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6장 로마교회와 일요일 준수의 기원
 우리는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요일 준수가 기원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그들 가운데서 그 기원과 관련된 흔적을 찾는 것은 무익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안식일 준수와 같은 유대의 종교적 관습들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요일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연구 방향을 이방인 그리스도인 집단에게로 돌릴 것이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들어 오기 이전에는 유대교와 종교적 유대 관계가 없었고,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는 유대인들과 대립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안식일이나 유월절과 같은 유대의 제의들을 새로운 날과 새로운 의미로 대체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221.1)
 그리스도교회에서 새로운 종교적 절기일들이 채택되고 그것들이 이후의 기독교 역사에서 시행된 것은 아마도 유대교로부터 분리가 일어난 초기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졌던 교회가 지속적인 귄위를 통하여 그것을 성취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2세기에 이미 광범위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 로마교회(로마제국의 수도에 위치해 있던 교회)는 일요일 준수가 기원된 곳으로 가장 유망해 보인다. 이 가설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로마 시와 로마교회에 우세하던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들에 대해서 간략한 조사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221.2)
 지배적인 이방인 개종자들
 바울은 로마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서에서 기록한 인사말, 특히 그 마지막 장의 인사말에서 로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다수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마서 11장, 13장)과 소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14장 이하)로 구성되어 있음을 추정하게 해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11:13)고 명확하게 단언하면서,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헬라어나 라틴어로 된 이름을 가진 다수의 신자들에게 문안 인사를 한다.1) 로마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지배 적으로 우세하였기 때문에 교회 안팎에서 유대인들과 대립하였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로마교회가 있던 서방 지역이 아마도 동방 지역에서보다 훨씬 더 일찍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공동체 사이의 차별화를 필요로 하게 되었을 것이다. 로마교회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서 레오나드 곱펠트(Leonard Goppelt)는 다음과 같이 기록함으로써 이 견해를 지지한다. (222.1)
그 편지는 누구나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로마에 다수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11, 13장)과 소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14장 이하)로 구성된 한 교회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두 집단이 공존함으로 그 시기에 고린도에서 나타난 것과 비슷한 몇몇 문제점들이 야기되었다. ∙∙∙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유대교와 로마교회의 대립 관계는 후기 바울서신 문서들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 유사하다: 교회와 회당 사이의 소격(流洞)은 모든 지역에서 나타났으며, 우리가 위에서 묘사했던 동방의 교회들 중에 서로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특별한 교회에서도 발견된다. 유대교는 기독교의 전신 중의 하나가 되었을 뿐 그 이외의 다른 역할도 하지못했다.2)
(222.2)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로마교회에서는 비록 소수파에 불과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가치(2:17), 할례의 필요성(2:25-27),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말미암는 구원(3, 4, 5장), 특별한 날들을 존중하는 문제와 부정한 음식을 삼가야 할 필요성(14-15장) 등과 같은 문제들을 가지고 “논쟁”(롬 14:1)을 일으켰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로마교회는 원래 이교 혈통을 가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지배적이었는데 다가 그들이 교회 안에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대립하고 밖으로는 유대인들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동방의 교회들 보다 더 일찍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었을 것이다. 그 때에 교회가 유대교와의 차별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안식일 준수를 포기하고 일요일을 채택하는 것은 이 차별화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국면으로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다. (223.1)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차별화 초기 단계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 A.D. 70-122년경)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는 “크레스투스3)(Chrestus,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誤記로 추정됨)의 선동으로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폭동을 일으키자, 그들을 진압하고 로마로부터 추방시켰다.”4) 피에르 바티폴(Pierre Batiffol)이 진술하는 것처럼, 이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같이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그 도시로부터 추방 되었다는 사실(행 18:2)은 “로마의 치안 당국이 아직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구별하지 못했음”을 증명해 준다.5) 하지만 14년 후에 네로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분리된 실체로 인정하고 유대인들과 구별하였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사실상 네로 황제는 “백성들의 증오의 대상이었으며, 그리스도인들로 불리던 한 부류인 백성들에게 죄(즉 방화죄)를 뒤집어 씌우고, 그들에게 가장 잔인한 고문을 가했다”는 것이다.6) (223.2)
 이처럼 로마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진 한 그룹을 유대교와 구별된 한 종교적 분파로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로마 당국자들의 눈에 다르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차별화고자 노력하였음을 알게 해 준다. 브루스가 진술하는 것처럼, 만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처음부터 유대인들의 신념과 규례들에 일치했던 로마법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 스스로를 유대인들과 동일시했다면, 60년대 경에 이르러서 “기독교는 단지 유대교의 한 종류가 되었을 것이었다.”7) 그랬다면 아마도 유대인들은 자신들과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솔선해서 끊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할례 받지 않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224.1)
