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6장 로마교회와 일요일 준수의 기원
 일반적으로 그러한 자료들은 대부분 안식일의 금식을 금요일 금식의 “연장”(superpositio)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테르툴리아누스의 표현을 빌자면, 그 모든 금식일들은 “신랑이 제거되었을 때,” 즉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 아래 있었을 때의 시간을 기념하는 금식일로 제정되었다.74) 하지만 부활절 금요일과 안식일 금식일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표현하기 위해서만 계획된 것이 아니라, 그 가해자들, 즉 유대인들을 경멸하기 위해서도 계획된 것이었다. 관계있는 두 문서들, 즉 사도들의 교훈집(Didascalia Apostolorum, 3세기 전반)과 사도헌장(Apostolic Constitutions, A.D. 375)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비슷한 이유로 부활절 금요일과 토요일에 금식하도록 명령되어졌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형제들(즉, 유대인들)의 불순종 때문에 ∙∙∙ 게다가 그 백성들이 스스로 우리의 구세주를 십자가에 죽였기 때문에75) ∙∙∙ 이러한 날들에 그분께서는 유대인들에 의해 우리로부터 분리되셨고, 배신으로 고발되어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76) (246.4)
 연례 부활절 안식일 금식과 매주 안식일의 금식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련성에 비추어 볼 때, 매주 안식일 금식일이 연례 부활절 안식일 금식일의 연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유대 백성들과 특별히 그들의 안식일에 대한 경멸을 나타내기 위해서 로마교회에서 시작되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적절하다.77) 실베스터 주교는 로마교회의 안식일 금식을 옹호하기 위해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종종 인용되는 하나의 역사적인 진술에서 이런 결론을 분명하게 지지한다. (247.1)
만일에 매주 일요일이 예수의 부활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으로 준수되어지는 날이라면, 매주 토요일은 예수의 장사지냄으로 인해 유대인들을 혐오(exsecratione Judaeorum)스럽게 여기는 날이다. 사실상 주님의 모든 제자들은 무덤에 계신 주님에 대해 통곡하면서 안식일에 애도의 시간을 보냈고, 의기양양한 유대인들은 기쁨에 도취되었다. 그러나 금식하는 제자들에게는 슬픔이 엄습했다. 만일에 우리가 주님의 부활의 날에 제자들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기를 원하면, 같은 방식으로 주님의 장례로 인해 슬퍼했던 자들과 더불어 슬퍼해야 한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에 음식을 먹고(destructiones ciborum) 유대인들의 종교 의식을 준수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78)
(247.2)
 이 진술에서 실베스터 감독은 안식일 준수와 일요일 준수 사이에 존재하는 신학적인 의미와 방법상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장례에 대한 애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과 그들의 안식일 축제에 대한 경멸을 표시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애도하고 음식을 먹는 것을 삼가도록 명령되어졌다.79) 안식일 금식은 분명하게 일요일에 더 큰 영예와 더 많은 인지도를 제공하기 위한 의도로 제정되었다. 실베스터 감독은 “주님의 날에 ∙∙∙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 우리는 [안식일에] 슬퍼한다.”고 기록했다. (248.1)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지역인 페타우(Pettau)의 감독, 빅토리누스(Victorinus, A.D. 304년경)도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안식일 금식에 대한 동일한 기능을 강조한다. “제칠일에 ∙∙∙ 우리는 엄격하게 금식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고, 주의 날에는 감사기도를 드리며 우리의 식탁으로 나아가게 된다.”80)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경험되는 비애와 배고픔은 안식일에 보다 더 심하게 경험되었는데, 그들은 금식을 이미 금요일 저녁에 시작했기 때문이었다.81) 따라서 그 비애와 배고픔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보다 더 간절하고 기쁜 마음으로 일요일 준수에 참여하도록 하는 사전 작업을 위해서 계획된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빅토리누스가 진술한 것처럼, “유대인들과 함께 안식일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정신을 싫어하는 선지자들에 의해 안식일의 주인으로 나타나고 있다.”82) (248.2)
