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5 장 재림소망의 한계설정
 수세기를 통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간직하고 있었던 큰 소망 중의 하나가 그들의 주님께서 돌아오시는 때를 알려는 것이었다. 감람산상의 제자들처럼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마 24:3)라고 질문해 왔다. (74.1)
 그리스도와 다른 성경 기자들이 제시한 답변들이 많은 질문의 대상이 되어 왔다. 2세기의 몬타누스 주의자(Montanists)들로부터 20세기의 몇몇 세대주의자들(dispensationalists)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짜를 산정할 자료를 얻기 위해 성경을 연구해 온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과거의 많은 실망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의 때와 그것으로 이끄는 일련의 사건들을 예언하기 위한 노력은 여전히 그 기세를 잃지 않고 있다. (74.2)
 마지막 때를 추리하는 책들과 영화들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과연 그리스도나 제자들이 신자들로 하여금 파루시아의 때와 세상의 끝을 계산할 수 있는 자세하고도 충분한 징조를 주셨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유발시킨다. 시간적 요소에 관한 질문은 세심한 연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음 세 장에서 그것의 각기 다른 국면들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74.3)
 본 장의 목적. 본 장의 직접적인 관심은 그리스도나 바울이 재림의 때를 자신의 살던 세대에 국한시켰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본 장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째와 둘째 부분에서 그리스도와 바울의 “임박성에 대한 진술들”을 연구할 것이다. 이 초기 조사의 결과는 재림이 임박하다는 것과 요원하다는 것 사이의 긴장과 재림 전에 징조들의 기능을 살펴 볼 기초를 제공할 것인데 다음 두 장에서 취급될 것이다. (74.4)
 제 1 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재림의 시기를 정하셨는가?
 1. 잘못된 전망
 잘못된 한계 설정. 어떤 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임박한 강림을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간도 자신이 살던 세대에 국한시켰다고 주장한다.1 예를 들어 말부르크(Marburg)의 신약 학자인 워너 죠지 큄멜(Wermer George Kümmel)은 예수님이 재림의 임박성을 “너무나 구체적으로 강조하셨으므로 그분께서는 그의 말을 듣던 청중들의 세대에 그 사건을 제한하셨다 ∙∙∙ .이 예수님의 예언이 실현되지 않은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므로 예수님께서 이 일에 있어서 실수를 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2고 명백히 단언한다. (74.5)
 이 변증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강림에 대한 그리스도의 잘못된 한계 설정이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재림을 몇십년 내에 있을 것으로 믿게 하는 “잘못된 전망”을 야기시켰다는 것이다.3 고대했던 강림이 실현되지 않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절박한 세상의 종국으로부터 기나긴 기간의 구속사로 자신들의 강조점을 달리 함으로써 그들의 실망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74.6)
 철저적 종말론. 일반적으로 “철저적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으로 알려진 이 해석학파는 신약에 있는 재림의 소망을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생애와 인간의 운명과는 무관한 신비적 개념(비현실적 사고)으로 간주한다. 루돌프 불투만(Rudolf Bultmann)은 다음과 같이 “신비적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파루시아가 신약 성경이 기대했던 것처럼 결코 발생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으며 모든 학생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 과정은 계속해서 진행될 것이다”4고 기록할 때 이러한 견해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75.1)
 지금 막 기술된 견해는 주로 파루시아의 때를 사도들의 세대에 제한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그리스도와 바울의 몇몇 진술들에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그들이 재림의 때를 제한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와 바울의 가장 의미 심장한 몇몇 진술들을 간단하게 검토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 (75.2)
 임박함에 대한 세 성경 구절.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세 개의 주목할 만한 “임박성에 대한 성경 구절”(imminence passages)은 다음과 같다.

   1) 막 9:1(마 16:28; 눅 9:27과 비교하라),

   2) 막 13:30(마 24:34 ; 눅 21:32과 비교),

   3) 마 10:23.

 몇 사람들이 논쟁을 벌여 온 이 구절의 진실성 여부를 이러한 비전문적인 연구에서 토론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해서는 안 된다. 최근의 많은 학술적 연구는 그 구절들의 근본적인 진실성에 대해 설득력 있게 논쟁해 왔다. 우리의 주된 관심은 이러한 말씀들이 과연 파루시아의 때를 한정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75.3)
 첫번째로 주목할 만한 “임박함에 대한 본문”마가복음 9장 1절로서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누가복음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도 있느니라”(눅 9:27)와, 마태복음에서의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마 16:28)는 말씀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75.4)
 잘못된 예언인가? 언뜻 보기에는 이 선언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재림이 적어도 그의 제자들 중 몇 명이 살아 있을 동안에 일어날 것이라고 명백히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아니하셨으므로 이 해석은 주님께서 자신의 파루시아에 대한 잘못된 예언을 통해 그를 따르는 자들을 그릇 인도하는 죄를 범했다는 인상을 주기 십상이다. 이러한 견해가 “일관된 종말론”으로 알려진 부류의 진정한 견해이다. (75.5)
 그리스도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서두로 시작된 자신의 재림에 대한 이 예언에서 그리스도께서 실수를 하셨다고 가정하는 것은 그가 덜 강조한 다른 모든 진술들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급진적인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강림의 때를 알리시기를 거절하신 사실을 간과해 버린다(막 13:32; 마 24:36). 자신의 재림의 때를 알지지 못하며 징조를 통해 마지막 때를 계산할 수 없다고 하는(눅 17:20) 그리스도의 말씀과 시인을 마가복음 9장 1절을 재림의 정확한 한계선으로 보려는 이 해석과 조화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75.6)
 부활과 승천. 다른 주석가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하는 것은 부활과 승천, 성령의 부어 주심, 예루살렘의 멸망과 교회의 성장 및 선교 사업 등으로 성취되었다고 본다. 이 모든 해석은 본문을 깊이 고려하고 있지 않다.6 (76.1)
 이 세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말씀[막 9:1]은 인자가 영광 중에 오실 것이라는 말씀 직후에 하신 것이며(막 8:38; 마 16:27; 눅 9:26), 곧 이어 변화산의 기사가 뒤따른다(막 9:2; 마 17:1; 눅 9:28 참조). 그러므로 직접적인 문맥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막 9:11) “일부”의 사람들이 본다고 하는 것은 문맥상으로 인자의 영광과 권능이 재림시와 변화산상에서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나신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76.2)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는 것은, 마태가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마 16:28)이라는 표현 속에 오는 것과 보는 것을 결합하여 제시한 것처럼, 인자가 영광 중에서 볼 수 있게 오시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인자가 장래에 능력과 영광 중에 볼 수 있게 나타나는 것은 현재 숨겨져 있고 표출하지 않는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특성과 명백하게 대조되어 제시되고 있다(막 8:38, 14:62 참조). (76.3)
 이 사실은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오순절과 예루살렘의 멸망과 같은 사건들을 배제해 버릴 것인데 그 이유는 그중 어떤 것도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보리라는 것을 명백히 성취시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부활의 광경도 몇 제자들이 목격했지만, 그들 중 아무도 특별히 영광스러운 것이었다고 묘사하지 않았으므로, 파루시아의 “영광”“능력”의 가시적인 표현의 유형으로는 보기 어렵다. (76.4)
 변화산. 직접적인 문맥은 “엿새 후에”(막 9:2)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절(clause)이 의미하는 변화산의 경험과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막 9:1)을 볼 자들도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분명히 연결시킨다.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주목을 받고 있는 시간적인 연결 외에도 변화산의 경험과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강림을 암시하는 여러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다. (7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