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정황들을 놓고 볼 때,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의 분리는 특별히 로마에서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사실상, 62년 이후에 유대인의 영향력이 황후 꼽페아 사비나(Poppea Sabina)라는 이름으로 로마제국의 황실에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유대인 개종자로 유대인들의 친구였으며 그 해에 네로와 혼인하였다.
8) 교회 역사가인 하르낙(A. Harnack)의 판단에 따르면, 네로는 자신이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방화를 일으킨 사람으로 기소되자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로 돌렸다고 한다.
9)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유대인 주거 지역이었던 트라스테베레(Trastevere)가 화재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 사실 여부와 관련 없이, 바티폴이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화재가 발생한 순간 유대인들은 의심받지 않았고, 대신 그 비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쏟아졌는데, 그 이유는 당시에 그리스도인은 외부의 평판으로나 자신들 개인으로나 유대인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10)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그 첫 번째 로마황제의 박해에서 유대인들이 한 역할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의 교부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네로를 부축인 책임을 주저함 없이 유대인들에게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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