 엄격한 안식일 금식은 자연적으로 성만찬 예식도 배제하게 만들었다.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은 금식일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이 그들의 금식을 보다 엄숙하게 만든다는 믿음으로 그러한 견해에 반대하고 있기는 하지만,83) 로마에서 토요일이 금식하는 날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만찬의 거행과 종교적인 집회가 허락되지 않았던 날이었음은 확실하다. 로마교회의 감독 이노센티우스 1세(A.D. 402-417)는 후에 종규(宗規)에 편입된 데센티우스(Decentius)에게 보내는 그의 유명한 편지에서 규정하기를, “교회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두 날[금요일과 토요일]에는 누구든지 성례전에 절대로(penitus)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84) 동시대의 역사가인 소조메누스(Sozomen, A.D. 440년경)와 소크라테스(Socrates, A.D. 439년경)도 이노센티우스 1세의 교령을 확증해준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의 기록에 따르면, “세계의 거의 모든 교회들이 매주 안식일에 신성한 성체 의식을 거행함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교회에서는 여전히 어떤 고대 전통으로 인해서 이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85) (249.1)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안식일에 성만찬예식이 거행되지 않았던 이유를 소크라테스는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그 관습이 “한 고대의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진술한다. 이것으로 우리가 가정할 수 있는 것은 미사 의식을 금지하고 금식을 명령한 것이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 관습들이 2세기 초에 유대의 관례들과 차별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시작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시대에 보편화된 그 관습들을 묘사하면서 소조메누스도 소크라테스와 매우 유사한 진술을 남기는데, 다만 그는 성만찬 예식과 관련된 언급은 제외한 채 종교적 집회에 대한 것만 말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과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 사는 백성들이 주일의 첫 날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도 함께 모이는” 반면, 그러한 “관습은 로마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86) (249.2)
 이런 누적된 증거들에 비추어 볼 때, 로마교회는 안식일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이고 예전적 중요성을 제거하고, 안식일 준수의 폐지를 주장하는데 있어서 초기 기독교사회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음이 분명하다.87) 안식일에 주의 만찬을 거행하는 것과 종교적 집회를 개최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는 명령과 더불어 안식일에 금식하라는 명령은 로마교회가 취한 명확한 조처가 분명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 숭배를 버리게 하기 위한 조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요일 예배만을 존중하도록 하기 위한 조처였다. 저들이 안식일 준수와 같은 유대인들의 제도들에 대한 그러한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한 이유는 2세기 초에 유대교와의 급진적인 차별화가 특별히 요구되었던 상황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앞서 주목해 보았듯이, 유대인들에 대한 로마 당국의 재정적, 군사적, 정치적, 문학적인 공격과 조처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과의 연대를 단절하도록 해 주었다. 이런 상황은 특별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개종자들이 이교의 혈통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동방지역보다 더 일찍 유대인들과의 차별화 정책을 취했던 로마 교회 내에서 실제로 나타났다. 안식일과 유월절과 같은 유대의 축일들을 준수하는 것과 관련된 날짜와 방법을 바꾸는 것은 그들이 유대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로마 당국자들에게 분명하게 인식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었다. 부활절 일요일의 도입은 이러한 논제를 지지해주는 부가적인 암시를 제공해 준다. 이제 이 부분을 고찰해 볼 것이다. (250.1)
 로마교회와 부활절 논쟁
 부활절 일요일의 기원
