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6장 로마교회와 일요일 준수의 기원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부정과 우상숭배(특별히 바알 숭배와 금송 아지로 강조됨), 그리고 살인(의인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마침내는 그리스도에 대한)의 연속으로 간주되었다.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의 불행과 특별히 예루살렘의 멸망, 제명과 흩어짐, 로마에 의한 학대 등은 의로운 하나님의 징벌로 여겨졌다. (238.1)
 이렇듯 유대교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게 된 동기는 우리가 앞에서 간결하게 묘사했던 것처럼, 교회의 안팎에서 나타난 요소들에 의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특별히 유대의 종교 관례들에 대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 유대교가 당연히 “오토프락시스”(orthopraxis, 신조가 아닌 행위)로 규정되었고, 할례와 안식일과 같 은 종교적 관례들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칙령에 의해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헬라와 라틴 문학가들로부터 계속적으로 공격을 받고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이나 유월절과 같은 독특한 유대의 종교 관례들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유대교와의 연관성을 단절하려했던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볼 것이지만, 앞에서 주목해 보았듯이 일찌감치 유대 교와 단절했고 특별히 반 유대 감정과 조처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로마 교회는 이러한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것은 안식일과 유월절 문제에 대한 로마교회의 태도에 연구에 의해서 가장 잘 예시되 어질 것이다. (238.2)
 로마교회와 안식일
 일요일을 유일한 새 예배일로 도입하고, 그 날의 중요성을 고양시킨 것은 안식일을 포기하고 그 날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일요일 예배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시행했던 교회가 안식일 준수를 억제시키기 위해서 몇 가지 조처들을 취했을 것이라고 생각 해볼 수 있다. 우리는 동방에서는 두 날이 다 준수되었다는 증거들을 가지고 있고, 이런 증거들이 틀림없이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임을 안다. 특별히 그것은 옛 안식일을 계속 시행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일요일 예배를 도입하기를 바랐던 부류의 사람들 측에서 만들어낸 타협적인 해결 책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지 안식일 준수를 유지시키려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그들을 일요일 준수의 선구자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옛것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새로운 날만을 옹호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239.1)
 로마교회에서의 상황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곳에서는 일요일 예배가 강력하게 추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존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처들이 취해졌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일련의 행위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 동기들을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를 고찰해 볼 것이다. (239.2)
 먼저 2세기 중엽까지 로마에서 가르치고 저술 작업을 했던 유스티노스(Justin Martyr, A.D. 100-165년경)에 대한 연구로부터 시작해보자. 그보다 앞선 시기에 소아시아의 이그나티우스(A.D110년경)와 알렉산 드리아의 바르나바스(A.D. 135년경)가 안식일 준수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도 했지만, 가장 통렬하고도 조직적으로 안식일을 비판하고 제일 먼저 그리스도인들의 일요일 예배를 명확하게 설명한 사람은 유스티노스이다. 그의 안식일과 일요일에 대한 견해는 다음 장에서 면밀하게 살펴볼 것이기에, 여기서는 다만 그의 입장만을 진술하게 될 것이다.54) (239.3)
 유스티노스는 안식일을 모세로부터 유래된 일시적인 의례로 여긴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 날을 문자적으로 지키도록 고안하신 것이 아닌데, 그 이유는 그분께서 스스로 “그 날에 우주의 운행을 통제하시는 것을 멈추지 않”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불의로 인해 자초한 형벌을 받을 자들로 그들을 구별해 내기 위한 표”로서 하나님께서 오로지 유대인들에게만 강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55)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 께서 율법의 의식들을 주신 목적이 단지 유대인들을 형벌 받을 자들로 뽑아내기 위한 부정적 것으로 보고자 하는 것인데, 만일에 이러한 논제 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하나님을 차별적인 행위를 하신 과실을 범하신 분으로 만들고 만다. (240.1)
 특별히 로마는 모든 사상들이 교차하는 곳이기 때문에 유스티노스의 견해가 안식일에 대한 로마교회 전체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주목받을 만한 가치는 있다. 그러나 로마에서 안식일에 대해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이 유스티노스 뿐만은 아니라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비슷한 견해들이 유명한 이단자로 알려진 마르시온(Marcion)에 의해서도 표현되고 있다. 그는 그 시기(A.D. 144)에 로마에 그의 본부를 세웠다. 반유대적이고 반 안식일적인 마르시온의 가르침은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56) 그 로부터 반세기 이상 지난 시기에 테르툴리아누스는 북아프리카에서 마르시온의 가르침이 주는 영향력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옹호해야할 필요성을 여전히 느끼고, 그의 장문의 논문인 “마르시온에 대항하여”(Against Mrcion)를 출판했다. 그 후 그는 그것을 세번 연속해서 개정하였다.57) 유스티노스의 주장에 따르면, 특별히 로마에서는 “오직 그(마르시온)만이 진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그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58) 에피파니우스에 따르면, 마르시온(Epiphanius Marcion)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안식일과 관련해 이렇게 명령했다. “이렇게 하여 그것을 정당화하면서 토요일에 금식하라. 그 날은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휴식일이기 때문에 ∙∙∙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운명지워 주신 것이 그 날에 우리에게 성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날에 금식한다.”59) (240.2)
