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6장 로마교회와 일요일 준수의 기원
 이 시기에 이러한 차별화된 세금을 지불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특별한 행동을 취했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하지만 바론(S. W. Baron)이 다음과 같이 통찰력 있게 진술한 것처럼 우리는 그것을 어느 정도 추론해 볼 수는 있다. (228.2)
그 재정적 의무(fiscel obligations)를 오직 유대인이라고 고백한 자들에게만 부과된 것으로 재 정의하는 것과 관련해서, 성장하고 있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네르바(Nerva)로부터 그 세금에 대한 면제를 확실하게 받아내었고, 아울러 유대 교단과의 인연을 단절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22)
(228.3)
 이 시기의 몇몇 로마인 저자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안식일 준수를 대신해 일요일 예배를 채택한 것은 자신들이 유대교로부터 분리된 것을 증명하고, 그렇게 하여 또한 차별적인 과세의 지불 의무를 피하기 위한 조처로 로마 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해 채택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229.1)
 이 시기에는 로마의 지식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향하여 문학적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명성 있는 웅변가였던 키케로(Cicero)는 이미 1세기 전에(59 B.C.) 유대인들의 보물을 약탈했던 아시아의 제독, 플락쿠스(Flaccus)를 변호하면서 “미개한 사교 신앙”으로 명명된 유대인들을 향한 비난의 연설로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23) 그 다음 시기에 문학적인 반셈족 작품들은 호레이스(Horace, 65-8 B.C.), 티불루스(Tibullus, 약 19 B.C.), 폼페이우스 트로구스(Pompeius Trogus, A.D. 1세기 초), 오비드(Ovid, 43 B.C.-A.D. 65) 등의 냉소적이고 모욕적인 몇몇 작품들에 의해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였다.24) 그러나 60년대 이르러 세네카(4 B. C.-A.D. 65년경)와 더불어 문학적인 반 유대정책에 대한 새로운 흐름이 밀려왔는데, 그것은 그 시기의 유대인들에 대한 새로운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 틀림없다. 이 열렬한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는 그 “저주받은 민족”(sceleratissime gentis)의 관습, 특별히 그들의 안식일 준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롱하였다. “매 일주일마다 한 날을 채택하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거의 7분의 1을 나태함으로 허비하였으며, 응급 상황이 발생한 때에라도 행동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종종 큰 손해를 보기도 했다.”25) (229.2)
 페르시우스(Persius, A.D. 34-62)는 그의 다섯 번째 풍자작품에서 유대인들의 관습을 미신적인 신앙의 첫 번째 사례로 소개한다. 특히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미신이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는 것을 증명하는 첫 번째 증거로 제시된다.26) 페트로니우스(Petronius, A.D. 66년경)의 것으로 여겨지는 한 단편에서 유대인은 “돼지-신”을 섬기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의 백성들로부터 제명”(exemptus populo) 당하지 않고 안식일을 준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칼을 들고 그의 음경의 표 피를 자르는 사람으로 묘사된다.27) 요세푸스는 유대와 로마 사이의 대 전쟁(A.D. 66-70)의 역사에 대해서 기록한 익명의 역사가들이 ”로마인들에 대해 아첨하는 글이나, 혹은 유대인들에 대해 증오하는 글로부터 인용하고 있어 그 사실들에 대해서 잘못 전하고 있다고 보았다.28) (230.1)
 퀸틸리아누스(Quintillian, A.D. 35-100년경)는 모세를 다른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유대인들의 미신을” 창설한 사람으로 언급하고 있다.29) 이와 비슷하게 마르티알(Martial, A.D. 40-104년경)은 할례 받은 유대인들과 그들의 안식일을 타락과 동의어로 여겼다.30) 플루타르크(Plutarch, A.D. 46-119년경)는 유대인들을 이교 민족으로 명명했으며, 그들의 안식일(그가 만취의 시간으로 여긴) 준수를 헬라인들에 의해서 채택된 여러 야만인들의 관습들 중의 하나로 치부했다.31) A.D. 125년에 기록된 한 풍자문학에서 유베날(Juvenal)은 유대화 된 아버지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과 만나지 말도록 가르치고, “매주의 제 칠일에는 삶의 의무에 참여하지 말고 무위의 시간”을 보내도록 하면서 부도덕한 영향을 끼치는 것에 대해서 동정하는 기록을 남겼다.32) 율레스 아이작(Jules Isaac)이 “반유대주의의 왕관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33)라고 칭한 타키투스(Tacitus, A.D. 55-120년경)는 신랄함에 있어서 그의 모든 전임자들을 능가했다. 이 역사가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이집트로부터 추방된 문둥병자들의 후손이며, 그들이 문둥병을 기념하여 돼지고기(당시 일반적으로 믿어지던 대로라면 돼지들에게 흔한 질병이었음)를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그들이 나태한 것은 그들이 이집트를 떠났던 날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모든 관습들은 괴팍하고 메스꺼운 것들이며,” 하나의 민족으로서 그들은 “유달리 정욕에 빠지기 쉬운 자들”이었다고 타키투스는 기록한다.34) (230.2)
