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5 장 재림소망의 한계설정
 다음 부분(16~23절)은 박해에 직면하여 수행해야 할 더 넓은 선교 활동을 묘사하고 있다.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장의 나머지는 박해 하에서 증거해야 할 주제를 더 넓게 전개한다(24~42절). 그러므로 광의적 문맥에 의하면, 본 성경절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전해야 할 제자들의 사명에 관한 일련의 전도들 중 한 부분을 이루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79.3)
 직접적인 문맥. 둘째는 23절의 직접적인 문맥이 되는 16절에서 22절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구절들은 유대인들(“공회와 회당”17절)과 “이방인들”(“총독들과 임금들”18절)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닥쳐올 박해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23절충고의 말씀과 격려의 말씀을 주고 있는 것은 이 문맥 속에서이다. (79.4)
 충고는 조금 전에 약술한 선교 전략의 한 부분이다(14절). “이 동리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리로 피하라”(23절 상단).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봉사 기간 동안에 이 원칙을 반복해서 따르셨다(마 4:12, 15:21, 16:1~13; 눅 4:30, 31). 격려는 보증의 형태로 주어진다. “이스라엘의 모든 동리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23절 하단)는 이 격려의 말씀의 목적은 파루시아의 때를 정하려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그들의 선교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함이었다. 한계는 연대적인 것이 아니고 개념적인 것이다. 때를 말하는 구절은 불확실한 채로 남아 있다.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자가 올 때까지(eos an) 너희는 그 사명을 마치지 못할 것이다” 이다. 죠지 이 라드가 적절히 말하였듯이 “제시된 구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명이 인자가 올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9 (79.5)
 이스라엘의 동리들. 셋째는, “이스라엘의 모든 동리를” 다닌다는 구절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에 대한 사도들의 사명만을 한정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첫째는 “이스라엘”이라는 용어가 그리스도 당시에 지리적이고 정치적인 실재(實在)가 아닌 전체로서의 유대 민족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행 2:14, 22; 마 8:10). 사도행전 2장이 지적하듯이 유대인은 “천하 각국”(5절)에서 발견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동리”라는 구절은 아마도 유대인들이 살았던 세계를 의미하는 관용적인 표현인 듯하다. (79.6)
 둘째는, 직접적인 문맥이 더 넓은 의미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동리”는 이방인에 대한 직접적인 선교의 문맥 속에서 언급되고 있다(18~22절).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강림이 오로지 유대인들만을 위한 선교가 달성되기 전에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면 제자들을 이방인들에게 가라는 사명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그러한 선교를 시작할 시간조차 가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문맥은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며”를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사람들이 사는 곳은 어디에나 복음을 계속해서 전해야 할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제자들의 전반적인 사명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80.1)
 유대 선교의 우선권. “이스라엘의 모든 동리”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마태복음 가운데서 유대인에 대한 선교를 우선적으로 유도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우선권이 이방인을 위한 전도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후자(이방 선교)는 유대인(“공회와 회당”17절)과 이방인(“총독과 임금”18절)의 중요 전세자들 앞에서 증거하도록 사명이 부여되고 있는 직접적인 문맥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80.2)
 이러한 관찰과 직접적이고 광의적인 배경의 빛에서 해석할 때, 마태복음 10장 23절은 파루시아의 때를 정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가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전도가 계속될 것임을 확증하는 것이다. (80.3)
 결론. 주목할 만한 세개의 “임박함에 대한 구절”간단히 분석해 본다면, 이 말씀들이 의도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를 사도들의 세대에 정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 사건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파루시아의 시간에 대한 문제는 불확실한 채로 남아 있다. (80.4)
 이 점에 대해 사람들은 신약의 남은 부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 중 누가 고대하는 재림의 때를 한정하는 진술을 하고 있는가? 어떤 학자들은 바울,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의 글에서 재림의 때를 정하는 것에 대한 지적들을 찾고 있다. 의문이 생기는 모든 문구들을 연구하려면 현재 연구하고 있는 제한된 범위를 훨씬 초월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서신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구절에만 우리의 관심을 제한하고자 한다. (80.5)
 제 2 부 바울은 파루시아의 때를 정했는가?