 안식일에 금식을 하는 것이 어떻게 유대인들의 “악한” 신에 대한 증오를 나타내는 것이 되는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이 금식의 날 혹은 슬픔의 날을 제외한 그 어떤 것이었다는 사실에 그 답이 있다. 매우 엄격한 유대인 종파들조차도 안식일에 금식하는 것은 반대했다. 랍비들은 비록 안식일 식사의 시간과 횟수에 대한 견해는 서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의 음식이 풍성하고 훌륭한 것이어야 한다는 입장에는 모두 동의했다. 다음의 진술은 아마도 전형적인 랍비들의 관점을 요약해 주는 것들이다. ‘내가(하나님) 너희에게 안식일을 짐으로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너희의 유익을 위하여 나는 그것을 너희에게 주었다.’어떻게? 랍비 히야 바 압바(Hiyya bar Abba)는 설명했다. 음식과 음료, 깨끗한 옷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즐겨라. 그러면 나는 너희에게 상을 내릴 것이다.”60) (241.1)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유대의 관습을 도입했다는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의 수사학적인 설명에 의해서 암시된다. 일례로 안식일에 대한 설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장로들의 유전은 한편으로는 금식하는 것을 금하지 않고 다른 한편에서는 휴식을 명령하지 않았는가?”61) 동방 지역과 암브로시우스의 시대(A.D. 397)의 밀란과 같은 몇몇 중요한 서방 지역,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몇몇 교회들과 지역들에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안식일에 금식하는 것이 반대되었던 추가적인 증거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62) 우리가 살펴볼 것이지만, 안식일이 축제와 기쁨의 날로부터 금식과 슬픔의 날로 변화된 것은 로마교회가 일요일 예배를 고취시키기 위해서 안식일을 격하시킨 조처의 결과로 나타난다.63) (241.2)
 유스티노스와 마르시온은 안식일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에 있어서는 서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반대하는 데 있어서는 같은 태도를 공유하고 있음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유스티노스는 그 날의 신학적 의미를 평가절하하고, 그것을 유대인들의 사악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마르시온은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경멸하기 위해서 안식일이 가진 육체적, 심리적 기쁨을 박탈해 버렸다. (242.1)
 마르시온은 그의 이원론적 영지주의 사상으로 인해 로마교회로부터 추방당했다. 그러나 그가 강조한 안식일에 금식하는 관습은 로마교회 내에서 여전히 유지되었다. 사실상 칼리스투스(Callistus, A.D. 217-222), 힙폴리투스(Hippolytus, A.D. 170-236년경), 실베스터(Sylvester, A.D. 402-417), 이노센트 1세(Innocent 1, A.D. 360-435) 등의 로마교회 감독들과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 요한 카씨아누스(John Cassian, A.D. 360-435년경)와 같은 교부들의 역사적인 언급들을 통해, 로마교회가 안식일을 금식일로 삼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기독교 공동체에게 그것을 강요하기 위해서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64) (242.2)
 로마교회는 안식일에 금식하는 관습을 마르시온에게서부터 직접적으로 차용하였는가? 자기의 교회에서 출교당한 이단자에 의해서만 지지되는 관습을, 그것도 안식일에 금식하도록 한 그 동기가 거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가 저들의 관습을 도입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매우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마르시온의 가르침이 출현하기 이전부터 로마교회에서 적어도 몇몇 사람들에 의해 안식일에 금식하는 관습이 시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더 적절한 해석이 될 것이다. 매주 안식일을 금식일로 삼은 것은 연례 부활절 기간의 성 토요일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금식했던 것을 확장시켜서 시작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어왔다. 예를 들어, 테르툴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둘을 연결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연례 부활절 안식일 금식은 인정하는 반면, 로마와 몇몇 서방 교회들에서 시행하였던 매주 안식일 금식은 정죄하였다. “때때로 그대는 유월절 기간의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금식일로 지켜질 수 없는 안식일에, 심지어는 그 시간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그대의 소제(小齋, 즉 금식)를 진행 한다”고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록하고 있다.65) (243.1)