 아벨이 지적하고 있듯이, 타키투스 이후에 “반 유대인 문학작품은 감소하였다.”35) 그러나 역사가인 디오 카시우스(A.D. 130-220년경)만은 아마도 예외였다. 카시우스는 우리가 이미 언급했던 키레나이칸에서의 유대인 반란(A.D. 115년경)을 묘사하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분노와 증오심을 표현하였는데, 거기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희생자들의 살을 먹고 그들의 피를 자신들의 몸에 바른 야만인들로 소개하고 있다. 위에 언급된 모든 작가들은 그들 대부분의 직업생활을 실질적으로 제국의 수 도인 로마에서 수행하였고 거기에서 글을 썼다. 이러한 사실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이들이 유대인들과 특별히 그들의 안식일 준수에 대해 경멸적으로 비평하는 것은 당시 로마인들의 일반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별히 그것은 유대인들을 향한 이러한 태도가 그 도시, 즉 로마 시에서 유력하게 나타나는 것이었음을 시사해 준다(학자들의 평가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로마 시에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미 약 50, 000명을 헤아릴 정도로 비교적 큰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36) 예를 들어 브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너무 강해 티투스는 왕위에 오를 때 소 헤롯 아그립바(Herod Agrippa the Younger)의 누이 베레니케(Berenice)와 결혼하고자 했던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였다.”37) 유대인들을 향한 대중들의 끌어 오르는 적개심 때문에 그 왕은 사실상 “마지못해”(invitus) 그녀로 하여 로마를 떠나도록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38) (231.1)
 특별이 이 시기에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향한 적개심이 심화되었음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작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A.D. 70년부터 죽을 때(93년경)까지 그는 로마의 수도에서 황실의 연금수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살았는데, 항간의 비방으로부터 그의 민족을 변호하기 위해 글을 쓰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다. 이런 충동으로 기록된 그의 두 작품인 아피온 반박문(Against Apion)과 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에서, 그는 유대인들이 고대 역사와 문화, 용맹함 등에 있어서 어떤 민족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232.1)
 그리스도인의 조처와 태도
 유대인들에 대한 이러한 억압정책과 적대적인 태도가 만연되었음(특별히 그 수도에서 그렇게 느껴짐)에 비추어 볼 때, 로마교회는 이 시기에 로마의 관헌들에게 그들이 유대교와 다른 단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어떤 조처를 취했을까?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와 정책 혹은 관습과 같은 것에서 나타나는 몇몇 변화들은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의 충돌이라는 시대적 정황에 기초해서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들과 로마와의 관계,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과의 관계에 비추어서도 설명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설명을 위해서 우리는 로마교회 내에서 발생했던 종교적 관례들과 관련된 특별한 변화들을 고찰하는 것에 잠시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232.2)