 역사가 유세비우스(A.D. 260-340년경)는 2 세기에 불끈 달아올랐던 부활절 논쟁과 관련된 한 귀중한 서류 문서를 제공해준다.88) 당연히 그 논쟁의 주역은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부활절 일요일 관습(즉 보통 유대인들의 유월절 날짜를 따라 일요일에 절기를 경축했음)을 옹호하고 그의 교훈을 따르기를 거절했던 아시아 지역의 고집센 기독교 공동체를 파문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던 로마의 감독 빅토르(Victor of Rome, A.D. 189-199)였고,89) 다른 한 사람은 아시아 지역의 대표이자 에베소교회의 감독으로 보통 “14일교도 유월절”(Quartodeciman Passover)로 불리워진 니산월 14일을 전통적인 유월절의 날짜로 강력히 지지했던 폴리크라테스(Polycrates)였다. 폴리크 라테스는 그가 사도 빌립과 요한으로부터 물려받은 진정한 사도적 전통을 소유했다고 주장하면서, 로마의 감독 빅토르의 위협에 굴복하기를 거절했다. (251.1)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리용의 감독 이레네우스(A.D. 176년경부터)가 조정자로서 그 논쟁을 중재했다. 빅토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레네우스는 관대한 정신을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테르(Soter)의 전임 자들인 “아니케투스(Anicetus), 피우스(Pius), 히기너스(hyginus), 텔레스포루스(Telesphorus), 식스투스(Sixtus)” 등은 “그것[즉 14일 교도들의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 그것이 지켜졌던 교구의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냈다”는 사실을 로마의 감독에게 이해시켜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90) 소테르의 전임자들이 14일교도의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레네우스의 진술이 시사해 주는 것은 그들 역시 빅토르처럼 일요일에 부활절을 기념하였다는 것이다. 이레네우스는 식스투스(A.D. 116-126년경)를 14일교도의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첫 번째 사람으로 언급하는데, 이것으로써 그 논쟁의 근원을 그 감독의 시기로까지 추적하여 바로 그 식스투스의 시기(A.D. 116-126년경)에 로마에서 일요일에 유월절이 기념되어지기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짧은 이레네우스의 진술을 가지고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결론에 대한 가능성을 지원할만한 보완적인 징후들이 있다. 예를 들어, 식스투스 감독이 로마교회를 관리했던 시기는 바로 유대인들의 의식과 관습들에 대해 급진적인 억제 정책을 채택하였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재위 시기였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억압적인 조처들로 인해 유대인들의 것으로 여겨지던 관례들을 새로운 것들로 대체하고자 하였다. 우리가 이미 주목해 보았듯이, 그 시기에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지도자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그 도시로부터 추방당했고, 그곳은 새로운 이방인 그룹들로 대신 채워졌다. 키프러스의 감독이었던 에피파니우스에 따르면, 부활절 논쟁이 발생한 것도 바로 그 역사적 시점이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논쟁은 할례 받은 감독들이 추방되고 난 이후에 일어났고 우리의 시대까지 계속되었다.”91) (251.2)
 에피파니우스가 시사해주는 것처럼 만일에 그 논쟁이 A.D. 135년 이 후에 상당히 많은 14일 교도들이 거절했던 새로운 부활절 일요일 의식이 도입됨으로써 야기되었다면, 그 새로운 관습의 창시자는 식스투스였을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 역사적 사건이 있기 바로 몇년 전에 교마교회의 감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관습이 논쟁을 일으킬 만큼 충분이 보급되어지기까지는 몇년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레네우스와 에피파니우스의 언급은 서로를 보완해 주는 것이다. 이레네우스는 부활절 일요일이 로마에서 식스투스의 지도하에 시작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에피파니우스는 그 새로운 관습이 새로운 헬라인 감독들에 의해 예루살렘에 소개되어 논쟁이 야기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두 사건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발생하였다. (252.1)
 마르셀 리차드(Marcel Richard)는 이 시기에 도입된 새 날(부활절 일요일)이 로마교회에 의해서 도입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정착한 헬라인 감독들에 의해서 도입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대인 종교축 일들에 대한 하드리아누스의 금지령 덕분에 그들은 새로운 부활절 일요일 날짜를 개척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로마 당국 자들에게 “유대화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을 피하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92) 부활절 일요일이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처음 도입되었다는 리차드의 결론은 수용할 수 있지만, 그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고 거대한 기독 교사회가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영향을 미친 것이 예루살렘교회의 새로운 지도자들이었다는 주장은 거의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예루살렘교회는 무명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전락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보편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견해는 로마교회가 부활절 일요일의 사실상의 발생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로마의 부활절”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93) 이것은 그 새로운 관습을 강력히 주장하던 로마교회의 역할과 이레네우스의 진술94)에 의해서 제안될 뿐만 아니라 후대의 역사적 자료들에 의해서도 제안된다.