가 상비군을 창설하여, 먼저 동쪽과 북쪽과 서쪽 국경지대의 야만인들을 평정했다. 이제 그는 그리스를 정복할 준비가 이루어졌다. (168.33)
 ③ 계속된 전쟁에서 필립은 연전연승(連戰連勝)하여 헬라의 도시국가들을 신속히 정복했는데, 기원전 338년 당시 18세된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지휘한 캐로니아(Chaeronea) 전투에서 강력한 도시국가였던 테베와 아테네의 연합군을 패배시킴으로써, 헬라를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아테네의 대 웅변가요, 애국자인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는, 필립을 공격하는 역사에 남는 대웅변을 토하여 이를 경고했으나, 불도저 같이 굴러오는 “팔랑스”(Phalanx) 부대의 전진과 번개같이 덤벼드는 마케도니아 기병대의 돌격에, 헬라의 도시국가들은 간단히 새 주인을 맞아들이고 말았다(338 BC).」 이 해남, 56.

 이에 필립은, 정복한 헬라의 모든 도시국가들을 마케도니아의 연맹체계로 재 조직하고, 자신은 이 연맹군(聯盟軍)의 총사령관이 되어, 헬라인들의 숙적(宿敵)인 페르샤의 정복을 서둘렀다. 그러나 출정(出征)하기 직전인 기원전 336년 암살당하고 말았다. Gane, 28. (168.34)
 ④ 필립을 아버지로 하고, 정복국인 에피루스(Epirus)의 공주, 올림피아스(Olympias)를 어머니로 하여 기원전 356년에 태어난 알렉산더는 심한 불화관계에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어머니 편을 택함으로써 아버지와는 적대 관계에 있다가, 암살당한 부왕을 이어 336년 20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지 일년 후인 334년 봄, 이미 부왕이 계획하고 착수하여 놓은 페르샤 정복을 위해, 35,000의 소수 정예부대를 이끌고 날랜 걸음으로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나는 듯이 페르샤 영토로 진군해 갔다(알렉산더의 정복활동에 대해서는 7장의 표범 부분을 참고할 것). Wood, 209, 210. 바로 이렇게 알렉산더 대왕의 영도 아래 형성된 그리스-마케도니아(Greco-Macedonia)가, 계시 가운데 서편에서 나타난 수염소이며, 두드러져 나온 외뿔이 곧 알렉산더인 것이다. (168.35)
 다) 수양과 수염소의 대결
 이상에서 확실해진 배경을 가지고, 곧 이어 계시 가운데 나타난 수양(메대-페르샤)과 수염소(그리스-마케도니아)의 숙명적 대결이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168.36)
 「그것(그리스)이 두 뿔(메대·페르샤)가진 수양(페르샤), 곧 내가 본 바 강가(을래강변)에 섰던 양(페르샤)에게로 나아가되, 분노한 힘으로 그것(페르샤)에게로 달려 가더니, 내가 본즉 그것(그리스)이 수양(페르샤)에게로 가까이 나아가서는, 더욱 성내어 그 수양(페르샤)을 쳐서 그 두 뿔(메대·페르샤)을 꺾으나, 수양(페르샤)에게는 그것(그리스)을 대적할 힘이 없으므로, 그것(그리스)이 수양(페르샤)을 땅에 엎드러뜨리고 짓밟았으나 능히 수양(페르샤)을 그(그리스)손에서 벗어나게 할 이가 없었더라」(단 8:6, 7). (168.37)
 ① 이러한 생생한 대결이 역사에서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페르샤에 대한 헬라사람들의 적대적 감정은 오래고도 심각한 것이었다. 세계사에서 너무나 유명한 페르샤전쟁(492~449 BC)은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려는 페르샤와 그리스의 싸움으로, 페르샤의 선제공격이었다. 특히 오늘날의 마라톤 경주(42,2㎞)를 유래시킨,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 1세 때의 마라톤(Marathon) 전쟁이나, 480년 크세르크스(Xerxes) 때의 데르모필래(Thermopylae) 전쟁 등은 생사를 건 양국의 적대관계가 얼마나 심각했는 지를 보여준다. 김기수, 新講世界文化史(서울: 삼광출판사, 1968), 78. (168.38)