 2세기의 기독교 문헌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재임 시기까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에 대해서만큼은 급진적인 차별화 정책을 채택했다. 예를 들어, 카드라투스(Quadratus)와 아리스티데스(Aristides)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고 변호하기 위해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처음으로 논문(일반적으로 “변증,” Apologies으로 알려짐)을 제출했다. 레브레톤(J. Lebreton)의 기록에 따르면, 그 당시의 초기 변증가들은 “교회가 제국과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위해 노력했다.”39) 비록 그들이 제국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명확한 형식을 제공해 주지는 못했지만, 푸에크(A. Puech)가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듯이, 그들은 로마제국과 대립하게 되면 구제받기 어렵다고 확신했다.40) 제국에 대한 그들의 긍정적인 태도는 분명히 기독교를 향한 로마의 정책에 의해 장려되어졌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리스도교는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nus Pius, A.D. 138-161)의 치하에서 “제국의 상대적 보호 대상” 중의 하나로 규정된 것 같기 때문이다.41) 마르셀 시몬(Marcel Simon)의 관찰에 따르면, 사실상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인들에게는 엄격한 조처를 취하기 위해 준비하였지만 ∙∙∙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호의적으로 매력을 느꼈다.” 그의 사본(Rescriptus)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제공한 내용에 따르면, 공개적인 비방에 기초해 기소된 그리스도인들은 없었다. (233.1)
 또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에 유대인들에 대한 많은 기독교 저자들의 태도는 어떻게 달랐는가? 유대인들을 사회적으로 신학적으로 정죄하였던 반 유대 문헌의 대부분은 2세기에 만들어졌다. 이 문헌들을 조사하는 것은 본 연구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 당시에 존재했던 문제와 그 문제의 심각성을 독자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대인들을 다소 비방했던 저자나 작품들 중의 주요 목록을 다음과 같이 제공하고자한다. 베드로의 설교(The Preaching of Peter), 바르나바스의 서신(The Epistle of Barnabas), 콰드라투스의 잃어버린 변증(Apology), 아리스티데스의 변증(Apologs), 야손과 파피스쿠스의 그리스도에 관한 논쟁(The Disputation between Jason and Papiscus), 유스티노스의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 밀아데스의 유대인을 반박함(Against the Jews, 불행히도 상실됨), 아폴로나리우스의 유대인을 반박함(Against the Jews, 역시 사라짐), 멜리토의 유월절에(On the Passover),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한(The Epistle to Diognetus), 베드로의 복음(The Gospel of Peter), 테루툴리아누스의 유대인을 반박함(Against the Jews), 오리게네스의 켈수스를 반박함(Against Celsus) 등.42) (233.2)
 블랑케티에레(F. Blanchetiere)는 2세기 기독교 문헌에 나타난 반 유대주의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조사한 그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설득력 있는 결론을 내린다. (234.1)
이 관찰로부터 내려진 결론은 ‘유대인들의 문제’가 130년경, 즉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재위 시에 다시 관심을 끌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사도교부들의 작품들은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한편 이 시기에 기록된 베드로 복음(Kerugma Petrou)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할 필요를 인식했던 것 같다. [그가 A.D. 135년경으로 산정한] 바르나바스의 서신과 더불어 유대인이나 그들의 관례를 공격하는 ‘유대인들에 반대하는’(Adversos Judaeos) 모든 문헌들과 모든 그룹의 작품들, 논문들, 대화들이 실렸는데, 그 때 그것은 유대교 그 자체의 전거에 대한 문제는 아니다. 더욱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동로마 지역은 공평하게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43)
(234.2)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헐뜯는 진술들이 초기 문서들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44) 유대인들을 경멸하고 그들로부터 분리되고자 했던 “그리스도교”의 신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때로부터가 아니라 바르나바스의 서신과 더불어서였다. 블랑케티에레가 적절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처럼 이 시기의 교부들은, (235.1)
바울이 느낀 것과 같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고통을 심령 속에서 더 이상 느끼지 않았고, 그의 형제들이 ’저주받은 자들이 되는 것도 더 이상 바라지 않았다. ∙∙∙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한을 쓴 저자가 사용한 것과 같은 극단적인 욕설을 사용하지 않은 채, 바르나바스와 같은 동일한 매너로 유스티노스는 다만 이해하기를,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경직된 마음을 가졌었고, 뻣뻣한 목과 우상을 숭배하는 맹목성을 소유하였었다는 것이다. ∙∙∙ 예언자들을 죽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 죄를 범하고 만다. ∙∙∙ 따라서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공격당하고, 비난을 받으며, 저주를 당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45)