 이러한 정황들을 놓고 볼 때,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의 분리는 특별히 로마에서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사실상, 62년 이후에 유대인의 영향력이 황후 꼽페아 사비나(Poppea Sabina)라는 이름으로 로마제국의 황실에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유대인 개종자로 유대인들의 친구였으며 그 해에 네로와 혼인하였다.8) 교회 역사가인 하르낙(A. Harnack)의 판단에 따르면, 네로는 자신이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방화를 일으킨 사람으로 기소되자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로 돌렸다고 한다.9)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유대인 주거 지역이었던 트라스테베레(Trastevere)가 화재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 사실 여부와 관련 없이, 바티폴이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화재가 발생한 순간 유대인들은 의심받지 않았고, 대신 그 비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쏟아졌는데, 그 이유는 당시에 그리스도인은 외부의 평판으로나 자신들 개인으로나 유대인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10)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그 첫 번째 로마황제의 박해에서 유대인들이 한 역할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의 교부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네로를 부축인 책임을 주저함 없이 유대인들에게 돌렸다.11) (224.2)
 브루스가 논평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의 구별이 “비록 팔레스틴(특별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태생으로 구성된 곳)12)에 서는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 . “로마에서는 A.D. 64년 즈음에는 분명하게 이루어졌었다”는 사실은 일요일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것은 안식일을 포기하고 일요일을 새로운 예배일로 채택한 사건이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를 차별화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로마에서 처음 발생하였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로마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들은 이러한 가설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225.1)
 반유대 감정과 조처들
 유대인들은 네로황제의 생존 시에는 제국 내에서 잠시 유리한 국면에 처해져 있었지만 황제가 죽은 후 곧바로 평판이 나빠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저들의 민족주의적 감정이 부활해 거의 모든 지역에서 격렬한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유대 전쟁(A.D. 66-70년)과 두 번째 유대 전쟁(A.D. 132-135년) 사이의 기간은 메소포타미아, 키레나이카(아프리카, 리비아 동부의 지역으로 고대 로마의 식민지, 역자 註), 팔레스틴, 이집트, 키프러스와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유대인 반란으로 특징지어지는 기간일 뿐만 아니라,(알렉산드리아, 가이사랴, 안디옥) 같은 지역에서 발생한 수많은 반유대인 폭동으로 특징지어지는 기간이기도 하다.13) 그들은 국가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 총 궐기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거룩한 도시는 파괴되었고, 나라는 빼앗기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더 이상 순수한 국가(natio)가 아닌 종교(religio)를 가진 유량 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225.2)
 로마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A.D. 150-220년경)의 묘사에 따르면, 이러한 폭동들은 로마인들의 마음속에 유대인들을 향한 분노와 증오를 낳았다. 예를 들어 키레나이카의 반란에 대해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26.1)
한편 키레네 지역에 있던 유대인들은 안드레아스(Andreas)를 그들의 대장으로 삼아 로마인들과 헬라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희생자들의 살을 먹고, 내장으로는 벨트를 만들고, 그들의 피를 자신들의 몸에 바르고 그 가죽으로는 옷을 만들어 입곤 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머리에서부터 아래쪽으로 톱으로 잘라 두 동강을 내었으며, 다른 사람들을 맹수들에게 던져주었고, 또 나머지들을 검투사로 싸우도록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해서 22만 명을 죽였다. 그들은 많은 유사한 폭행을 이집트와 키프러스에서도 자행하였다.14)
(226.2)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이렇게 격발된 유대인 폭력의 희생자로 고통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유대인들의 신앙과 정치적인 열망을 배반한 사람들로 간주되었고, 이교도들의 개종으로 규모면에서도 유대인 세력을 앞질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유스티누스(Justin Martyr)는 “최근의 유대 전쟁에서 바르코케바(Barkokeba)는 ∙∙∙ 만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단념하고 욕하기를 거절한다면, 그들은 잔인한 고문에 처해져야 한다고 명령했다.”고 기록하였다.15) (227.1)
 로마의 조처와 태도
 로마인들은 원래 유대교를 하나의 종교로서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종교적 원칙들을 대부분 존중(어떤 사람들은 찬양하기 까지 하였음)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러서 그들은 유대인에 대해 군사적으로, 재정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군사적으로 볼 때, 다소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당대의 역사가들로부터 제공된 살해당한 자들의 통계 숫자는 유대인들을 향한 로마인들의 모진 앙갚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장 인상적으로 증명해 준다. 예를 들어, 타키투스(A.D., 33-130년경)는 A.D. 70년의 전쟁에서 희생당한 유대인 사망자 수를 약 60여만 명이라고 말하고 있다.16) 디오 카시우스(A.D. 150-235년경)에 따르면, 바르코케바 전쟁에서 580,000명의 유대인들이 전투 중에 죽었고, 그 밖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다. 그는 계속해서 “유다의 모든 지역이 거의 불모지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7) (227.2)
 군사적인 조처 외에, 이 시기에 로마는 유대인들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적이고 재정적 정책을 채택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A.D. 69-79)의 치세 하에서, 산헤드린과 대제사장 직분은 폐지되었고 성전이 있던 터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처럼, 하드리아누스(Hadrian, A.D. 117-138) 황제는 유대인들이 새로 건설된 도시 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지시키고 죽이기까지 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더욱이 그는 유대인의 종교 의식을 금지시켰으며, 특별히 안식일 준수를 금지시켰다.18) (227.3)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도입된 차별적인 과세 역시 매우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처음에는 도미티아누스(Domitian, A.D. 81-96)에 의해 제정되었고, 나중에는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강화되었다.19)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원래 예루살렘 성전의 유지비 명목으로 만들어진 반 세겔(shekel)의 유대인 “재정세”(fiscal tax)는 이제 주피터 카피톨리누스(Jupiter Capitolinus)의 신전을 위해 부과되었는데, 심지어는 “공식적으로 그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유대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에게까지 그 세금이 부과되었다.20)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유대인 그룹과 동일시되기 쉬웠다. 아벨(E. L. Abel)이 적절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비록 그 액수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 원칙은 중요했는데, 그 이유는 로 사회에서 다른 종교적인 그룹은 그러한 세금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차별화된 정책이었으며, 로마사회 내에서 유인들의 이미지를 사회적으로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21) (2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