 ② 이렇게 오래 동안 페르샤에 시달려온 헬라인들은, 이 해묵은 원한으로 복수심에 불타며, 이제 20대의 젊은이 알렉산더의 기치 아래 페르샤 정복에 나선 것이다. 이러한 헬라인의 감정은 수염소가 “분노한 힘으로(in the fury of his power) 그것(페르샤)에게로 달려”갔다(8:6)는 표현에 적절히 어울리는 것으로, 이 구절의 “분노(fury)”“뜨거움(to be hot)”을 뜻하는 말의 번역이다. Wood, 210. (168.39)
 ③ 수염소와 수양의 맹렬한 싸움은 적어도 세 차례의 결전을 치룸으로써 종국을 보게 된다. 그 첫번 것이 기원전 334년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넌 즉시, 페르샤의 대군이 밀집(密集) 방어하고 있던 그라니쿠스(Granicus) 강 가까이에서의 대결전이었는데, 이 전쟁에서 이김으로써 알렉산더의 군사들은 에게해 해안을 따라 쉽게 남하(南下)할 수 있었다. (168.40)
 ④ 그 이듬 해인 333년 소아시아 중앙을 돌파한 그리스 군사들은 길리기아 통로(Cilician Gates)를 지나 다소(Tarsus)로 나온 후, 알렉산드레타(the Gulf of Alexandretta) 만의 이수스(Issus)에서, 다리우스 3세(336~331 BC)가 친히 거느린 페르샤의 대군과 대접전을 벌여, 또 한 차례의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때 다리우스는 그의 후궁(後宮)과 목욕통까지 버려두고 도주했으며, 알렉산더는 이곳에서 페르샤의 보물상자를 노획하는 대전과(大戰果)를 거뒀다. (168.41)
 ⑤ 거기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 알렉산더는 지중해 해안을 따라 내려가며, 페니키아의 도시들을 점령했으며, 332년에는 별로 저항을 받지 않고 이집트에 개선 입성하였다. 그는 이집트를 재구성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창설한 후 아몬(Amon) 신의 제사장으로부터 신의 아들로 인정받고 바로(Pharaoh)가 되었다.

  (168.42)
 ⑥ 331년 이집트를 떠난 알렉산더의 군사들은 되돌아 북진하여 시리아를 지나,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을 건너, 같은 해인 331년, 알벨라(Arbela 혹은 Gaugamela)에서 세번 째로 다리우스 3세의 대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는데, 또 다시 대승하여, 넉 달 안에 바벨론과 수사(8:2의 수산, 다니엘이 계시를 본 위치)와 펄스폴리오 등 세 도시를 점령하는 날랜 기민성을 보였다. (168.43)
 ⑦ 알벨라 전투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다리우스는 험산준령(險山峻嶺)을 넘어 메대로 도망쳤다. 330년 봄, 알렉산더는 그의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여, 도망간 다리우스가 은신(隱身)해 있는 메대의 수도 엑바타나(Ecbatana)로 쳐들어 갔다. 다리우스는 박트리아(Bactria)로 도망하려고 시도했으나 알렉산더의 군사들은 11일 동안 400마일을 치달아 다리우스를 추격하여 덮쳤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박트리아를 욕심내고 있던 배신한 그의 태수(太守) 벳수스(Bessus)에 의해 살해되어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다. Gane, 28. (168.44)
 참으로 “서편에서부터 와서 온 지면에 두루 다니되, 땅에 닿지 아니하”던 수염소는 그리스의 기민성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뿐만 아니라, 페르샤와 다리우스의 이토록 처절(悽絶)한 최후는 “그것이 ∙∙∙ 더욱 성내어 그 수양을 쳐서 그 뿔을 꺾으나, 수양에게는 그것을 대적할 힘이 없으므로, 그것이 수양을 땅에 엎드러뜨리고 짓밟았으나, 능히 수양을 그 손에서 벗어나게 할 이가 없었더라(8:7)”는 예언을 눈 앞에 보듯 재연한 것이다. (168.45)
 라) 동분서주(東奔西走)한 수염소
 이토록 날랜 걸음으로 소아시아로, 이집트로, 메대로, 메소포타미아로, 동분서주한 수염소는 “온 지면에 두루 다니되, 땅에 닿지 아니”한다는 예언을 좀 더 이루기 위해 동쪽을 향해 더욱 더 나아갔다. (16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