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두 문서인 니케아 종교회의의 공한(A.D. 325)과95) 모든 감독들에게 보내진 콘스탄티누스의 개인적인 서한에서96) 로마교회가 부활절 일요일의 문제로 논쟁을 벌인 주요 사례로 소개된다. 그것은 그 교회가 가진 역사적인 위치 때문만이 아니라 의심할 것 없이 부활절 일요일 준수를 옹호하는데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53.1)
 부활절 일요일과 매주의 일요일
 연례 부활절 일요일과 매주의 일요일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두 축일들은 서로 다른 시간에 동일한 부활 사건을 기념하는 동일한 축일로 간주 되었는가? 혹은 다른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던 두 개의 다른 축일로 고려되어졌는가? 만일에 그 두 축일이 하나의 동일한 축일로 다루어졌다면, 부활절 일요일의 발생지는 역시 매주의 일요일 준수가 기원된 장소가 될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요소들이 그 두 축일을 동시에 기원하게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54.1)
 많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증언들 속에서 매주의 일요일과 연례 부활절 일요일은 기본적으로 부활이라는 동일한 사건을 기념하는 동일한 축제로 다루어진다. 이레네우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 문서에서는 특별히 일요일과 부활절 기간의 일곱이레인 오순절에는 꿇어앉지 말도록 명령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주의 날과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는 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97) 여기에서 말하는 그 이유는 두 축일이 “부활 사건에 대한 하나의 표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더욱이 금식에 대한 금지를 추가하므로 그 관습을 확증한다. “일요일에 금식하는 것과 예배를 드리는 동안 무릎을 꿇는 것은 불법이다. 우리는 부활절에서부터 오순절까지 동일한 자유를 누린다.”98) 레간(F. A. Regan)은 그 본문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부활절에서부터 오 순절에 이르는 기간에, 그 동일한 관습이 지켜졌는데, 이렇게 하여 그 연례 절기와 매주의 축일 사이의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다.”99) (254.2)
 오리게네스(Origen)는 매주의 축일을 부활을 기념하는 연례 절기와 명확하게 연합시킨다. “주의 부활은 오직 일 년에 한번만 기념되어진 것이 아니라 매 8일마다 계속해서 기념되어진다.”100) 유세비우스도 동일하게 진술한다. “모세의 법에 충실한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유월절 양을 희생으로 바쳤지만 ∙∙∙ 우리 새 언약의 사람들은 매주 일요일에 우리의 유월절을 지킨다.”101) 로마의 감독 이노센티우스 1세는 굽비오(Bubbio)의 감독 데센티우스(Decentius)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두 축일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성을 확증한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한 부활로 인해 부활절 일요일뿐만 아니라 주일 순환 주기에서의 하루, 즉 매주 일요일을 지킨다.”102) (255.1)
 이러한 전형적인 진술들로 미루어보면, 매주 일요일과 연례 부활절 일요일이 받아들여졌을 때 그것들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다른 시간에 동일한 부활 사건을 기념하는 한 축제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초기의 자료들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요일 준수의 주요 동기로서 제시되지는 않지만, 그 두 축일의 기본적인 통일성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255.2)
 이 지점에서, 로마교회로 하여금 14일 교도들의 유월절을 폐지하고 부활절 일요일을 도입하도록 하게 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조사하는 것은 중요하다. 안식일 준수의 거절과 일요일 준수의 도입도 또한 같은 원인에 의해서 야기되었다고 가정해볼 수 있는데, 후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연례 부활절의 확장으로서 여겨졌기 때문이다.(오늘날 이태리 사람들은 여전히 일요일을 작은 유월절을 의미하는 “파스쿠에타” pasquetta라고 부르고 있다.) (2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