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6장 로마교회와 일요일 준수의 기원
 니산월 14일 대신에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키는 로마인들의 관습에서 예레미아스(J. Jeremias)가 표현한 것처럼 “유대교로부터 갈라서려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인정한다.103) 예를 들어 라이트후트(J. B. Lightfoot)는 로마교회와 알렉산드리아교회가 “유대교의 모양이라도 피하기 위해서 부활절 일요일을 채택하였다고 주장한다.104) 유명한 예배학자인 리게티(M. Righetti)도 역시 지적하기를, ”유대화된 14일교도 전통을 제거한 후 로마교회와 알렉산드리아교회는 “그들 자신의 시간 계산법을 만들어 유대의 계산법까지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러한 것들로 유대인들을 의지하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105) 콘스탄티누스가 보낸 니케아 총회의 공한에서도 14일교도의 유월절을 거절하게 된 동기가 두드러진 반 유대적 감정 때문이었음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실제로 유대인들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한 종교적인 자유를 확립하기를 바라던 그 황제는 실제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256.1)
이 가장 거룩한 축일을 거행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죄를 지은 손으로 불경스럽게 더럽혀진 유대인들의 관례를 우리가 따라야 한다는 것은 무가치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그로 인해 당연히 영혼의 무지에 시달려야 했다. ∙∙∙ 그렇다면 그 혐오스러운 유대인 녀석들과 같이 아무 것도 공유하지 말자: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구주로부터 다른 방법을 제공받 았기 때문이다. ∙∙∙ 이 가장 사악한 사람들의 관습들에 연루되므로 어떤 점에서라도 그대의 영혼의 순결함이 더렵혀진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기도하라. ∙∙∙ 모든 사람들은 맹세를 깨뜨린 유대인들의 행위에 참여하지 말고 정상적인 분별력이 요구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106)
(256.2)
 유월절에 대한 유대인의 계산법을 거절하게 만든 반유대적 감정이 이 콘스탄티누스의 편지보다 더 명확하고 강력하게 표현되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니케아는 두 세기나 전부터 강력한 반유대적 감정이 동기가 되어 시작된 이 논쟁에 대한 결론이 내려진 곳으로 나타난다. 그 논쟁의 진앙지는 원래 로마였다. 부활절 일요일과 매주의 일요일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계를 통해, 안식일 준수가 일요일 예배로 대체된 일차적 원인도 역시 동일한 반 유대적 감정에 있었다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다. 이 결론을 지지하는 몇 가지 내용들은 이미 우리의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에 나타났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몇몇 교부들이 안식일을 유대인들의 불충성의 특징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언급했다. 구체적인 반 안식일 조처들이 로마교회에 의해서 특별히 취해졌다. 다른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에 대한 경멸을 나타내기 위해서 안식일이 금식의 날로 지정되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과 함께 그 날을 준수하러 나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성만찬 예식과 종교적 집회가 금지되었다. 반 유대주의가 안식일 준수의 폐지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추가적인 증거들은 7장과 9장에서 더 자세히 제기되어질 것이다. (257.1)
 로마교회의 탁월한 지위
 본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에 부활절 일요일, 매주 일요일 예배, 그리고 안식일 금식과 같은 새로운 예식 제도들을 도입하는 것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곳으로 로마교회가 지적되는 여러 다양한 암시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제기되어질 수 있다. 즉 2 세기에 로마교회는 이미 그 교회의 감독들을 통하여 새로운 절기들을 받아들이도록 많은 지역의 기독교계에 영향을 미칠 만큼 충분한 권위를 발휘했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2세기에 로마교회가 갖고 있던 지위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257.2)
 초기 교회에서 로마교회와 그 교회의 감독이 가진 탁월한 지위가 확립되는 과정을 추적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활용할 수 있는 자료들이 주로 사건이나 진상들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고 그 당시에 로마교회가 사법적인 권위를 발휘했었는지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대주교직의 권위는 그 제도가 실제적으로 확립되기 전이 아닌 그 후에 규정되어졌다.107) 연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로마교회가 가진 사법적 권위의 성격이나 범위를 규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2세기에 나타난 상황 그대로의 현상(status quo)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묘사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258.1)
 A.D. 95년경에 로마의 감독이었던 클레멘트는 고린도교회 내에서 발생한 내분과, 결국 그 일로 그 교회의 장로들이 파면되(47장)었던 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의 몇몇 내용들은 단호하면서도 심지어는 위협적인 어조로 순종을 요구하(47:1-2; 59:1-2)고 있는데, 이 사례는 당시 로마교회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암시해주고 있다.108) 레브레톤(J. Lebreton)의 관찰에 따르면, “로마교회는 이 문제에 영향을 끼칠만한 권위가 있음을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해야 할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 고린도교회 역시 그것을 깨닫고 있었고, 그래서 그에게 굴복하였다. 바티폴(Batiffol)은 이러한 중재를 ‘로마교회의 탁월한 지위의 현현’으로 묘사했다.109) (258.2)
 그 편지가 매우 존중되었고 고린도교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도 역시 정규적으로 읽혀졌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편지를 영감받은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칼 바우스(Karl Baus)가 기록에도 나타나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의식 속에 로마교회는 서열상 최고의 지위에 있는 교회로 존중받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110) (258.3)
 몇 년 후(약 A.D. 110년경) 이그나티우스도 그의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the Romans)에서 유별난 경어와 완전히 경의를 표하는 표현들을 로마교회에 바치고 있다. 다른 교회들에게 보내는 서신들에서 이그나티우스는 그 교인들을 훈계하거나 경고하고 있는 반면에,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오직 정중한 부탁만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다음과 같은 내용은 로마교회에 대한 이 안디옥교회의 감독이 가진 특별한 존경을 알게 해 준다. “그대는 결코 어느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대가 권면하는 것과 명령하 는 것들이 항상 실행되어지기를 나는 바란다”(로마교회에 보내는 서한 3:1). 머리말에서 이그나티우스는 로마교회를 “하나님께 귀중한 교회이고, 명예와 축하와 찬양과 성공과 성화의 가치를 가진 교회이며, 완전히 순수하고 탁월한 사랑 안에 있는 교회로서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건의를 드리면서 그는 이렇게 부탁한다. ”여러분들의 기도 시간에 시리아의 교회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 교회는 이 사람을 대표로 해서 하나님을 그들의 목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대의 사랑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만이 홀로 그 교회를 굽어 살펴보실 것입니다.(로마교회에 보내는 서한 9:11). 이런 진술들이 로마교회가 가졌던 실질적인 사법적 권위를 명확하게 설명해주지는 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세기 초에 이그나티우스가 로마교회에 우월한 명성과 영예를 돌리고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259.1)
 부활절 논쟁에서 중재자로서 역할을 한 것으로 이미 살펴본 리용의 감독 이레네우스(A.D. 178년경부터)는 그의 책 ‘이단반박론’(Against Heresies, 엘레우테루스 감독의 재위시에 쓰여짐)에서 로마교회를 “가장 훌륭한 두 사도인 베드로와 바울에 의해서 로마에서 설립되고 조직된 가장 위대하며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교회”로 묘사하고 있다.111) 그런 후 그는 명확하게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왜냐하면 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월등한 우월성(potentior principalitas) 때문에 모든 교회, 즉 모든 지역의 신실한 신자들은 필연적으로 이 교회의 전통과 일치해야 했기 때문이다.”112) 로마 감독의 직분과 권위를 높이 존중하는 이레네우스의 태도는 14일 교도들의 문제로 인해 로마교회 감독인 빅토르 감독(A.D. 189-199)에게 보낸 그의 편지뿐만 아니라, 고울 지방의 교회들의 평화를 교란시켰던 몬타누스파의 이설에 대한 중재를 간청하기 위해 엘레우테루스(Eleutherus, A.D. 175-189) 감독에게 그가 대사를 보낸 사실을 통해서 가장 잘 예시된다.113) 바티폴의 관찰에 따르면, 빅토르 감독이 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파문에 처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레네우스가 “이 파문을 선언한 빅토르의 권위를 미심쩍어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볼 때 로마교회의 우월성이 인정되었는지에 대한 문제는 논할만한 가치가 없다.114) (260.1)
 로마교회의 감독은 로마의 부활절을 받아들일 것은 강요하면서 그의 현저한 권위를 보여주었다. 폴리카르푸스와 폴리크라테스와 같은 이사아의 감독들은 로마교회의 관습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 감독의 요구를 인정했다. A.D. 154년에 폴리카르푸스는 유월절 문제와 기타 다른 문제들을 조정하고자 로마의 아니케투스(Anicetus)를 개인적으로 방문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다. 폴리크라테스는 한 회의에 참석하라는 빅토르의 소환에 응하였다. A.D. 196년에 폴리크라테스는 “나는 참석한 교황들을 이름을 들어 말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면서, 빅토르에게 “그대는 나에게 소환장을 보냈고, 나는 그에 따랐다”고 기록했다.115) (260.2)
 아시아의 감독들이 부활절 일요일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빅토르는 단호하게 “그곳에 있는 모든 형제들에게 전면적인 파문을 선포하였다.”116) 이것은 아마도 로마교회의 감독이 새로운 관습을 강요했으며, 의견을 달리하는 공동체는 교회의 친교로부터 완전히 끊어버리기까지 했던 그 권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이 문제에 대해 적절하게 해석한 바티폴의 설명에 따르면, “에베소 교회가 반대하고 저항한 것은 다만 로마교회뿐이다. 우리는 이 논쟁에서 로마교회가 행사한 권위를 본다. 레난(Renan)은 이 점에 대해서 적절하게 말했다. ‘로마교황권은 탄생했으며, 견고하게 확립되었다.’117) (261.1)
 로마교회가 그 감독들을 통해서 발휘한 명백한 권위는 다음과 같은 후기의 사례들에 의해서 더욱 더 구체화될 수 있었다. 군주론자인 테오도투스를 빅토르 감독이 파문에 처함. “사도들이 가졌던 바로 그 권위 가 자신들에게 전수되었다”고 로마교회가 주장했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진술,118) 이단자 사벨리우스를 칼리스투스가 파문에 처함(A.D. 217-222). 에머리타의 바실리데스가 키푸리아누스에 의해 파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테파누스 감독(A.D. 245-7)이 그를 다시 복권시킴. 신념을 가진 노바티아누스(Novatian)의 추종자인 아를레스의 마르시온(Marcion of Arles)을 면직시키기를 스테파누스 감독에게 요청하는 키프리아누스의 요청 등. 이 외에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사례들이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무라토리안 단편과 키루피아누스, 그리고 가이사랴의 피르밀리아누스에 의해서 로마교회가 “베드로의 권좌”(Cathedra Patri)로 명명됨. 이단자들뿐만 아니라 타락한자들의 침례 문제에 대해 로마의 감독이 중심 역할을 했음.119)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 축일로 로마 교회에 의해 도입되고 강요됨. (261.2)
 이러한 내용들에 비추어 볼 때 로마교회는 2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탁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것 같다. 로마의 교황은 사실상 유일한 교권을 가진 것으로 광범위하게 인식되었고,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 사회(비록 몇몇 교회들은 그 명령을 따르기를 거절했지만)가 새로운 관습과 관례들을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262.1)
 결론
 최근의 연구자들은 안식일을 폐지하고 일요일을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있어서 로마교회가 담당했던 역할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과소평가해 왔다. 오스카르 쿨만(Oscar Cullmann)에 의해서도 인정되진 것처럼,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와 신중하게 차별화하는 중에 매주의 첫날을 선택했다”120)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로마교회는 일요일 예배의 기원이 된 가장 논리적인 장소로 판명된다. 그 교회에서 우리는 그러한 예식적 변화를 성취하도록 하였던 필연적인 환경과 권위를 발견하였다. 모나키노(P. V. Monachino)도 “4세기의 밀라노와 카르타고 로마에서의 목회적 관리”(Pastoral Care at Milan, Cartage and Rome in the Fourth Century)라는 제목으로 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의 결론에서 로마교회가 서구 사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한다. “비록 동양으로부터 몇몇 영향이 밀라노에 미쳤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일 이런 종류의 목회적 관리가 필요로 되었었던 곳이 로마 시였다는 사실을 확인다면, 우리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121) 로마교회가 안식일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도록 교회들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을 모스나도 특별히 인정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안식일에 아무런 특별한 의식도 가지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안식일을 폐지한 이 로마 교회의 모본이 영향력을 행사했음에 틀림없다.”122)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더 오랜 기간 동안 생생하게 존재하였던 동방지역에서는 이런 상황이 미미했다. 그 지역에서 안식일에 대한 존중과 유대인들의 유월절 계산법에 대한 존중이 여전히 존재했던 것이 그 증거가 된다.123) (262.2)
 지금까지 우리의 조사연구는 데이비스(W. D. Davis)가 진술하는 것처럼 일요일 준수가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의식적인 반대나 혹은 그것으로부터 차별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났음을 확증하였다.124) 우리가 발견한 것은 예배일의 변화는 한편으로는 사회적, 군사적, 정치적, 문학적으로 취한 로마제국의 반 유대정책에 의해서 조장되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직접적인 논쟁에 의해서 조장되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이교 혈통이었던 로마교회와 그 교회의 교인들은 동방의 교회들보다 일찍이 유대인들로부터 갈라 서는 경험을 하였으며, 유대인들에 대한 인기가 없던 지역에서 특별히 일요일 준수를 도입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로마 교회의 주도적인 역할은 새로운 부활절 일요일 축일(매주 일요일과 밀 접하게 연관된)에 대한 도입과 강요에 의해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평가절하하기 위해서 로마교회가 신학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취한 조처들에 의해서 나타났음을 우리는 발견했다. 로마교회는 안식일이 그들의 불충성의 표로서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일시적인 제도였다고 사실상 재해석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에 금식하고, 주의 만찬을 삼가고, 종교적인 회집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유대인들의 안식일과 단절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명령되어졌다. (263.1)
 우리는 초기교회에서 안식일을 대신해 일요일 준수를 도입하도록 하게 한 원인이 반유대주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과 함께 2세기 초의 기독교 문헌 속에서 그 사실과 결과가 보다 완전하게 증명되고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264.1)
 참고문헌
 1) 이 자체로는 결정적인 논의가 될 수 없는 것이 Harry J. Leon이 고대 로마의 고고학상의 글들을 통해 입증하고 있는 것처럼, 많은 유대인들은 라틴이나 헬라의 이름들을 선호했다. 그는 고대 로마에서 유대인들이 사용한 254개의 라틴 이름들과 175개의 헬라 이름들을 제시하고 있다. Harry J. Leon, The Jews of Ancient Rome, 1960, 93-121. 로마교인의 대다수가 이교도 개종자들이었다는 것은 바울이 분명하게 로마서(1:12-15)에서 밝히고 있다. “나는 ∙∙∙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다.” 분명 로마의 이방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바울이 도착하기 전까지 유대인들과의 접촉을 제한하고 있었다. 이는 다음의 예로 알 수 있는데, 바울은 도착 3일 전 유대인 지도자들과 만나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행 28:21). Marta Sordi는 다음의 세 가지 자료들을 토대로 로마에서 교회와 회당 사이에 ‘분명한 분리’가 일어났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 바울의 몇 가지 발언(빌 1:12-14; 4:22; 1:17; 골 4:10-11), lucundus chrestianus(티베리우스 며느리의 종)의 비문, Pomponia Graecina(기독교 초기 개종자인 브리튼의 정복자, Aulus Plautium의 아내)에 관한 타키투스의 증언. Marta Sordi, II Cristianesimo e Roma, 1965, 65-72. 그리스도인들은 “그 지역의 유대교와는 단절된 채”(69절) 귀족층 개종자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유대계와 마찰을 겪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 가운데 “할례당”의 세 사람의 이름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골 4:10-11).