 곧 살펴보겠지만, 2세기 초에 기독교 유월절과 유대인들의 유월절을 구별하기 위해서 부활절 일요일이 로마교회에 처음 도입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매주 안식일 금식이 같은 시기에 연례 부활절 안식일 금식의 확장으로서 발생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만일에 그렇다면, 안식일에 금식하는 관례는 마르시온의 가르침이 로마에 출현하기 전에 이미 도입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마르시온은 단지 유대인의 하나님에 대한 그의 모욕적인 견해를 전파하기 위해서 그 새로운 관례를 이용했던 것 뿐이었다. 매주 안식일 금식이 일찍부터 로마교회에 도입되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힙폴리투스의 진술(A.D. 202-234년경에 로마에서 기록된 것)에 의해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는 오늘날(και γάρνυν)에도 어떤 사람들은 ∙∙∙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럽히면서까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지도 않았던 안식일에 금식하라는 명령을 지시한다.”66) 힙폴리투스가 안식일 금식에 관한 칼리스투스 감독의 교령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인지, 혹은 그들에 대해서 그가 보고서를 작성했던 몇몇 마르시온주의자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아마 둘 다 일 것이다), “심지어는 오늘날에도”라는 표현은 그 관습이 아마도 부활절 일요일이 도입된 이래 여러 기간동안 잘 알려져 있었음을 분명하게 예상하게 해 준다.67) (243.2)
 힙폴리투스는 “안식일에 금식을 명령한” 자들이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안식일에 금식하는 것과 같은 예전전인 관습은 단지 공식적인 교회의 권위자들에 의해서만 합법적으로 명령되어질 수 있었고, 또한 역대 교황표(Liver Pontificales)에 따르면, 칼리스투스 감독은 그 시기에 주기적인 안식일 금식을 강화시켰기 때문에, 그 저자(즉, 힙폴리투스)는 그 의식에 대한 책임을 가진 자로서 로마교회의 성직자단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합리적인 것 같다. 힙폴리투스가 그 관습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로마교회 내에서 보편적으로 보급된 안식일 금식에 대한 논쟁을 약화시킨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저자가 로마에서 가지고 있던 문화적 배경과 지위를 고려해 볼 때, 그 반론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사실 힙폴리투스는 제피리누스(Zephyrinus, A.D. 199-217), 칼리스투스, 우루바누스(Urban, A.D. 222-230), 폰티아누스(Pontianus, A.D. 230-235) 등의 재위시에 로마에 살았지만 로마인도 아니었고 라틴계열의 인물도 아니었다. 그의 언어, 철학, 신학은 헬라적이었다.68) 게다가 자신의 교구의 주교 선거에서 떨어진 후(칼리스투스가 A.D. 217년에 그를 대신해 선출 되었음), 그는 의견을 달리하는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어 반주교 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래서 안식일 금식을 명령한 사람들을 정죄한 사실은 그가 동부지역 출신이라는 점과 그 지역의 신학적인 경향(일반적으로 동방에서 안식일 금식은 정죄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날에 대한 존중심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로마교회의 성직자단과의 대립하였던 내용들에 비추어 설명되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당시 칼리스투스의 교령에 의해서 주기적인 금식일로서 특별히 명령된 안식일 금식일을 힙폴리투스가 반대한 것은 개인적이고 신학적인 이유로부터 기인된 것이었다. (244.1)
 하지만 안식일에 금식을 행하는 로마의 관습은 모든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로마교회 내에서도 그것에 대한 반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은 당시 제사장이었던 요비니아누스(Jovinianus)에 대한 시리시우스(Siricius) 감독의 유죄판결에 의해서 나타나는데, 그 감독에 따르면, 요비니아누스는 “금식일들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몹시 싫어해, 그에게는 미래의 소망이 없었다.”는 것이다.69) 이 주제와 관련해 반복적으로 장문의 기록을 남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시대에 일반적으로 안식일 금식을 시행하는 곳이 “로마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지금까지는 소수의 서방 기독교 공동체”로 제한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70) 이와 비슷하게 요한 카시아누스도 안식일 금식의 관습이 “서방 지역의 몇 나라, 특별히 로마시에 사는 몇몇 백성들에” 한정되어 있다고 설명했다.71) (245.1)
 대부분의 학자들은 안식일 금식과 관련된 관습이 로마 교회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관습이 그곳으로부터 확실한 몇몇 서방 기독교 공동체로 확산되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여기에 추가되어야 할 것은 로마교회가 동방교회로부터 계속된 저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관습을 11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유지했다는 것이다. 마리오 리게티(Mario Righetti)는 그의 학문적인 저작인 전례의 역사(Historry of Liturgy)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45.2)
파리의 에니아스(Eneas of Paris, A.D. 870)와 코르비의 레트란누스(Retrannus of Corby, A.D. 868)의 논쟁적인 작품들에 의해 반박 되어졌고, 헬라인들의 격렬한 항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적지 않은 갈리아 지역의 교회들은 A.D. 1000년 넘게까지 전통적인 안식일 금식을 지켰다.72)
(246.1)
 오돔(R. L. Odom)의 설득력 있는 설명에 따르면, 안식일을 금식의 날로 만들려는 로마교회의 주장은 A.D. 1054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역사적으로 분리되는데 있어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73) (246.2)
 하지만 우선 그러한 관례가 왜 발생하였는지, 그리고 그것과 일요일의 기원 사이에 존재하는 뜻밖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안식일 금식이 로마교회에서 시작되었다는 표면적인 사실은 우리의 연구에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2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