(235.2)
 유대인들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태도를 채택한 이유는 하드리아누의 시대에 특별히 존재하였던 몇 가지 상황들에 의해(반드시 정당화 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설명되어질 수 있다. 첫째로, 로마와 유대인들 사이의 관계가 매우 팽팽한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유대인들은 억압과 토벌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로, 교회와 회당 사이에 대립 관계가 존재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으로부터 추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종 그 회당의 관헌들에게 고발되었다. 가능하다면 언제든지 유대인들로부터 직접적인 박해도 받았다.46)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으로부터 어느 정도 확실한 보호를 받았다. 아마도 로마 당은 그리스도인들이 민족주의적인 열망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인식했던 것 같고, 따라서 정치적인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47) 네 번째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영향이 교회 내에서 감지되었다. 이들은 모세의 규율들을 문자적으로 준수할 것을 분명하게 주장하므로 교회의 분열과 분노를 촉진시켰다.48) (235.3)
 이러한 상황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정체성을 발전시키도록 유도하였는데, 그 새로운 정체성은 유대인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독특한 종교적 관례들을 자신들의 관례들로 대체하는 것으로 특징을 이루었다. 마르셀 시몬이 강조하는 것처럼,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로마의 당국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의 종교와 팔레스틴 지방과의 인연을 끊고, 흠잡을 데 없는 로마 제국의 백성이 되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49) 이처럼 기독교 공동체는 “차별화를 위한 반유대주의”로 불려질 수 있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계발할 수밖에 없었던 내부적인 요인을 가지게 되었고, 그 요인 때문에 공인되지 않는 기준에 따라 성서를 해석하는 현상이 특별히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것으로 유대교의 역사와 관례들이 만들어 낸 신앙적 의미와 기능을 무효화시키려 하였다. (236.1)
 유대의 역사와 관련해서, 사도교부들은 그 역사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나 어떤 암시도 내비치지 않고 있는데 반해, 기독교 변증가들은 저들의 역사적인 불충성을 증명하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했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대 역사를 재해석하고 그 역사의 과거와 현재를 상호 관련시켰다.50) 예를 들어, 바르나바스는 유대교의 역사적 정당성을 없애버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유대인들의 역사적 사건들과 제도들의 문자적인 의미와 실체를 무효화시켰다. 그 한 예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한 언약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로 인해 “모세가 그 언약을 받은 이후 곧바로 그들은 그것을 잊어버렸”(4:7)고 그 후 다시는 그들에게 그 언약이 제공되지 않았다고 했다. 바르나바스는 고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섭리의 의미를 잊어버렸거나 혹은 그 의미를 없애버렸다고 말했다. 그와 유사하게 유스티노스도 그 의 한 역작(tour de force)을 통해서, 할례와 안식일이라는 유대교의 두 근본 제도들은 그들의 사악함으로 인해 받을만한 형벌의 대상자로서 그 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강요한 오명의 낙인이 었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유대인들이 “선지자들과 그리스도를 살해”한 것과 A.D. 70년과 135년에 일어난 유대인 반란 사이의 인과적인 관계 를 임의로 설정한다.51) 베르너(E. Werner)가 “신을 죽인 첫 번째 시인”이라고 말한 멜리토는52) 그의 유월절 설교(Paschal Homily)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특별하게 살해된”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고도의 수사 학적인 방법으로 역사적 출애굽 유월절을 다음과 같이 재해석한다. (236.2)
그대는 그 위대한 절기의 때에 이 분을 죽였다(92절).
하나님은 살해되었고,
이스라엘의 왕은 죽임을 당했다.
오 무시무시한 살인 사건이여!
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불법이여!(96-97절)53)
(2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