 2) Leonard Goppelt, Les Origines de l’Église, 1961, 202-203.

 3) Suetonius, Claudius 25, 3. H. J. Leon은 더 빠른 날(A.D. 41년에 더욱 가까운 날)을 옹호 한다. H. J. Leon, 23. 그러나 Marta Sordi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Chrestus”는 단순 히 한 선동가의 이름에 불과하며 기독교 선교와는 부관하다고 생각한다. 다음을 참고하라. S. Benko, “The Edict of Claudius of A.D. 49 and the Instigator Chrestus.” Theologische Zeitschrift 25(1969): 406-418. Dio Cassius(A.D. 150~235)는 클라디 우스의 추방에 대해서 언급하는 대신, 유대인들이 그들의 규례에 따라 모임을 갖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에 대해 설명한다. Dio Cassius, Historia 60, 6.

 4) Tacitus는 네로 시대의 박해에 대한 자신의 보고서에서 이런 식으로 그 이름을 쓰고 있다. Tacitus, Annales, 15, 44. 그 이름의 발전 과정은 다음을 참고하라. A. Labriolle, “Christianus,” Bulletin du Cange 5(1929-1930):69-88. A. Ferrua, “Christianus sum,” La Civiltd Cattolica 2(1933):552-556; La Civiltd Cattolica 3(1933):12-26. Tertullian은 이교도들을 꾸짖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이름] 그리스도인은(그대들 이 경멸하는 그 이름을 정확하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들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Chrestianus’라고 잘못 발음된 것이다”(Apology 3).

 5) Pierre Batiffol, Primitive Catholicism, 1911, 19. 예로 이러한 가설은 Achaia의 총독이자 Seneca의 형제인 갈리오(Anneus Novatus Gallio)의 태도를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 그는 율법의 변절자라는 이유로 바울을 비난하던 회당장의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행 18:15; 참고 13:29; 24:5).

 6) Tacitus, Annales 15, 44.

 7) F. F. Bruce, The Spreading Flame, 1958, 140. Leonard Goppelt도 비슷한 언급을 한다. “제국의 도시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A.D. 49년이 아닌 46년 즈음부터 유대인들과는 구분이 되었다. 로마의 자료에 따르면 그들의 분리된 신분에 대한 당국의 인식 또한 이두 시기 사이에 일어났다.” Leonard Goppelt, 42.

 8) Flavius Josephus는 A.D. 63년에 로마를 방문하면서 그에게 호감을 보인 황후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한다(Life 3). 그는 그녀가 유대인 개종자였다고 언급한다(Antiguities 22, 8, 11). 참고, Tacitus, Historia 1, 22.

 9) A. von Harnack, The Mission and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 1908, 51, 400. J. Zeiller 또한 이러한 가능성을 염두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포페아(Poppea)의 피후견인은 네로 뿐 아니라 자신들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흔히 ‘하늘의 복수, 우주를 덮는 거대한 화염, 세상의 종말에 대한 생각으로 낙을 삼는다는 ’그리스도인들을 범죄의 장본인으로 지목하며황제를 둘러싸며 둥글게 모인 무리들의 출입을 주저함 없이 허락했었던 것일까?” J. Zeiller, The History of the Primitive Church, 1949, I, 372.

 10) P. Batiffol, 20. Ernest Renan도 비슷한 언급을 한다. “로마인들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당혹하게 만들곤 했다. 왜 이 경우에만 그렇게 분명한 구별이 생긴 것일까? 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로마인들이 가진 똑같은 도덕적 반감과 종교적 고충을 안고 있었으면서도 이 순간에는 간섭하지 않았던 것일까?”(The Antichrist, 1892, 112). 그는 “당시 유대인들은 네로와 포페아와 비밀 면담을 가졌는데 이때는 황제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한 그 정도의 증오를 품고 있었을 때였다” Ibid.

 11) 참고. Tertullian, Apology 21. Commodian, Carmen apologeticum, PL 5, 865. Justin Martyr, Dialogue 17, 3.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클레멘스의 편지 중 한 본문은 적대적인 유대인들의 간섭에 대한 기억을 지켜낼 수 있었다. “질투와 부러움으로 교회의 가장 크고 곧은 기둥들은[즉, 베드로와 바울] 박해를 받고 비난을 받아 죽음에 이르렀다”(To the Corinthians 5:2). The Apostolic Fathers, An American Translation, trans. by E. Goodspeed, 1950, 51. J. Zeiller는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말한다. “어쨌든 그 날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계 로마 당국의 관계자들로 인해 구별되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으로서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체포되어 심판과 선고를 받았다”(J. Zeiller, 373). Peter Richardson은 로마인들이 유대교와의 분리 이후 기독교를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그것이 실제로는 유대인들에 의한 박해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의 독립적 개체로 분리시켜 로마 당국으로부터 그렇게 인식되도록 하고, 이를 하나의 성 내부의 논쟁으로 만들어내는 더욱 창의적 역할을 해냈다는 것이다(Israel in the Apostolic Church, 1969, 47).

 12) F. F. Bruce, 157.

 13) 유대인들의 내란과 전쟁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다음을 참고하라. Giuseppe Ricciotti, The History of Isral, 연도 불명, II, 402-461. Heinrich Graetz, History of The Jews, 1940, II, 393. 또한 A. Fuks가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다음의 글을 보라. A. Fuks, “The Jewish Revolt of 1145117,” Journal of Roman Studies 51(1861):98-104.

 14) Dio Cassius, Historia 69, LCL, 421. 참고. Eusebius의 글에서 비슷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Eusebius, HE, 4, 2. Eusebius, Chronicon 2, 216.

 15) Justin Martyr, I Apology 31, 6, trans. Thomas B. Falls, Writings of Saint Justin Martyr, The Fathers of the Church, 1948, 67.(이후 Falls, Justins Writings로 인용). 참고, Justin Martyr, Dialogue 110.

 16) Tacitus, Historiae 5, 13. Josephus는 97,000명의 유대인들이 잡혀갔으며 10만 명이 포위 작전 동안에 죽었다고 명시했다. Josephus, Wars of the Jews 6, 9, 3.

 17) Dio Cassius, Historia 69, 13. 그러나 그는 로마 군대도 큰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실제 원로원에 보내는 편지에서 습관적으로 쓰는 시작 표현을 빠뜨리고 있다. “그대와 그대 자녀들이 건강하다면 다행이오; 나와 부대도 아무 탈 없이 건강하오.” Ibid.

