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5 장 재림소망의 한계설정
 소망 혹은 지식? 넷째로, 바울이 소망했던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짜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고 가르쳤던 것 사이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이 가능하면 그의 생전에 임박한 재림을 열렬히 소망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사실은 “우리”라는 용어가 포함된 구절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형적이 지나가”(고전 7:31)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남아 있도록 권고하는 것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82.2)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소망했다는 사실로 인해 그러한 소망을 그가 그 사건이 일어날 정확한 시간표로 바꿀 수 있는 자유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시간 문제에 관한 그의 주요 언급에서 바울은 파루시아의 때가 확정되지 않았음을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 5:1, 2). (82.3)
 “밤에 도적같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강림이 예기치 않은, 또 정해지지 않은 때에 있을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하셨다. 이런 익숙한 표현을 언급하면서 바울은 재림의 때가 확정되지 않았음은 잘 알고 있다는 사실(“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 5:2)을 반복하고 있다. (82.4)
 같은 기록이 사도가 디모데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라며 신실하도록 부탁한 디모데전서 6장 14, 15절에도 나타난다. “때가 이르면”을 바울은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로 분명히 의미하고자 했다. (82.5)
 바울 편지서에 있는 “우리 구절”에서 바울은 재림의 소망이 성취될 정한 때를 가르쳤거나 고수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의 근본적인 관심은 신자들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의 재림의 경험에 어떻게 함께 동참할 수 있을 것인지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82.6)
 결 론
 본 장의 연구는 재림에 대해 가정된 신약의 한계 설정을 연구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다소 부정적이었다. 예수님과 바울의 주목할 만한 “임박성에 대한 구절”은 재림을 임박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자세한 시기에 의하여 그 임박성을 정의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82.7)
 그리스도의 세 “임박성에 대한 본문들”에서 강조하는 것은 불확실한 채로 남아 있는 재림에 대한 시간적인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사건의 확실성에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구절에서 바울의 관심은 재림의 시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고 신자들이 살든지 죽든지 어떻게 그리스도의 강림의 경험을 동등하게 나눌 수 있는지에 있다. (83.1)
 바울은 자신과 청중 가운데 어떤 이들이 재림을 살아서 경험하리라는 소망을 표현하고 있으나 자신의 소망을 달이나 년(年)이라는 용어로 바꾸려고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때가 아니라 깨든지 자든지(살전 5:10) 주님을 만나리라는 확신이기 때문이다.(살전 5:10). (83.2)
 우리는 다음 장에서 재림의 임박성에 대한 강조가 아마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가능성을 제시하는 구절들에 의해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신약에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재림의 소망의 시간적인 국면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임박성과 거리감 사이에 있는 긴장에 대해 연구하고자 한다. (83.3)
 각주
 1.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는 일반적으로 소위 “지연 신학”의 개척자로 여겨진다. 그는 이 견해를 1906년에 초판된 그의 책 역사적 예수의 탐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에서 명확히 표현했다. 그의 견해는 “철저한 종말론”으로 알려져 왔다. 이 학파의 사상을 명확히 알려면 버쿠우버(G. C. Berkouwer)의 The Return of Christ(Grand Rapids, 1972), pp. 65~95와 리더보스(N. H. Ridderbos)의 The coming of the Kingdom(Philadelphia, 1962), pp. 444~527를 참조하라.

 2. Werner G. Kümmel, Promise and Fulfillment(Naperville, 1957), p. 149.

 3. 이 구절을 오스카 쿨만(Oscar Cullamnn)은 그리스도와 시간(Christ and Time)(Philatelphia 1950), p. 87에서 사용한다.

 4. Rudolf Bultmann, “New Testament and Mythology,” in Kerygma and Myth, ed. H. W. Bartsch(London, 1953), vol. 1, p. 5.

 5. 토론을 위해 무어(A. L. Moore)의 The Parousia in the New Testament(Leiden, 1966). pp. 176~189을 참조하라.

 6. 다양한 견해들의 지지자들에 대한 짧막한 토론을 위해서 훼케마(Anthany A. Hoekenoc)의 The Bible and the Future(Grend Rapids. 1979), pp. 113~114을 참조하라.

 7. G. H. Boobyer, St. Mark and the Transfiguration Story(Edinburgh, 1942), p. 87.

 8. 밑줄친 부분 강조

 9. George Eldon Ladd,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Grand Rapids, 1974), p. 200.

 10. 이 견해 주석자들의 참고 도서 목록을 위해서는 무어(A. L. Moore)의 The Parousia in the New Testament (Leilen, 1966), p. 109. Note 7를 참조하라. (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