 1. “우리(we)-구절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많은 진술들이 정해진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소위 “우리—구절들”데살로니가전서 4장 15, 17절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 51, 52절에 나온다. (80.6)
 바울의 생전인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첫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을 사람들을 언급할 때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를 두 번 사용하고 있다.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 4:15, 17). 비슷한 용례가 고린도전서에도 나온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 15:51, 52). 어떤 주석가들은 이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바울 자신의 생전에나, 아니면 적어도 그의 청중 가운데 몇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에 분명히 오실 것이라고 바울이 가르쳤음을 지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10 이러한 결론은 적어도 네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진지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80.7)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인가? 첫째, 데살로니가서 에서의 바울의 관심은 재림 이전에 이미 잠든 자들의 상태에 대한 지나친 염려를 덜어 주기 위함이다(살전 4:13). 염려하고 있는 이 신자들에게 바울은 그날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우리 살아 남은 자”)들이 “자는 자”(15절) 들보다 앞서지 못할 것을 설명하고 있다. (81.1)
 두 무리 사이의 대조는 오히려 비인칭적이다. “우리”라는 말은 특정인의 무리, 즉 데살로 니가인들과 바울 뿐만 아니라, 재림 때에 살아 있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이 강조하는 것은 각 그룹에 누가 포함되는가가 아니라 각 그룹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이다. (81.2)
 일반적인 용례. 둘째, 고린도전서 15장 51, 52절(“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변화하리니”의 일인칭 복수형은 죽지 않을 자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라는 바울의 확실성을 표현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사도의 관심은 부활 사건의 정확한 때를 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비밀( mystery- 51절), 즉 재림 때에 살아 있는 자가 먼저 죽음을 맛보지 않은 채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을 나타내는 데 있다. (81.3)
 고린도전서 15장에 있는 우리데살로니가전서 4장 15절에서처럼, 바울과 동시대의 어떤 고린도 신자들만을 의미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고 있다. 이 표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고린도전서 6장 14절도 똑같이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리라”(빌 3:11 참조). 문자적 일관성을 유지한다면, 그것은 전자의 구절은 파루시아 때 바울이 살아 있을 것을 기대한 반면, 후자의 구절에서는 그가 죽어 있을 것을 기대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81.4)
 이러한 뚜렷한 모순은 일인칭 복수형의 일반적인 용례를 이해함으로 해결된다. 이 용례는 한편으로는 임박한 재림과 살아서 그것을 목격할 가능성에 대한 바울의 소망과, 다른 한편으로는 더 오랫동안 기다릴 시간의 가능성과 거기에 따른 가능성을 그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바울이 일인칭 복수형을 가능성이 있는 두 경험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그 용례를 사용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대략적인 때를 정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81.5)
 살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잠들어 있을 것인가? 셋째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시간적인 국면은 어떤 구절에서도 다루어지지 않는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우리—구절” 직후에 재림의 “때와 시기”(5:1)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나 그가 택하고 있는 것은 정확한 날짜보다는 재림의 갑작스러움(“밤에 도적같이”5:2)과 그 결과로 깨어 근신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5:4~8). (81.6)
 더 나아가 바울이 “우리”라는 말을 후에 있는 몇 절에서 다시 사용하고 있는 것은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살전 5:10)는 소망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진술은 사도가 그와 독자들이 재림을 생전에 볼 수도 있으리라는 소망을 품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다른 구절과 마찬가지로 한정된 시간을 지적하지 않고 임박한 재림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에 살아 있을 수도 또 죽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중 가능성은 고린도후서 5장 9절(“그런즉 우리가 거하든지 떠나든지”)과 빌립보서 1장 20절(“살든지 죽든지”) 과 같은 다른 곳에서 바울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