 18) 일부 학자들은 간소화된 형식이기는 했으나 A.D. 70년 이후로도 계속 성전에서 제물을 드렸다고 주장한다. 참고, K. W. Clark, “Worship in the Jerusalem Temple after A.D. 70,” NTS 6(1959-1960):269-280. 또한 J. R. Brown의 The Temple and Sacrifice in Rabbinic Judaism (1963)을 보라. 그들의 유적을 방문하려던 유대인들의 안타까운 시도에 대해서는 Jerome의 Commentarius in Zephanaiam 1. 15-16, PL 25, 1418이후를 참고하라. 다른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자료에 대한 분석은 R. Harris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R. Harris, “Hadrian’s Decree of Expulsion of the Jews from Jerusalem,” Harvard Theological Review 19(1926):199-206. 1. W. D. Gray, “Founding of Aelia Capitolina,” American Journal of Semitic Languages and Literatures 39 (1922-1923):248-256.

 19) J. Zeiller는 도미티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마를 꾸미는데 과도한 비용을 발생하면서 금고가 바닥이 났는데, 그의 유대인들의 대한 반감이 이러한 상황에서의 재정적 필요와 부합되었다. 따라서 그는 반 세겔(didrachma)의 세금을 추가로 엄격하게 부과하게 되었다”(J. Zeiller, 384-385).

 20) Suetonius, Donitianus 12, LCL, 365. 이 역사가는 청년으로서 그가 어떻게 개인적으로 “행정 장관과 붐비는 법정 앞에서 그가 과연 할례를 받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검사를 받던 90세의 한 남자를 목격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Ibid., 366. Heinrich Graetz는 지적 한다. ”하지만 그가 유대인들에게 가혹했던 것처럼, 도미티안은 그 배로 개종자들에 대해 냉정했고 자신의 포악한 권력의 모든 무게를 짊어질 만큼 괴롭게 만들었다“(Heinrich Graetz, 389). 참고. E. M. Smallwood, Domitian’s Attitude toward the Jews and Judaism,” Classical Philology 51(1956):1-14. Nerva(A.D. 196-98)는 그의 행정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로 “유대인 세금의 수치스러운 [갈취]를 없앴”으며 이 일을 기념하고자 그가 찍힌 동전의 전설에 그 일이 적혀있다. Dio Cassius. Historia 58, 1-2. 당대 역사가였던 Appian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 황제(A.D, 117-138) 때에 당시 유대인들은 “인두세(와 관련해) 주변 사람들에게 부과된 것 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있었다. Appian, Roman History, The Sirian Wars 50, LCL, 199.

 21) Ernest L. Abel, The Roots of Anti-Semitism, 1943, 97.

 22) S. W. Baron, A Social and Religious History of the Jews, 1952, II, 106. Baron 또한 “후기와 달리, 균일 할당 세금이 보편적인 것이 되었을 때, 인두세만은 당시 차별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Ibid., 373). 저자는 로마의 균일 할당 세금을 주제로 한 특정 연구들의 참고문헌들을 제공하고 있다. Ibid.

 23) Cicero, Pro Placco 28, 67. 그는 자신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의 신성한 의식들을 행하는 것은 우리 제국의 영광, 우리 이름의 존엄성, 그리고 우리 선조들의 관습과는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무장으로 저항하는 그 나라는 그들이 우리의 규율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불 사신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대했는가는 그들이 정복을 당하고 세금을 내며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난다”(Ibid., 28, 69. 이 구절과 로마 저자들의 이후 본문들에 대한 번역은 Menahemstern의 Greek and Latin Authors on Jews and Judaism, 1974, I, 198에 기초하고 있다).

 24) Horace는 유대인들의 미신들을 조롱하며 자신과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길 거절한 친구 Aristius Fuscus와의 일화를 언급한다. ‘더 좋은 때를 봐서 내가 얘기해 주도록 하겠네. 오늘은 13일, 곧 안식일이 아닌가. 할례 받은 유대인들에게 모욕을 줄 셈인가?’ 나는 말했다. ‘나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다네.’ ‘나는 있다.. 내가 그 많은 이들 중에서도 더욱 연약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이해해주게. 다른 날 이야기하세’(Sermones 1, 9, 65-70. M. Stern, 325. 다른 예들은 323, 324, 326을 보라). Tibullus는 한 시에서 로마에 정인 Delia를 두고 온 것으로 자신을 책망한다. 그는 여행에 대한 불길한 전조라든가, 징조가 될 만한 새들 혹은 토성의 날과 같이 변명이라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사악한 징조의 새들이나 말들은 나의 변명들이었다네, 그것도 아니면 나를 지체케 할 토성의 저주받은 날도 있었다네.” Tibullus, Carmina 1, 3:16-18, Stern, 319. 유대인들과 토성을 동일시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Tacitus, Historiae 5, 4를 보라. Ovid는 세 번의 언급을 통해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활동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라는 충고하고 있다. “그대의 머뭇대는 발이 달음질하도록 계속해서 재촉하라. 비를 피하고자 달리지도 말고 낯선 안식일이 그대를 붙들게도 말며, Allia가 자신의 불운으로 널리 알려지게도 말라.” Ovid, Remedia Amoris 219-220. 참고, Ars Amatoria 1, 75-80, 413-416. M. Stern, 348-349. Pompeius Trogus는 유대인 역사를 왜곡되게 재현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언급을 한다: 유대인의 조상들은 문둥이였으며 모세는 “아라비아 사막에서의 칠일 금식 이후, 금식의 날로써 그 민족의 규례에 따라 안식일로 불리던 일곱째 날을 성별하였는데, 이는 그 날로 그들의 굶주림과 방랑을 즉시 끝났기 때문이었다.” Pompeius Trogus, Historiae Philippicae 36 in Justin’s Epitoma 1:9-3:9. M. Stern, 337-338.

 25) Seneca, De Superstitiones, Auguestine의 The City of God 6, 11에서 인용. 세네카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사이 이 저주받은 민족의 규례들은 전 세계를 통해 그들이 인정 받게 될 정도의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그 패배자들은 자신들의 승리자들에게 율법을 주었다.” 그는 나아가 유대인들의 신성한 제도들에 대한 그의 생각을 덧붙여 설명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이 의식들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 알고 있다. 이 사람들에게서 더 중요한 부분은 그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의식들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Ibid. M. Stern, 431.

 26) Persius, Saturae 5, 176-184.

 27) Petronius, Fragmenta 37. 이 구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돼지신(pig-god)을 숭배하며 높은 천국의 귀에다 떠들어댄다. 또한 할례를 받는 경우 외에는 사람들로부터 떠나 그리스로 이주를 해도, 그리고 율법으로 주어진 안식일의 단식 앞에도 그는 떨지 않을 것이다.” M. Sterm, 444. 안식일의 개념을 금식의 날로 오해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Pompeius Trogus와 Suetonius의 Divus Augustus 76을 보라.

 28) Josephus, War of the Jews 1, 2. 그는 나아가 이러한 역사가들이 “로마인들은 위대한 민족으로써 그들은 계속적으로 유대인들의 행동의 가치를 폄하했다”라고 표현하는데 대해 비판했다. Ibid., 1, 7-8. Minucius Felix는 Antonius Julianus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유대인 전쟁에 대해 기술한 A.D. 70년 당시 유대의 행정장관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Octavius 33, 2-4).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Antonius Julianus와 상의하라. 그들이 만일 계속 반란으로 저항했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불운이 닥친 이유가 그들의 사악함에서 비롯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예고 없이 닥친 일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M. Stern, 460.

 29) Quintillian, Institutio oratoria 3, 7, 21, “아이들의 악덕은 그 부모들에게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성들의 설립한 자들은 일례로 유대인 미신의 창시자처럼 다른 이들에게 저주가

 되는 한 민족을 한 곳에 모음으로써 혐오의 대상이 된다.”
M. Stern, 513.

 30) Martial은 가장 비위에 거슬리는 악취 중에서 하나로 “안식일을 지키는 금식 중의 여인의 입김”의 냄새에 대해 언급한다. Martial, Epigrammata, 4, 4. Martial의 다른 설명에 대해서는, M. Stern의 글을 참고하라(M. Stern, 523-529). 또 다른 역사가 Damocritus 는 On Jews라는 글을 썼는데, Suda에 따르면 “그는 그들은 터무니없는 황금 머리에 예배를 드리곤 했으며, 매 7년째에는 이방인을 잡아 제물로 바쳤다. 그들은 주로 그 제물의 살을 작은 조각들로 빗어냈다고 설명한다.” Suda, Damocritus, M. Stern, 531.

 31) Plutarch, De superstitione 3, M. Stern, 549. “사악한 방법만을 꾀하는 야만인들로부터 온 헬라인들이여! 진흙을 바르고 오물에 뒹굴며 안식일 [σαββατισμούς—cf. 히 4:9]을 지키는 것과 같은 미신들로 인해.” Euripides, The Trojan Women, 764. Plutarch는 안식일을 디오니소스의 축제들과 관련시킨다. “나는 안식일에 대한 축제도 디오니소스와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바커스 신의 사제들을 사비(Sabi)라고 부르고 그 신을 기념할 때 울부짓는 소리를 낸다. ∙∙∙ 만일 사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미사 참석자들을 홀리는 기묘한 흥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보통의 관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며 서로를 초대해 마시고 포도주를 즐겼는데,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디오니소스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Plutarch, Questiones convivales 4, 6, 2, M. Stem, 557-558.

 32) Juvenal, Satirae 14, 96-106. Juvenal은 유대인들의 관습에 대한 공통적인 비난의 대상(안식일, 할례, 돼지고기에 대한 공포심, 하늘에 대한 예배)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연대와 배타적인 정신을 강하게 비판 한다(참고, Tacitus). 그는 “우연히 안식일 준수자를 아버지로 둔” 불행한 자손들을 연민한다. “그는 오직 하늘의 신과 구름만을 경배하며 그의 아버지가 먹지 않는 돼지의 살을 인간의 것과 구분하지도 못할 것이다. 동일하게 그는 할례를 받게 된다. 로마의 법들을 경멸하도록 교육받고 오직 유대인들의 법과 모세로부터 전해져 온 신비로운 책 속에 담긴 것들만을 배우고 준수하며 존중할 것이다. 같은 의식을 행하지 않는 낯선 방랑객과 할례 받지 않은 자에게는 길도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그의 아버지가 일곱째 날에 삶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방탕하게 지내기 때문이다.”(Ibid. 1. Théodore Reinach, Textes d’auteurs Grecs et Romains relatifs au Judaisme, 1963, 292-293. Juvenal의 또 다른 진술들은 다음에 제시되어 있다. Juvenal, Satirae 3, 5, 10; 3, 5, 296, 6, 156; 6, 542; 290-293).

 33) Jules Issac, Genése de l’Antisémitisme, 1956, 46.

