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5 장 재림소망의 한계설정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앞에서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변화”에 대한 언급, 그리스도의 옷이 “광채가 나는 흰옷”으로 변형된 것, “구름”“음성”,—이 모든 요소들은 파루시아의 영광을 암시하고 있다. 부비에르(G. H. Boobyer)가 말한 것처럼, “변화는 그리스도께서 그날에 어떠 하실 것에 대한 묘사이며 어느 정도 재림의 전반적인 광경의 축소판이라는 의미에서 파루시아를 예언하”7는 듯하다. (76.6)
 변화산의 광경을 파루시아의 예견적(anticipatory) 모습으로 보는 이 견해는 2장에서 본 예언적 전망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때때로 선지자들이 임박한 역사적 심판을 여호와의 최후의 날이라는 말로 묘사하는 것처럼, 몇 사도들이 경험한 직접적인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계시는(“엿새 후”) 예비적인 것이지만 영광스런 재림의 실제적인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가복음 9장 1절과 평행절들이 그리스도나 초대 교회 파루시아의 자세한 때를 정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76.7)
 두번째 주요 “임박함에 대한 성경 구절”마가복음 13장 30절에서 찾아보게 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이 성구는 마태복음 24장 34절과 동일하며 누가복음에서 다소 다르게 나타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눅 21:32).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세대 생전에 돌아오리라고 약속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77.1)
 때 혹은 확실성? 이 난해한 구절을 주석하려고 시도할 때 세 가지 일을 유의해야 한다. 첫째는 모든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관심은 자신의 돌아오는 때(time)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확실성(certainty)을 강조하는 것이며, 때의 불확실성(“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32절)이 사건의 확실성(“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1절)과 명확하게 대조되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77.2)
 마가복음 13장 30, 31절에 주어진 역 대구형(討句形)은 때보다는 확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30절에 있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라는 부정적인 진술은 31절에 있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라는 긍정적인 진술에 의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유사하게 30절“이 일이 이루기 전”31절“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77.3)
 이 구조의 기능은 두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두번씩이나 말함으로써 어떤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두 경우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 세대”나 혹은 “천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모든 일들이 그분의 “없어지지 아니할” 말씀 때문에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역 대구형은 때가 아니라 예언된 모든 징조들의 성취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77.4)
 둘째는 어떤 사람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이 모든 일”을 종말 자체(the End itself)를 설명하는 징조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24~27절). 단지 말세(the End)를 가리키는 징조로 해석하는 것은(3~23절) 독단적인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신 것이었다면 쉽게 “이것들 중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77.5)
 “이 일”이라는 구절은 마지막 때의 징조, 즉 거짓 선지자(6절), 전쟁들(7절), 지진과 기근(8절), 세계적인 복음의 전파(10절), 박해(12, 13절), 예루살렘의 멸망(14~18절) 그리고 영광 스러운 인자의 오심(26절) 등을 열거한 후에 온다. 이것은 “이 일”이란, 예수님께서 앞에 열거한 모든 사건에 자신의 재강림도 포함시켰음을 암시한다. (77.6)
 이 세대. 셋째는 구절의 용례를 주의해 보아야 한다. 공관 복음에서는 이 구절이 시간적이고 또 질적인(qualitative) 것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이 세대”“음란하고”(막 8:38), “악한”(마 12:45; 눅 11:29), “믿음이 없고 패역한”(마 17:17) 것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한정은 예수님께서 “이 세대”라는 세 절을 자신의 동시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악하고 반역적인 백성들도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77.7)
 이러한 포괄적인 의미가 마태복음 23장 35, 36절과 같은 구절에서 발견된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홀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고 하셨다. 이 문맥에서 “이 세대”는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유대인들만을 독립적으로 언급할 수 없다. 첫째 이유는 그 문맥이 과거의 죄(35절)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34절).8 (77.8)
 둘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당시의 유대인들이, 유대 백성들이 그 때까지 범한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불합리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배경과는 반대로 “이 세대”는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만을 배타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불신자들과 반역자들을 포괄적으로 언급하는 것 같다. (78.1)
 부활한 세대. 이 의미는 역시 마태복음 12장 41, 42절에도 암시되어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심판 때에 정죄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가 자신의 세대가 심판날에 부활할 것을 예언했다면, 마지막 심판이 분명히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동시대의 사람들이 재림과 심판을 포함하여 말세의 모든 징조들을 증거하기 위해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는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78.2)
 분명히 그 동일한 세대가 그리스도의 강림의 날에 살아 있을 수도 부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관찰이 제시하는 것은, “이 세대”마가복음 13장 30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재강림 때까지 계속 존재할 악하고 믿음 없는 백성들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시간적인 것보다는 질적인 암시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78.3)
 이러한 연구의 빛 속에서 우리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세대 안에 재림의 때를 제한하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재림의 확실성을 강조하신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언급하고 있는 때는 비한정적이지만(“이 세대” 또는 “천지”) 그분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한정적이다(“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내 말은 없어지지 아 니하리라”). (78.4)
 셋째로 의미 심장한 “임박함에 대한” 구절이 마태복음 10장 23절에 나오는데, 그 평행 구절을 공관 복음서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본문을 읽어보자.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78.5)
 유대인에게 하신 선언. 어떤 사람은 이 구절에서 파루시아의 때를 정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라는 말씀을 마태복음 10장에 기록된 직접적인 여행이나 혹은 유대인에게 행한 후기 사도들의 복음 선포를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인자가 오기 전에”라는 구절을 파루시아를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78.6)
 몇 사람들이 이끌어 낸 결론은 이 구절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짧은 전도 여행의 끝이나 사도들의 생전에 유대인에게 더 긴 메시야의 복음 선포를 끝내기 전에 그의 오실 날짜를 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파루시아가 예언대로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학자들은 마태나 그리스도께서 잘못된 예언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본다. (79.1)
 광의적 문맥. 이 어려운 본문의 뜻을 결정하기 위해 적어도 세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마태복음 10장 23절의 광의적 문맥이 복합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장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하여(1~4절)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제자들의 사명이 뒤이어 나온다(5~15절). 추측컨대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봉사 기간에 열두 제자가 수행한 짧은 전도 여행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7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