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히브리서 연구) 제 6 장 영적인 완전과 성소에 들어가는 경험
  (139.1)
 영적인 미숙과 영적인 성숙의 차이가 무엇인가?
 오늘날 신자들이 성소와 대제사장 직분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영적 미숙이다. 도의 초보에 해당하는 기본 진리들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사람을 분별력이 없는 영적 난쟁이로 만들어 버린다. 영적으로 완전한데 나아가기 위해서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빛과 은사,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들 안에서 자라나는 경험으로 나아가야 한다. 바울은 이러한 은혜를 멸시하는 자들을 땅에서 돋아나는 가시와 엉겅퀴로 비유하였다. 이들은 악인들로서 마지막 심판 때에 저주와 불사름을 당하지만 채소를 내는 사람들은 복을 받는다고 그는 기록하였다. (140.1)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은 어떤 경험 속에 살고 있는가?
 바울은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 관하여 기록하였다. 선한 행위, 하나님께 대한 사랑, 성도에 대한 섬김 등에 대한 부지런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모습이다. (140.2)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기업의 소망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맹세로 확정하신 것이며 이 기업의 소망을 얻으려면 피해 도망하여 휘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 앞에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이다. (140.3)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그리고 그 언약의 소망을 받기 위해 피하여 가는 사람들은 성소의 휘장 안에 계신 예수님을 따라 들어가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모시는 경험을 한다. (141.1)
A. 히 6:1~8, 영적인 미숙에서 영적인 성숙으로 나아가라
B. 히 6:9~12, 양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의 삶
C. 히 6:9~20, 우리의 기업의 소망은 성소 안에 있다
(141.2)
 A. 영적인 미숙에서 영적인 성숙으로 나아감(6:1~8)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히 6:1) (141.3)
도의 초보를 버리고
 바울은 젖이나 먹는 영적 미숙아 같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것은 도의 초보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젖이나 먹고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 상태를 버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아직 죽은 행실 가운데 있었다. 이들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5:13)하므로 거듭나지 못하고 죄로 죽은 행실 가운데 있었다. 그러므로 영적인 미숙아로서의 죽은 행실은 회개하여 버리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했다. (141.4)
 신앙은 공언하는 데 그치면 안 된다. 들은바 말씀을 안약으로 삼아 선악을 분별함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141.5)
 “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 6:2) (142.1)
도의 초보
 ‘말씀의 기초적인 원칙들’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142.2)
   ① 침례들— 침례가 복수로 사용된 것은 아마도 침례요한의 물의 침례와 오순절 성령의 침례를 함께 말하는 것으로, 성령의 침례가 기독교 예식의 기초 기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42.3)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막 1:8). 침례요한의 물의 침례는 죄를 버리는 회개의 침례(막 1:4; 눅 3:3; 행 13:24; 행 19:4)였다. 초대 교회는 침례를 받을 때 온전히 옛 생애가 죽고 거듭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성령의 침례가 즉시로 따라오는 경우가 많았다. (142.4)
 * 초대 교회는 물에 담그는 ‘침례’(헬, 밥티조: ‘물에 담그다’, ‘완전히 젖게 하다’)를 행하였다. 현대 교회들이 ‘뿌릴 세’자를 사용하여 ‘세(洗)례’라고 지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의당 ‘담글 침’(浸)자를 써서 ‘침례’라고 해야 한다. (1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