 34) Ticitus, Historiae 55. 이 구절은 특별히 유대인들의 인종차별적 정책들을 공격하고 있다. “모든 민족들 가운데 가장 타락한 이 민족은 그들 국가의 신념들을 조롱하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기부를 하고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이는 유대인들의 부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그들이 다른 모든 인류들을 적들에 대한 모든 증오를 품고 대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 가운데서 융통성 있게 정직하게 행하며 언제나 연민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일치된다. 그들은 식사를 할 때도, 잠을 청할 때도 구별되게 행동하며, 한 민족으로써 특이하게도 성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이방인 여성들과의 교제는 자제했다; 그들 내부에서는 모든 것이 합법적이었다.” Tacitus는 덧붙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 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규례를 받아들이게 되고 이러한 교훈들로 주입을 받는데, 이로써 그들은 신들을 경멸하고 그들의 나라와 절연하고 부모와 자녀들, 형제들을 등한시 하게 된다” A. J. Church, W. J. Brodribb, trans., The Annals and the Histories by P. C. Tacitus, 1952, 295.

 35) Ermest L. Abel, 79.

 36) 제국 초기 로마에서의 유대인 인구에 대한 논의는 다음을 보라. Harry J. Leon, 135.

 37) F. F. Bruce, 267. S. W. Baron도 비슷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이 이방인[즉, 유대인들] 무리들이 빠르게 급증하면서 로마와 이탈리아에서의 반유대적 감정 또한 상당히 고조되었다. 그들만의 특별한 삶의 방식으로 인해 다양성이 공존하던 수도에서조차 그들은 낯선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이 시대의 문서를 보면 제국의 교육받은자들 가운데 이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경멸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S. W. Baron, 203.

 38) Suetonius가 쓴 표현력이 풍부한 글인 invitus invitam은 둘의 떼어놓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음을 보여준다( Titus 7, 1, 2). 티투스와 베레니케의 연애는 Dio Cassius의 Historia 66, 15, 3-4와 Tacitus, Historiae 2, 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참고, E. Mireaux, La Reine Berenice, 1951; J. A. Crook, American Journal of Archaeology 72(1951), 162.

 39) J. Lebreton, La Chiesa Primitiva, 19573, 540.

 40) A. Puech, Les Apologistes grecs du Ile siécle de notre ére, 1912, 5.

 41) 기독교에 대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태도는 약 125-126년경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Minucius Fundanus에게 보낸 그의 Rescriptus에 잘 나타나 있다.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의 박해를 금지하지는 않았으나, 보통의 과정을 거쳐 재판소 앞에서 고발이 이루어지기를 요구했다. 그리스도인들에 반대하는 일반 대중들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거짓으로 고발하는 자들은 엄중하게 처벌을 받았다(the Rescriptus는 Justin의 I Apology 68과 Eusebius의 HE 4, 9에서 인용). 한편 하드리아누스의 Rescriptus는 다소 어구나 표현에 있어 애매모호한 것들이 있는데, 의도적일 것으로 보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황제는 기독교에 대한 중도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연구는 다음의 글들을 참고하라. C. Callewaert, “Le resrit d’Hadrien à Minucius Fundanus,” Revue d’histoire et de littérature religieuse 8(1903):152-189. Marta Cordi, “I rescritti di Traiano e Adriano sui critiani,” Rivista di Storia della Chiesa in Italia 14(1960):359-370. W. Schmid, “The Christian Reinterpretation of the Rescript of Hadrian,” Maya 7(1953):1이하. 이와 관련해 그렇게 설득력 있는 권위자는 아니지만 Lampridius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는 판테온에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를 내어줄 의향이 있었다고 한다. Lampridius, Vita Alexandri Severi 43, 6.

 42) F. Blanchetiére는 2세기의 기독교적 반유대주의와 관련한 탁월한 조사를 그의 다음 글에 담고 있다. F. Blanchetiére, “Aux sources l’anti-judaïsm chrétien,” Revue d’Histoire et de Philosophie Religieuse 53(1973):353-398. Preaching of Peter (Kerygma Petrou)는 2세기 전반기로 추정되며 현재 일부만 전해지고 있는데, 하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예배가 그리스인들의 경우만큼이나 부조리하게 거부되었다.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 역시 천사들과 대천사들, 달들(the months)과 달(the moon)을 숭배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유대인들의 방식으로 그분을 예배하는 것도 납득할 수 없다. 달이 빛을 잃을 때, 그들은 흔히 말하는 첫 안식일을 기념하지 않는다. ∙∙∙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과 관계된 것은 모두 낡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 번째 민족으로서 새로운 방법으로 그분을 예배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E. Hennecke, New Testament Apocrypha, 1965, II, 100. Quadratus에 대한 유일한 정보는 Eusebius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일부 사악한 이들이 그리스도 인들을 괴롭히려고 하였으므로 우리의 종교에 대한 사과를 담고 있는 담화”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Eusebius, HE 4, 3, 2, NPNF 2nd, I, 175. 만일 H. Graetz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 “사악한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방하는 이야기들을 퍼뜨리는 유대인들이 었다면, 여기서 사과란 유대인들에 책임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H. Graetz, Geschichte der Juden, 1911, IV, 169. The Apology of Aristides (A.D. 143)에서는 유대인들의 유일신교나 자선활동을 칭찬하면서도 그들의 예배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상상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존재를 하나님이라고 인식한다. 반면 그들의 준수 방식을 보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천사들에게 봉사하고 있다. 안식일이나 매 달의 시작을 기념할 때와 같이 어떠한 것도 그들은 완벽하게 준수하고 있지 않다.” 참고, J. R. Harris, The Apology of Aristides, 1891, 6-13(147], Syriac, ANF X, 276). The Disputation between Jason and Papiscus에 대해서는 유일하게 Origen(약 A.D, 248)이 Celsus(약 A.D. 178)에게 논박하기 위해 쓴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Celsus는 로마의 이교도 철학자였는데, 그는 그 논문이 웃음 보다는 혐오를 불러일으키는데 적합하다고 단언 했다. Origen은 “만일 편견 없이 읽었다면, 유대의 경전에 관해 유대인과 대화,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예견들이 정확히 예수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내용이 담긴 그 글에서 혐오 뿐 아니라 웃음을 유발시킬 요소는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반 박한다. Origen, Against Celsus 4, 52, ANF IV, 251. R. Blanchetiére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 글은 “Justin의 Dialogue의 전신이자 적어도 그와 아주 유사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Justin과 동시대 인물인 Miltiades가, Eusebius에 따르면, “헬라인들과 유대인에 대해 두 개의 책에서 각각 설명하고 있는 비우호적 [논문]을 썼다”고 한다(HE 5, 17, 3, NPNF 2nd, I, 234). 주목할 것은 유대교와 이교가 두 개의 구별된 변증서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각각의 중요성 때문임이 분명하다. 이는 새로운 하나의 성장으로 보인다. Apollinarius에 대해 Eusebius는 Marcus Aurelius에게 보낸 변증서 외에도, 그가 다섯 권의 책을 썼다고 기술하고 있다: Against the GreeksOn Truth가 첫 번째와 두 번째였고, 두 권을 책으로 되어 있는 Against the Jews이다”(HE 4, 27, 1). Apollinarius가 Against the Jews는 두 개의 논문을 쓰고 Against the Greeks은 한권으로 그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Melito의 견해에 대해서는 82, 84쪽, Justin Martyr는 223쪽 이하를 보도록 하라. Epistle to Diognetus (H. I. Marrou에 의하면 약 A.D. 200 년)에서 우리는 당시 퍼져있던 유대인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경멸적 태도와 교회와 회당 사이에서 발생했던 극명한 단절에 대한 우수한 증언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희생적 예배는 “어리석은 행동”(3장)으로 폄하된다. “안식일 경외와 같은 그들의 미신과 육식과 관련한 그들의 세밀함, 할례에 대한 과시, 금식과 초승달에 대한 그들의 환상, 이와 같은 너무도 터무니없고 신경 쓸 가치도 없는 것들에 대해 나는 그대들이 나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4장, ANF I, 26. 참고. H. I., Marrou, A Diognéte, SC 33, 112-114). Gospel of Peter의 파편에서(약 A.D. 180) 유대인들은 무자비하게 그리스도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못 박는 모습으로 묘사된다(참고, 2:5; 3:6-9; 6:21; 12:50, E. Hennecke, 184-186). Tertullian의 Adversus Judaeos는 오늘날까지 전해진 가운데 처음으로 유대교를 논박을 위한 체계적인 시도를 한 글이다. 유대교에 관해 Justin보다는 못하지만, Tertullian은 모세의 율법이 폐기되었음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Origen(약 A.D. 248)은 유대인 민족의 거룩한 처벌에 대한 교리를 명확하게 진술한다. “우리는 그들이 이전 상태고 결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웅장한 신비의 상징을 포함한 예배를 올리던 바로 그 성에서 인류의 구주를 죽이고자 공모하며 가장 부정한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수께서 그러한 고통을 겪으신 그 성은 완전히 소멸되고 유대인 민족은 전복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행복으로의 초대는 다름 이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넘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Origen, Against Celsus 4, 12, ANF IV, 506. 후기 반유대적 문헌들에 대한 조사는 다음을 참고 öszt. A. Lukyn Williams, Adversus Judaeos, A Bird’s-Eve View of Christian Apologiae until the Renaissance, 1935.

 43) F. Blanchetiére, 361.

 44) 예를 들어, The Didache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선자들과는 같은 날에 금식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그들이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하므로 그대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해야 한다. 또한 그들과 같이 기도하지 말고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기도하라”라고 경고한다(8:1-2, trans. E. J. Goodspeed, The Apostolic Fathers, 1950, 14, 15). 신약에서 필경사들과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들”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러한 언급이 유대인들의 지도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Ignatius(약 A.D. 100년) 또한 그 가 소아시아의 몇 교회 공동체들에 보낸 편지에서 유대인화 되는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경고하고 있다.

 45) F. Blanchetiére, 396-397. 저자는 1세기와 2세기의 초기 교부들의 문헌 사이에 개연성보다는 단절성이 두드러진다고 설명한다. 그는 몇 가지 방법으로 이 단절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는데, 첫째는 영감(inspiration)에 대한 것이었다. 변증론자들은 복음서나 바울의 서신들 대신 이스라엘 민족의 불성실에 맞서 구약의 선지자들의 비난만을 배타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둘째는, 구원의 계획과 관련한 주제 안에서 발견된다. 신약에서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확장되는데 예를 들어 금송아지 사건 이후로 Barnabas나 Justin에게 유대인들은 단순하게 거부의 대상이 되었다. “율법은 바울에게처럼 더 이상 교훈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는 다만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하나의 약 일 뿐이다.” 다음은 태도와 방식에서 단절이 드러난다. 신약에서 일부 유대교의 분파들에 대한 매서운 언급들이 나타나고는 있지만, 2세기 변증론자들의 문헌 속에서는 유대교와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의 일관된 비판만 제시되고 있다. 마지막은 관점의 측면인데, 구원의 문제를 놓고 더 이상 예루살렘에서는 통곡하는 일이 없고, 다만 하나님의 아들을 멸시하고 선지자들을 죽인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Barnabas, Justin, Dignetus, Melito 참고)만 다뤄지고 있다. Edward H. Flannery는 The Anguish of the Jews (1965, 35-43)에서 “분리의 신학”(Theology of Separation)에 대한 귀중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참고. León Poliakov, The History of Anti-Semitism, 17-25.

