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기의 기독교 문헌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재임 시기까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에 대해서만큼은 급진적인
차별화 정책을 채택했다. 예를 들어, 카드라투스(Quadratus)와 아리스티데스(Aristides)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고 변호하기 위해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처음으로 논문(일반적으로
“변증,” Apologies으로 알려짐)을 제출했다. 레브레톤(J. Lebreton)의 기록에 따르면, 그 당시의 초기 변증가들은
“교회가 제국과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위해 노력했다.”39) 비록 그들이 제국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명확한 형식을 제공해 주지는 못했지만, 푸에크(A. Puech)가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듯이, 그들은 로마제국과 대립하게 되면 구제받기 어렵다고 확신했다.
40) 제국에 대한 그들의 긍정적인 태도는 분명히 기독교를 향한 로마의 정책에 의해 장려되어졌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리스도교는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nus Pius, A.D. 138-161)의 치하에서
“제국의 상대적 보호 대상” 중의 하나로 규정된 것 같기 때문이다.
41) 마르셀 시몬(Marcel Simon)의 관찰에 따르면, 사실상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인들에게는 엄격한 조처를 취하기 위해 준비하였지만 ∙∙∙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호의적으로 매력을 느꼈다.” 그의 사본(Rescriptus)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제공한 내용에 따르면, 공개적인 비방에 기초해 기소된 그리스도인들은 없었다.
(2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