 46) Justin Martyr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반역자이자 신성을 모독하는 무리들로 비난하며 그들을 잘못 표현하는 것에 안타까워한다. “다른 민족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좇는 우리들은 유대인들처럼 부당하게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야 바로 의로운 분과 우리, 그분의 제자들에 대한 악한 생각들을 퍼뜨리는 선동자들이다.” Justin Martyr, Dialogue 17, 1. 동일한 글 96장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회당에서 그대들은 그 분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된 자들을 저주하고, 이방인들은 단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시인한 사람들 모두를 죽이므로 그대들의 저주를 실행시킨다.” Falls, Justin’s Writings, 173, 229. 불신과 적대감이 일반적 분위기로 존재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이 반복되는 표현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1) “그대들은 우리를 증오 한다”(I Apology 36: Dialogue 39, 1; 82, 6; 133, 6; 136, 2; 134, 5).(2) “그대들은 우리를 저주 한다”(Dialogue 16, 4; 93, 4; 95, 4; 108, 3; 123, 6; 133, 6).(3) “그대들이 그 이름을 세상도처에서 더럽히고 모독하려하는 ∙∙∙ 예수”(Dialogue 120, 4).(4) “그대들은 그분께서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는 자들을 비난하기 위해 그대들이 언급한 그러한 사악하고 불법적이며 불경스러운 교리들을 그분께서 가르친다며 고발했다”(Dialogue 108, 3; 참고, 47, 5).(5) “우리의 교사들 ∙∙∙ [랍비들]은 하나의 법을 정했는데, 이는 우리가 그대들 누구와도 교류 해서는 안 되고, 또한 이 문제들에 대해 그대들과 어떠한 소통도 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었다”(Dialogue 38, 1; 112, 4; 93, 5). 일부 예들에서 나타나는 적대감은 그리스도인 들을 죽음에까지 몰고 갔는데, 이는 직접적으로 바르코케바 반란 시기에(Dialogue 16, 4; 195, 4; 133, 6; I Apology 31), 간접적으로는 로마인들을 돕는 방식이었다(Dialogue 96, 2; 110, 5; 131, 2). 참고, Tertullian, Scorpiace 10. “유대인들의 회당-박해의 분수.” 참고, Ad Nationes 1, 14. Origen은 그리스도인들을 대항해 Celsus의 유대인들이 시작한 고발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Origen, Contra Celsum I.

 47) 주목할 만한 것은, Eusebius에 따르면 도미티안은 그리스도의 친척들에 대한 정치적 음모를 꾸몄지만 심문 이후 “그들을 돌려보내고 칙령을 통해 교회 탄압을 중지시켰다”는 사실이다. Eusebius, HE 3, 20, 7.

 48) 예를 들어, Justin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이 모든 측면에서 모세로부터의 율법에 따라 살도록 강제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Dialogue 47, ANF I, 218쪽). 또한 Marcion의 극심한 반유대적운동은 차별을 인정하는 반유대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

 49) M. Simon, Verus Israel études sur les relations entre chrétien et juifs dans Tempire remain, 1964, 128. Robert M. Grant는 하드리아누스 치세 당시 시작된 변증론적 운동들이 황제의 헬라화를 도모하기 위한 노력과 바르코케바 반란의 영향으로 촉발 되었다고 지적한다. Robert M. Grant, Augustus to Constantine, 1970, 104-105. Leon Poliakov 또한 비슷한 언급을 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할례를 금지하고 135년에 바르코케바의 유혈 반란을 진압할 당시 첫 기독교 변증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과 유대 땅과는 무관하며 제국에 해로운 대상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했다.” Leon Poliakov, 21.

 50) F. Blanchetière는 유대 역사에 대한 변증론자들의 재해석과 관련한 간결하고 설득력 있는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F. Blanchetiére, 373-385.

 51) 참고, F. Blanchetiére는 Justin이 “70년과 135년에 있었던 반란의 패배와 예루살렘의 파괴와 추방, 팔레스타인의 비유대인 인구의 유입 등의 결과들 사이에 분명한 관련성을 찾고자 하는 한편,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그들의 직접적 책임과도 연관을 짓고자 했던 첫 인물”이었다고 설명한다. F. Blanchetiére, 382.

 52) E. Werner, Hebrew Union College Annual 37(1966):191-210. Werner에 따르면 멜리토가 사용한 이 문구는 특히 강하고 명확하며 독특하다.

 53) Gerald F. Hawthorne, trans., “A New English Translation of Melito’s Paschal Homily,” in Current Issues in Biblical and Patristic Interpretation, ed. G. F. Hawthorne, 1972, 171-172. A. T. Kraabel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적절한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한 세대가 이스라엘에 대한 이러한 신랄하고 직접적인 장기적 공격에 대한 영향을 무시한 채로 Peri Pascha를 읽을 수 있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 A. T. Kraabel, “Melito the Bishop and the Synagogue at Sardis: Text and Context,” Studies Presented to George M. A. Hanfmann, 1971, 81. Kraabel은 Melito의 공격의 신랄함은 “[Sardis] 유대인 공동체들의 힘과 규모”로부터 유발되었다고 설명한다. Ibid., 83.

 54) 안식일 일요일 문제에 관한 Ignatius와 Barnabars, Justin의 견해는 7장에서 논의되고 있다.

 55) Justin Martyr, Dialogue 23, 3; 29, 3; 16, 1; 21, 1.

 56) K. Bihlmeyer and H. Tuehcle은 Marcion의 교회는 놀라운 속도로 “광범위하게 그 영향력을 넓혀 갔는데 동방으로는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까지 뻗어나갔으며 그 규모와 중요성에 있어서 모든 다른 영지주의적 무리들을 앞서갔다”고 설명한다. K. Bihlmeyer and H. Tuehcle, Storia della Chiesa, 1969, I, 186.

 57) Tertullian은 안식일에 관해 Marcion에 맞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유대인들의 그리스도가 아니었더라도, 그[즉, 신약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가장 엄숙한 날에 대한 증오를 그러냈을 것이며, 그는 그분의 그리스도로서 다만 겉으로만 창조주를 따르고 있었는데, 안식일에 대한 바로 이러한 혐오에 있어 그분께서는 이사야의 입을 빌려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라고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Against Marcion 1, 1, ANF III, 271쪽). Against Marcion 1,2, 4, 5권에서 제시되고 있는 Tertullian의 길고, 상세한 논의의 요점은 Marcion이 가르침과 달리 구약의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안식일 준수의 형태와 예수님의 가르침이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 준수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가르침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유는 바로 두 가르침 모두 두 제도의 하나님이신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의 일체성을 변호하기 위한 시도에서, Tertullian은 안식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와 이사야 1장 13절(일반적인 하나의 증거, testimonium)을 임의로 동일시하는데, 이를 통해 그는 안식일을 하나님께서 항상 경멸했던 하나의 제도로 축소시키고 있다.

 58) Justin Martyr, I Apology 58, ANF I, 182. I Apology 26, ANF I, 171. “마귀의 도움으로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Pontus의 사람, Marcion은 많은 민족들로 하여금 신성 모독적 발언을 하게끔 만들었다.” Marcion의 영향력은 반세기 이후에도 Hippolytus에 의해 그의 가르침에 대한 반박에 대한 요구가 생기면서 상당히 강하게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usebius(HE 6, 22)와 Jerome(De Viris illustribus, 61)는 Hippolytus가 쓴 Against Marcion이란 논문에 대해 언급하는데 안타깝게도 오늘까지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

 59) Epiphanius, Adversus haereses 42, 3, 4; 참고, Tertullian, Against Marcion 4, 12.

 60) Yerushalmi, Shabbat 15, 3, Nathan A. Barack의 A History of the Sabbath (1965, 182)에서 인용. Barack는 추가적 자료들과 안식일 식사에 대한 논의를 소개하고 있다.(ibid., 100, 182. 참고, Judith 8:6; Jubilees 50:10, 12, 13; CDC 11: 4, 5; SB 1, 611, 612).

 61) Augustine, Epistle to Casulanus 36, 3, NPNF 1st, 611, 612.

 62) 밀라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에 금식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Ambrose가 Augustine의 어머니인 Monica에게 전한 조언을 통해 확인된다. “여기에 [즉, 밀라노]에 있을 때, 저는 금요일에 금식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로마에 있을 때만 금식을 합니다”(Augustine, Epistle to Casulanus 36, 32. NPNF 1st, I, 270. 17. Augustine, Epistle to Januarius 54, 3, Paulinus, Vita Ambrossi, 38장). Augustine 당시의 남아프리카에서도 동일한 차이가 존재했다. 주교는 다음과 같이 쓴다. “아프리카에서도 그와 같은 경우가 있는데, 어느 한 교회, 혹은 동일한 구역 내의 교회들 내에서 일곱째 날에 어떤 이들은 금식을 하고, 또 일부는 금식을 하지 않는다”(Epistle to Casulanus 36, 32, NPNF 1st, I, 270). Tertullian은 몬타누스주의자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들이 “안식일과 주의 날”에 금식을 하지 않았다고 기록 한다(On Fasting 15, ANF 112). 그는 또한 안식일에 무릎을 꿇는 것과 관련해서도 남아프리카에서 비슷한 차이가 존재했다고 전하는데, 무릎을 꿇는 것은 의미상 금식과 관련된 것이었다. On Prayer 23을 보라. 초기 기독교 시기의 안식일 금식에 대한 분석은 다음을 참고하라. Kenneth A. Strand, Essays on the Sabbath in Early Christianity, 1972, 9-15, 25-43.

 63) F. A. Regan은 중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므로 거짓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영향들로부터 교회의 규례들을 보호하면서도, 동방의 교회들은 토요일(안식일)과 주의 날 때문에 특별한 숭배를 지켜나가는데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렇다면 서방의 교회들이 금식의 날로 지킨 날이 어떻게 동방이 축제로 기념한 날인 것인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F. A. Regan, Dies Dominica, 60. J. Bingham의 암시들을 이어 Regan은 동방에서의 안식일 숭배는 회당으로부터 온 새로운 개종자들의 영향, 그리고 자신이 악으로 간주한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기 위해 안식일에 금식을 했던 Marcion에 가르침에 반작용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J. Bingham은 지적한다. “기독교 믿음의 첫 개종자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은 여전히 모세의 율법, 특히나 안식일에 대한 대단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그 날은 모세의 율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신 후의 안식에 대한 기념일이었으며, 그들의 위대한 조상, 모세 때부터 정착되어 그들의 공공예배의 엄숙한 날로 선조들로부터 오랜 시간 지켜져 왔던 날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그것을 다른 한쪽에 완전히 제쳐두고 무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J. Bingham, The Antiquities of the Christian Church, 1878, III, 1139. Joseph A. Jungman은 동방에서 안식일을 경외했던 것은 창조 결과물의 악한 속성에 대한 마니교의 교리에 맞서 기독교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설명한다. Joseph A. Jungman, The Mass of the Roman Right, Its Origin and Development, trans., F. A. Brunner, 1959, I, 246. C. W. Dugmore은 동방의 안식일 숭배가 “유대교에서 개종한 자들로부터 끊임없이 강화되었다”고 믿는다. C. W. Dugmore, The Influence of the Synagogue upon the Divine Office, 1944, 38. P. Cotton 또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동방은 더욱 보수적이었으며, 유대교와 유대적 기독교와 더욱 가깝게 교제하고 있었다.” P. Cotton, From Sabbath to Sunday, 1933, 66.

 64) Callistus에 대해서는 Le Liber Pontificalis, texte, introduction et commentaire, ed. L. Duchesne, 1955, I, 141을 보라. Hippolytus, In Danielem commentarius 4, 20, 3, GCS I, 234. Sylvester, Adversus Graecorum calumnias 6, PL 143, 936. S. R. E. Humbertz가 인용). Augustine, Epistle to Casulanus 36, 6, NPNF 1st, I, 267. “로마 교회와 많지는 않지만 일부 다른 교회들은 그것에 가깝거나 혹은 동떨어졌거나 그 날에 금식을 지킨다.” Innocent I, Ad Decentium, Epsit. 25, 4, 7, PL 20, 555. “우리는 여섯째 날 금식을 거부하지 않는 대신 안식일에도 금식이 지켜져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John Cassian, Institutes 3, 10, NPNF 2nd, XI, 218. “서방 몇 나라, 특히 그 도시[즉, 로마]에서 일부 사람들은 ∙∙∙ 안식일에는 금식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 날 사도 베드로가 시몬 마구스를 만나기 전에 금식을 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Cassian 자신의 진술은 베드로가 교회법에 다른 하나의 영구적 규율을 확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특정 긴급한 경우의 측면에서 금식을 했다는 것이다. Augustine 또한 베드로가 안식일 금식 제도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많은 로마인들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의견을 갖고 있다”라고 기록한다.

 65) Tertullian, On Fasting 14, ANF IV, 112. Augustine은 이와 유사하게 매주의 안식일 금식과 연중 유월절 안식일 금식을 연관 짓는다. 그러나 그는 주간 안식일 금식이 “로마 교회와 서방의 일부 교회들만 지켰던데 반해 ∙∙∙ 한 해 한 번, 주로 부활절에 그리스도인들이 금식하며 한 주의 제7일을 지켰다”고 설명한다(Epistle to Casuanus 36, 31, NPNF 1st, I, 270). Augustine은 로마 교회와 일부 서방의 교회들만 주간 안식일 금식을 지킨 것이 연중 금식과 결부시키는데, 이는 전자가 후자의 개념이 확장되어 발전한 것이라고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W. Rordorf가 제대로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 즉 Tertullian 시기에 서방 기독교국 전체는 거룩한 토요일에 금식을 했기 때문에, 매 주 토요일 금식을 하는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은(모든 일요일이 작은 부활절이었던 것처럼)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Sunday, 143). Rordorf는 안식일 금식에 대한 Tertullian의 입장이 “몬타누스주의적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 한다(Sunday, 145), K. A. Strand는 Tertullian의 글을 연대기적 비교 연구를 통해 안식일과 관련해 처음에는 그의 태도가 부정적이었으나 후기 몬타누스주의 시기에는 긍정적으로 변해갔다고 밝힌다. K. A. Strand, 25-42. 연중 유월절 안식일 금식을 제외한 안식일 금식에 대한 금지는 Apostolic Constitutions 5, 15, 20과 Apostolic Canons 64에서 찾아볼 수 있다.

 66) Hippolytus, In Danielem commentarius 4, 20, 3, GCS I, 234쪽, “오늘날에도 그들은 안식일에 금식을 지시하고(rai Túp võv) 있다.”는 Hippolytus의 언급은 Callistus가 명한 계절적 금식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는 그 동사(직설법 현재 시제)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하나의 관행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67) Hippolytus의 Commentary on Daniel을 쓴 시기는 학자들에 따라 A.D. 202년에서 234년까지 다양하다. Johannes Quasten, Patrology, 1953, II, 171을 참고하라.

 68) 참고, Johannes Quasten, II, 163-165.

 69) Siricius, Epistula 7, Adversus Jovinianum, PL 13, 1168.

 70) Augustine, Epistle to Casuulanus 36, 27, NPNF 1st, I, 268. 4번째 단락에서 Augustine은 안식일 단식의 관행을 “로마인 그리스도인과 지금까지의 몇 서방 공동체들”에게는 제한하고 있다.

 71) John Cassian, Institues 3, 10, NPNF 2nd, II, 218.

 72) M. Righetti, L’Anno liturgico, manuale di storia liturgica, 1969, II, 39.

 73) R. L. Odom, “The Sabbath in A.D. 1054.,” AUSS 1(1963):74-80.

 74) Tertullian, On Fasting 13, ANF IV, 111. L. Duchesne는 로마의 토요일 금식이 매주의 금요일 금식의 연장의 개념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안식일 금식이 흔히 “연장(prolongation)-superpositio”나 금요일 금식의 연속적 개념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암시하는 유사한 표현으로 지칭되었다는 사실에 자신의 결론의 근거를 두고 있다. L. Duchesne, Christian Worship. Its Origin and Evolution, 1927, 231. 다음의 책을 참고하라. Victorinus of Pettau, On the Creation of the World 5. Tertullian, On Fasting 14. 엘비라 공의회(Council of Elvira)의 Canon 26(Mansi II, 10).

 75) Didascalia Apostolorum 14, 19, trans. H. Connolly, 1929, 184, 190. W. Rordorf Didascalia에서 안식일 제도는 유대인들의 ‘예방적 차원의 형벌’로 해석된다.”고 지적한다(Sabbat, 40). 사실상 Didascalia에 따르면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그들의 파멸에 대한(끊임없는) 애도”의 개념에 기초한 것이다.(Ibid., 190).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Justin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안식일을 이해하고 있다.

 76) Apostolic Constitutions 5, 18, ANF, VII, 447. 부활절 안식일의 금식에 대한 반유대적 동기는 동일한 문서에서 다시 발견된다. 예를 들어, 금식 중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 [즉, 유대인들] 대해 애통해 하는 것은 그들이 주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을 믿지도 않고 그분의 가르침을 거부했기 때문이다”(5, 15, 445). Epiphanius 또한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주장한다. “사실상 바로 그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그들[즉, 유대인들이 마음 껏 즐기고 있을 때, 우리는 금식하며 그들을 위해 슬퍼해야 한다. 이는 그들이 그 축제에서 그리스도를 못 박았기 때문이다’(Adversus haereses 70, 11, PG 42, 359-360). P. Cotton은 말한다. “우리는 Victorinus에게서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반유대적 사려들이 결코 안식일 금식의 준수를 재촉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 때문에 부재되어 것이 아니었다는 가정을 해볼 수 있다.” P. Cotton, From Sabbath to Sunday, 1933, 67. Righetti 또한 비슷한 견해를 밝힌다. “로마와 스페인 뿐 아니라 동방의 일부 교회에서도 안식일과 금식을 함께 강조하려는 강력한 경향이 발견되는데, 이는 Stiria의 Victorinus of Pettau(약 A.D. 300)가 우리의 추측을 허락하듯 아마도 특정 반유대주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M. Righetti, 195.

 77) C. S. Mosna는 “매주의 안식일 금식은 거룩한 토요일의 금식으로부터 발전되었는데, 이는 일요일이 구월에 대한 작은 기념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 Epiphanius에 따르면, 이는 Marcion이 고대의 법과 유대인 안식일을 증오했다는 데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204.

 78) S. R. E. Humber, Adversus Graecorum callumnias 6, PL 143, 933. 이 논문은 추기경 Humbert에 의해 1054년의 해에 대한 토론의 형식으로 쓰였다. 그는 1054년에 교황 레오 IX의 명으로 교황 대사의 직분으로 콘스탄티노플로 가게 되었는데, 그의 임무는 헬라 인들로 하여금 로마(라틴) 교회의 종교적 관례들에 순응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임무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 논문은 더 나아가 안식일 숭배와 같은 일부 일탈적인 종교적 관습들을 지키지 않도록 헬라인들을 만류하려는 의도로 집필되었다. 우리의 연구에 있어 이 문헌의 중요성은 이중적이다.(1) 그것은 동방과 서방 사이의 안식일에 대한 당시의 구분되는 태도를 입증해준다;(2) 그것은 교황 Sylvester (약 A.D, 314-335)의 초기 증언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안식일 금식의 근거에 대한 추가적 이해를 돕는다. 교황의 진술에 대한 실제성은(1) Hamber가 Innocent I의 유명한 교서와 같은 다른 문헌들을 정확하게 인용하고 있다는 것과(2) Harian I (Epist. 70, ad Egrilam Episcopum, PL 98, 335)와 Nicolas I (Epist. 152, ad Hincmarum, PL 119, 115이하) 같은 교황들이 로마의 안식일 금식을 변호하기 위해 Sylvester의 진술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확인된다.

 79) Augustine은 안식일에 식사를 한 그리스도인들이 “여자 노예의 아들들이며 ∙∙∙ 교회의 의식보다 유대인들의 그것을 선호한다.”고 주장한 익명의 로마 본국인의 비난을 반박한다. 이러한 비난은 로마의 교회가 유대인들의 제도 중 하나로 여겨진 안식일 숭배를 금지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음을 암시한다. Augustine, Epistle to Casulanus 36, 4, NPNF 1st, I, 266.

 80) Victorinus, On the Creation of the World, 5, ANF VII, 342.

 81) Victorius가 또한 “금요일(parasceve)에 엄격하게 금식하는 것”을 질책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동일한 경고는 Didascalia Apostolorunn 21에서도 발견된다. 이 문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게 행한 일들에 대하여 “금요일과 안식일”에 금식하라는 촉구를 받는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먹고 기운을 내어 즐기고 기뻐하라고 권고하며, 이는 우리의 구원의 성실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라고 기록한다.(Connolly, 190쪽). 라오디게아 공의회의 Canon 29는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식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야 하며 안식일에 나태하게 있어서도 안 되며 대신 그 날에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날을 특별히 경외하며, 가능한 일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라고 명령한다(Mansi 2:570). 이와 같은 본문들 속에서 안식일에 금식이나 일을 하라는 명령은 안식일의 가치를 절하시키는 한편 일요일의 엄숙함과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금요일이 외관상의 유대의 안식일 준수를 막는데 기여하게 되었는지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그 답은 금요일 금식이 안식일까지 확장되면서 두 번째 날의 금식을 더욱 엄격하게 변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L. Duchesne는 “안식일 금식은 가장 엄격하게 다루어졌는데, 이는 금요일 밤 이후로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L. Duchesne, 223.

 82) Victorinus, 342.

 83) 이는 Tertullian의 견해였다. 금식을 지키고 성만찬에 참가하는 것을 조화시키고자 Tertullian은 양심에 가책의 짐을 지고 있는 자들에게 “주의 몸”을 받아 집으로 가져가 금식 이후에 먹으라고 제안했다. Tertullian, On Prayer 19, ANF III, 68.

 84) Innocent I, Ad Decentium, Epist. 25, 4, 7, PL 20, 555. 후자는 Corpus Jris, c. 13, d. 3 De Consecratione의 일부다.

 85) Socrates, Ecclesiastical History 5, 22; NPNF 2nd II, 132.

 86) Sozomen, Ecclesiastical History 7, 19, NPNF 2nd II, 390.

 87) C. S. Mosna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언급한다. “주간 예배식 기념에 있어서 로마는 모는 동방 뿐 아니라 서방의 많은 공동체로부터 스스로를 구별 짓는 대신 알렉산드리아의 방법에 다소 가까워지려고 했다. 우선, 금요일과 토요일은 성만찬이 관련되지 않는 한 예배의 날이 아니었다. 알렉산드리아에 대해서는 이미 Socrates의 증언을 살펴보았다.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에서 안식일에 성만찬을 기념하는 것은 관례적인 일이었으나,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사람들은 고대 전통을 따라 이를 거부했다; 이러한 내용은 Sozoman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나아가 동방과 밀라노, 아프라카의 모든 교회들은 안식일 숭배로 금식을 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로마와 스페인에서 그 날은 금식을 위해 성별된 날이었다.”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330. 그는 또한 로마가 안식일 숭배를 소멸시키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진술한다. “(안식일에 대한 특별한 의식이 없었던) 로마의 이러한 사례가 작용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Ibid., 354.

 88) 부활절 논쟁에 대한 Eusebius의 설명은 그의 글, HE 5, 23-24를 참고하라.

 89) Eusebius는 아시아의 교구들을 제외하고 ∙∙∙ 다른 지역이 교회들은 일요일에 부활절을 기념했다고 주장한다(HE 5, 23, 1). 그러나 다음의 사실들을 고려할 때,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1) 교황 Victor(약 A.D. 189-199)는 로마 부활절을 성문화하기 위하여 다양한 지방의 의회들의 집회를 계획했다. 이는 명백히 각각의 이질적 규례들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2)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팔레스타인의 주교들은 Eusebius에 따라 “유월절과 관련한 전통을 상세히 다루었고” 심의 기관의 편지를 만들었다. 이 편지는 “모든 교구에” 보내졌는데, “자신의 영혼을 쉽게 기만하는 자들에 대해 우리[즉, 주교들]는 아무런 죄가 없을 것이다”라는 기록이 발견된다(HE 5, 25, 1). 의견을 달리하는 이들의 저항을 방지하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진행된 긴 논의와 이 편지가 만들어진 것은 2세기까지 팔레스타인에 여전히 14일주의의 유월절을 지키던 그리스도인들 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3) 다음에 제시되는 교부들의 증언은 Eusebius가 수긍한 것 보다 더 많은 이들이 14일주의의 유월절을 준수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Epistola Apostolorum 15. Hippolytus의 두 저작 속 두 파편(둘 중 하나는 Holy Easter 에 포함되어 있음)은 Chronicon Paschale 6에 보존되어 있다(PG 92, 79).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러므로 그 논쟁의 특징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라 ∙∙∙. Athanasius of Alexandria는 14일주의 유월절을 준수한 인물들로 시리아인과 실리시아인, 메소포타 미아인”들을 언급한다(de synodis 1, 5; ad Afros Epistola Simodica 2). Jerome은 Irenaeus의 On the Paschal Controversy의 진술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즉 그 편지는 교황에게 “유대인들과 함께 월삭의 14일째 날에 유월절을 기념하는 아시아와 동방의 많은 주교들”과의 조화를 깨뜨리지 말라고 경고한다(De viris Illustribus 35, NPNF, 2nd, III, 370). Hierapolis의 주교, Apollinarius의 부활절에 대한 한 파편에서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니산월 14일은 위대한 희생, 우리 주의 참된 유월절이다; 양을 대신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양을 얻었다.” Apollinarius, In the Chronicon Paschale 6, PG 192, 80-81. Gabala의 주교였던 Severian(활약기, 약 A.D. 400)은 유대인들의 의식을 계속해서 지키는 그리스도인들 무리를 강력하게 공격한다(Homilia 5 de Pascha, ed. J. B. Aucher [Venice: 1827], 180), Salamis의 주교 Epiphanius(약 A.D. 315-403)은 자신의 저작 Adversus haereses 50과 70에서 14일주의 유월절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주교는 다양한 예를 들어 자신이 “이단”으로 부르는 14일주의 관습들이 널리 퍼져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세상에-ανέκυψε πάλιν τω κόσμο 또 다른 이단, 즉 14일주의자들이 다시 들고 일어났다.” Epiphanius, Adversus haereses 50, 1, PG 41, 883. 앞선 증언들을 토대로 우리는 Jean Juster의 견해, 즉 Eusebius가 14일주의 유월절 준수를 아시아 지역에만 한정시키고 축소시킨 “고의적 모호함”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견해에 동의하게 된다.

 90) Eusebius, HE 5, 24, 14.

 91) Epiphanius, Adversus haereses 70, 9 PG 42, 355-356. 이 구절은 다음의 글에서 검토되고 있다. Samuele Bacchiocchi, Anti-Judaism and the Origin of Sunday, 1975, 45-52.

 92) M. Richard, “La question paschale au Ile siéle,” L’Orient Syrien 6 (1961):185-188. Richard는 부활절-일요일이 예루살렘의 헬라인 주교로부터 처음 소개되었다고 주장하는 데, 이 견해를 수용하기 어려운 이유로 다음의 두 가지 근거를 들 수 있다. 우선 그들은 기독교의 그만한 영향력을 미칠 만큼의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또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야 할 필요성이 팔레스타인이 아닌 일찍이 로마에서 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부활절 논쟁이 부활절-일요일을 도입과 더불어 Hadrian 시기에 시작되었다는 그의 결론은 신빙성이 있다. 이는 우리의 정보 제공자라고 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 태생의 Epiphanius가 자신의 니라의 전통에 관심이 있었으며, 사라진 문서들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는 유월절 문제에 관해 Alexander of Alexandria와 Crescentius 사이의 갈등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내용이다(Adversus haereses 70, 9, PG 42, 356B), Richard의 논의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Christine Mohrmann, “Le conflict pascal au Ile siéle,” Vigiliae Christianae 16(1962):154-171. P. Nautin, Lettres et écrivains chrétiens des Ile et Ille siécles, 1961, 65-104.

 93) “로마-부활절”이라는 표현은 부활절-일요일을 지칭하는 것으로 C. S. Mosna가 종종 사용하기도 했다(Storia della domenica, 117, 119, 333. 참고, M. Righetti, 245-246). 이것은 로마에서 부활절-일요일만 지켜졌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Irenaeus의 진술은 그 반대의 경우를 제시하고 있다. “그 날[즉, 14일주의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당신 이전의 성직자들은 그 날을 지키는 다른 교구민들 가운데 그 날을 준수하지 않는 이들에게 성체를 보냈다”(Eusebius, HE 5, 24, 15). 성체는(“fermentum”이라고 불리는 성별된 빵의 작은 조각) 사실상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교들과 도시 안팎의 본 교회들(main churches)-교구교회들(tituli)에게 친교(communio)의 상징으로써 로마의 주교가 보낸 것이었다(이와 관련한 논의는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333을 보라. V. Monachino, La Cura pastorale a Milano, Cartagine e Roma nel secolo IV, 1947, 281. L. Hertling, Communio, 1961, 13. 참고. Hippolytus, Traditio Apostolica 22). 성체가 로마와 외진 지역에 살고 있는 14일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졌다는 것은 그들이 로마 내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 뿐 아니라, Victor의 후계자들이 그들과 기독교적 우애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C. J. Hefele는 헤롯왕의 침소를 맡은 한 신하(Blastus)에 대한 반발로써 14일주의 유월절에 대한 Victor의 혐오에 대해 설명하는데, 여기서 Blastus는 Tertullian(De prescriptione 53)에 따르면 “몰래 유대교를 퍼뜨리려고 했다”고 한다(A History of the Christian Councils, 1883, I, 312-313). 라오디게아 공의회의 Canon 14는 다른 교구들에 성체를 보내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는 그 관습이 4세기까지도 지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94) Eusebius는 일요일에 부활절을 기념한 교회들이 “사도적 전통”에 의지하고 있었다고 기술한다(HE 5, 23, 1). 그러나 Irenaeus는 로마 부활절을 옹호하면서도 사도들에 대해 언급하는 대신 14일주의 유월절을 처음으로 지키지 않은 인물로 주교 Sixtus(약 A.D. 116-125)를 특별히 언급하며 “오래 전(earlier times)-και πολύ”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오래 전”이라는 표현은 Sixtus의 시기가 될 것이다. W. Rordorf는 로마 부활절의 사도적 기원에 대해 변호한다. W. Rordorf, “Zum Ursprung des Osterfestes am Sonntag,” Theologische Zeitschrift 18(1962):167-189. B. J. Van Der VeKenė 반대로 14일주의 유월절은 유효한 사도성을 지니고 있으며, 로마 부활절에서는 그러한 속성을 찾기 어렵다는 견해를 밝힌다. B. J. Van Der VeKen, “De Primordis liturgiae paschalis,” Sacris Erud.(1962):500이하. Kenneth A. Strand는 “로마와 베드로와 바울이 일했던 다른 지연에서는 실제 다른 사도들로부터 일요일 부활절 전통을 받아들였고, 반면 아시아는 요한으로부터 14일주의자들의 준수 형태를 받아들였을 것”(36쪽)이라는 논의를 옹호하며 설득력 있는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그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다.(1) 364일의 고정된 “사제의”(priestly) 태양력은 omer의 날이나 첫 수환을 항상 일요일에 기념했던 쿰란 공동체와 같은 다양한 종파들이 사용했는데, 초기 기독교의 한 분파가 이를 온전히 채택했다.(2) 로마의 획기적인 방법은 그다지 성공적으로나 보편적으로 사도의 전통을 대신하지 못했는데, 특히나 기독교 전통의 흐름이 여전히 동에서 서로 이동되고 있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너무 이른 시도였다.(3) 아시아에서 자란 Irenaeus 는 사도의 전통의 변호인이자 요한의 제자였는데, 부활절-일요일에 사도적 귄위가 없었다면, 그는 14일주의 전통에 맞서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4) Eusebius가 제시한 두가지 전통의 지역적 분포를 보면(추측하건데 14일주의 유월절을 지켰던 아시아 그리스도인들만), 이는 전통적으로 베드로와 바울에서 비롯된 영향력의 지리적 영역과 일치한다(Three Essays on Early Church with Emphasis on the Roman Province of Asia, 1967, 33-45). 이러한 논의가 설득력 있게 구성된 것은 맞지만, 다음의 사실들이 간과되고 있다.(1) 다양한 자료들은 14일주의 유월절이 Eusebius가 인정한 것보다 더욱 널리 퍼져있었다고 충분히 인정할 만한 근거들을 것을 제시해 준다. 사실 교황 Victor에 이전에 로마에서도 이를 지키는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Irenaeus가 후대는 제외하고 “Soter 이전의 성직자들”을 14일주의 유월절을 허락한 주교들의 예로써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Soter 때의 로마 정책에 부활절 문제와 관련한 변화가 생겨났음을 시사해 준다(Eusebius, HE 5, 24, 14), 유명한 그리스 학자 L. Duchesne는 이 부분에 대해 “Anicetus의 후계자, Soter 당시 그 관계는 더욱 팽팽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Histoire ancienne de l’Église, 1889, I, 289). 그러나 갈리아에서는 두 개의 다른 부활절 기념일이 공존했으면, Irenaeus때에도 별다른 문제가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실 Irenaeus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서로가 다르고 금식에 대한 다른 견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화롭게 지내는 것은 우리가 믿음 속에서 일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HE 5, 24, 13).(2)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Epiphanius에 따르면 부활절 논쟁은 “할례에 대한 주교들의 이동의 시기 이후에 발생했다”(PG 42, 355, 356). 이러한 진술은 이 시기 이전에 부활절-일요일이 팔레스타인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다른 지역의 일부 몇 그리스도인들만 그 날을 지켰을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로 그랬다면, Sixtus(약 A.D. 115-125)가 14일주의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첫 인물이라는 Irenaeus의 설명은 지나가는 한 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역사적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HE 5, 24, 14).(3) 바울과 같은 인물이 날(days)에 강조를 두는 한 종파의 달력에 영향을 받았고, 그가 자신이 일한 지역에 그것을 소개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이유는 P. K. Jewett이 언급한 것과 같이 “그는 오직 신약만을 쓴 저자로써 날(days)을 지키는데 대해 개종자들에게 경고를 한 인물이다(골 2:17; 갈 4:10; 롬 14:6)”(Lord’s Day, 56). 더욱이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규범적 바리새인의 랍비식 달력을 존중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오순절을 위해 서둘러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다는 사실에서도 암시된다(행 20:16; 참고, 고전 16:8). 바울은 유대인 신자들에게 자신 또한 “율법을 지켜 행”(행 21:25; 148-51쪽 참고)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결례를 행하는데, 이와 더불어 사실상 그의 자유로운 공공 사역은 오순절 시기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끝이 난다(약 A.D. 58-60).(4) Irenaeus와 관련해, 그가 아시아에서 자랐으며 사도적 승계의 변호인이기는 했으나, 다음의 사실들을 고려해야 한다.(a) 그는 언제나 평화와 타협을 지지했다. 이는 그가 주교 Victor에게 보낸 편지, 몬타누스주의자들을 대신해 Victor의 후계자인 주교 Eleutherus에게 대사관으로 간 사실(Eusebius, HE 5, 4, 1; 5, 3, 4).(b) 그가 로마에서 공부했고 서방의 교회를 섬겼다는 것(Bishop of Lyons from 약 A.D. 177).(c) “두명의 영예로운 사도, 베드로와 바울에 의해” 세워지고, 또한 “모든 교회들이 그 최상의 권위에 대해 동의하는”(Adversus haereses 3, 2, ANF I, 415) 로마의 교회를 대단히 존경하고 지지했다는 사실.(5) 2세기 말 즈음 로마의 주교가 행사한 권한이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Polycreates가 유월절 준수에 대해 Victor와 의견을 달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회를 소집하라는 주교의 명령을 따랐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나는 당신의 소환요구를 듣고 그렇게 하여 참석하고 있는 주교들을 언급할 수 있다”(Eusebius, HE 5, 24, 8). 이와 유사하게 Irenaeus는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을 파문하려는 Victor의 권위에 도전하지는 않으면서도, 다만 조심스러운 태도로 조언을 했다.(6) 유대교와 제국 하이의 갈등과 긴장은 특히 Hadrian 당시에 더욱 날카로워 졌는데, 이는 주교 Sixtus로 하여금 외관상 드러나는 유대교적 관례들을 막기 위해 유월절이나 안식일 같은 유대인들의 구별된 축제들을 새로운 날짜와 신학적 근거를 들어 대체하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유월절과 주간 안식일 금식에 대한 반유대적 자극들은 이러한 가설에 대한 추가적 근거들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근거들을 고려할 때, 로마-부활절 전통의 사도적 기원에 대한 가설의 신빙성이 유지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95) 니케아공의회 심의기관의 법령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동방에서 유대인들과 같이 부활절을 공식적으로 기념하는 모든 신도들은 앞으로 로마인들과 같이 우리와 또 고대로부터 우리와 같은 날에 그 축제를 기념해온 모든 사람들과 같이 같은 날에 그 날을 지켜야 할 것이다.” Ortiz De Urbina, Nicée et Constantinople, 1963, I, 259. 참고. Socrates, Historia Ecclesiastica 1, 9.

 96) Constantine은 그러한 유명한 축제와 관련한 당시의 의견 충돌에 대해 개탄해하며 모든 주교들에게 “이탈리아 전역과 이집트, 아프리카와 로마 도시 내에서 동시에 지켜졌던 관례를 포용하라고 촉구했다.” Eusebius, Life of Constantine 3, 19, NPNF 2nd, I, 525. 참고, Chronicon Paschale, PG 92, 83에는 Constantine가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고대 교회의 관습들을 따를 것을 권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97) Fragments from the Lost Writings of Irenaeus 7, ANF I, 569-570.

 98) Tertullian, De Corona 3, 4, CCL 2, 1043. Tertulian은 On Idolatry라는 논문에서 이교도들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주의 날도 아니고 오순절도 아니며, 만일 그들이 그것들을 알았을 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공유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인들로 보일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ANF III, 70).

 99) F. A. Regan, Dies Dominica, 97.

 100) Origen, Homilia in Isaiam 5, 2, GCS 8, 265, 1.

 101) Eusebius, De solenitate paschali 7, 12, PG 24, 701A. 참고, 706C.

 102) Innocent I, Ad Decentium, Epist. 25, 4, 7, PL 20, 555. Athanasius, Epistolae paschales, PG 26, 1389.

 103) J. Jeremias, “πάσκα,” TDNT V, 903.

 104) J. B. Lightfoot, The Apostolic Fathers, 1885, II, part I, 88. 전문은 다음과 같다. “2세기 부활절 논쟁에서 예루살렘의 주교 Caesarea와 Tyre, Ptolemais는 자신들을 유대인 유월절에 의해 부활절이 통제된 소아시아 대신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포함시킴으로 유대교와 관련해 비슷한 어떠한 것도 피하려 했다.”

 105) M. Righetti, II, 246.

 106) Eusebius, Life of Constantine 3, 18-19, NPNF 2nd, I, 524-525. 편지는 Socrates의 Historia Ecclesiastica 1, 9에서 포함되어 있다. Theodoret, Historia Ecclesiastica 1, 10. 새로운 부활절 날의 채택에 있어 반유대적 동기는 Cyrian이라는 가명 저자의 De Pascha computus에 명확히 기술되어 있다. “우리는 ∙∙∙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유월절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자들처럼 유대인들 뒤를 맹목적으로 어리석게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 증명해 보이길 원한다”(De Pascha computus, trans. G. Ogg, 1955).

 107) 적절한 하나의 예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지닌 원로의 권한의 성장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A.D. 381년 그 도시 내에서 열렸던 공의회에서, 그는 로마의 주교 다음으로 명예로 운 예우를 받았다.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51년에는 공식적으로 원로의 권한들을 부여받았다(canon 28). 참고, S. Vailhé, Dictionaire de théologie catholigue (1908), “Constantinople”이라는 단어를 보라.

 108) Clement는 예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누구든 우리를 통해 그[즉,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바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죄와 위험도 없는 일에 스스로를 관련시키게 된다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라”(Clement, 59:1-2, trans. E. Goodspeed, The Apostolic Fathers, 1950, 78). Irenaeus는 다음과 같이 쓰면서 Clement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지금의 Clement 시기에 로마 교회는 가장 강력한 서한을 고린도인들에게 보냈다”(Adversus haereses 3, 3, 3, ANF 1, 416).

 109) J. Lebreton and J. Zeiller, 413.

 110) Karl Baus, From the Apostolic Community to Constantine, 1965, 154.

 111) Irenaeus, Adversus haereses 3, 3, 1, ANF 1, 415.

 112) Ibid.

 113) 몬타누스파의 이설과 관련한 Irenaeus의 과제는 Eusebius, HE, 5, 3, 4와 5, 4, 1을 참고하라. 또한 부활절 논쟁에 대한 그의 개입은 동일한 문헌의 5, 24, 12-18을 보라.

 114) P. Batiffol는 주교 Victor가 Polycrates에게 선고한 파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로마의 주교는 그들이 사도들의 믿음의 정전(Canon)에 반하는 용법으로 부활절을 준수하는 것을 비난했다. 그는 또한 그들을 로마가 아닌 가톨릭 단체로부터 단절시켰다. 그는 그때 그러한 선고가 그의 입장에서는 합당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Irenaeus는 아시아 감독들에 대한 파문에 항의를 했지만, 그러한 선고를 내릴 수 있는 Victor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P. Batiffol, 227.

 115) Eusebius, HE 5, 24, 8.

 116) Eusebius, HE, 5, 24, 9, NPNF 2nd, I, 242. 일부는 Eusebius의 언급이 아시아의 교회들을 Victor가 파문시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 그들과의 관계를 중단했다는 의미 외엔 그의 말을 어떤 식으로든 이해하기는 어렵다.

 117) P. Batoffol, 225.

 118) Tertullian, On Prescription Against Heretics 26, ANF III, 260.

 119) 로마교회의 두드러진 위상에 대한 의식을 묘사하는 이러한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간결한 논의는 Karl Baus을 보라. Karl Baus, 355-360. 폭넓은 참고문헌을 제공하고 있는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라. Giuseppe D’Ercole, Communio-Collegialitá-Primato e sollicitudo omnium ecclesiarum dai Vangeli a Costantino, 1965, 157-205. Jean Colson, L’Épiscopat catholique, 1963.

 120) O. Cullmann, Early Christian Worship, 1966, 10.

 121) P. V. Monachino, 407. Leonard Goppelt는 로마교회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로마교회는 이미 교회 역사에서 일찍이 확실한 우월성을 얻었다. 이는 세상의 중심의 교회(롬 1:8, 16:16), 전체 교회의 만남의 장소(참고, 로마서 16장의 문안, 골 4; 벧전 5:13), 베드로와 바울의 집(Ignatius, Romans 4, 3; 1 Clem. V. 4이하), 순교자로서 고통을 겪게 되는 첫 번째 대교회(계 17:6)로써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로마 교회가 어느 정도 기독교 예루살렘의 계승자가 되었다는 누가의 지적과 I Clement가 입증하고 있는 것처럼, 이 모든 것으로 인해 로마 교회는 다른 교회들에 대한 책임을 맞게 되었다.” Leonard Goppelt, Apostolic and Post-Apostolic Times, 1970, 126.

 122)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354.

 123) Bruce Metzger는 유대인들과 분리되기 위해 서방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합리적인 역사적 설명” “안식일 준수에 있어서 서방과 동방의 차이점 ∙∙∙ 서방에서는 Hadrian 치세 당시 유대인들의 반란 이후 특히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그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다. 이는 안식일 준수가 유대교를 나타내는 가장 핵심 특징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유대교의 제도에 대한 반대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Bruce Metzger, Studies in the Lectionary Text of the Greek New Testament, 1944, II, sec. 3, 12.

 124) W. D. Davies, Christian Origins and Judaism, 연도 불명, 74.

 (26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