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4. 아도나이—주인과 남편 (정혼한 남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
 이 특별한 언약의 성격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영적 이스라엘인 오늘의 신앙인들이 아도나이 의 종이라 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은 아도나이 와의 특수한 계약을 통해 구원의 기별을 땅 끝까지 전할 사명(사 49:5-7)을 받았으므로 모든 나라로 가서 그 사명을 완수할 책임이 있다(사 42:1-6). 그들의 사업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지금은 그들이 종의 신분이나 그 일이 마쳐지면 그들은 그 나라에서 영원히 아도나이“친구”로 살게 된다(요 15:14-17). (69.5)
 이 승리는 오로지 수난의 종,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사 52:13; 53:1) 예수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한 이사야는 성령 충만한 그분께서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하시며 인류의 온갖 고난을 해소키 위해 피 흘리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를 “내 종”이라 부르시는 장면을 보고 묘사했다(사 42:1-7). 예수는 이 예언을 자기에게 적용하셨다(마 12:17- 21). 복음 선지자는 또한 그 헌신한 종이 공생애 중에 당하실 끔찍한 고난을 보고 “그의 용모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상하였고 그 모습이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더 상하였다”(사 52:13, 14)고 기록하고, 이는 그의 의로운 생애를 통해 “많은 사람을 의롭게”(사 53:11) 만들기 위함이라 하였다. (70.1)
 이 구약의 말씀들은 신약에서 모두 구세주께 적용된다. 그는 아도나이 의 궁극적이고 이상적인 종인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으로 언급되었을 때는 실제로 외부의 세속적이며 무관심한 대다수와 현격히 다른 한 무리,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이상적이고 충성된 참 백성을 말한다. “참 시온”(갈 4:26), “사랑하는 어머니,” “충성된 아내”가 바로 그들이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시온은 배도한 예루살렘과 그녀의 거역하는 자녀들로부터 현격히 구분된다. (70.2)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종으로 부르시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을 바로에게 보내시라고 아도나이 께 간청했다(출 4:10). 그러나 이사야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즉시 아도나이 께 굴복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동일한 반응을 보였다(렘 1:7; 겔 2:4). 옛날 여호수아는 아도나이 의 이름으로 호소하기 전에 그분을 “온 땅의” 주인으로 간주했으며(참고 시 97:5), 날마다 그분의 지도를 받고 살기를 바랐다. 그는 평생 그분을 섬기기로 동의했다. 아도나이 께서 수립하신 주종 관계에는 삯꾼도 없고,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일꾼, 또는 봉급만 타면 시간도 되기 전에 사라지는 삯꾼도 없다. (70.3)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에게 종의 책임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깊이 생각하고 하늘의 아도나이 를 완전히 신뢰하라고 권고했다. 그리고 그는 “나의 하나님께서 ... 너희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빌 4:19)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아도나이 는 그 일을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행하실”(엡 3:20) 것이라 부언했다. (71.1)
 때로는 사랑하는 충성된 종이 아도나이 의 양자로 들어가 상속을 물려받는 경우도 있었다. 아브라함 집에 살던 다메섹의 엘리에셀이 그런 경우였다(창 15:2). 다윗은 아도나이 란 하나님의 이름에 숨겨진 의미를 깨닫고 이렇게 노래했다: “보소서. 종들의 눈이 주인들의 손을 바라보고, 여종들의 눈이 여주인들의 손을 바라보는 것 같이 우리 눈이 주 우리 하나님을 바라오니 ...”(시 123:2). 그래서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많은 계시를 알게 되었을 때 이제는 종이 아니고 친구라고 말씀하셨다(요 15:14-16). (71.2)
 II. 아내의 남편
 아도나이 는 또한 부부 관계를 묘사한다. 사라는 남편을 아돈 즉 주(主)라 하였고(창 18:12; 참고 삿 19:26, 27), 밧세바는 다윗을 “내 아돈(왕상 1:17, 18)이라 불렀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보좌에 않은 행복한 왕에 비유하고(시 45:1-5), 그 왕을 메시야적 제사장과 동일시했다(시 45:6-8; 참고 히 1:8). 노래에 능했던 시인은 주의 전 뜰에서 시중드는 많은 시녀들과 모든 사람들을 격려할 때 이 약속을 말했다: “왕이 네 아름다움을 크게 탐내리니, 이는 그가 너의 아돈 이심이라”(시 45:11). (71.3)
 베드로도 이 사상을 이렇게 강조해 말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부르며 복종했던 것과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어떤 놀라운 일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그녀의 딸들이 되느니라”(벧전 3:6). 이 관계의 요건 중의 하나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이다. 바울은 이 문제를 논하면서 “아내들아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kurie, 퀴리에)께 하듯하라”(엡 5:22) 하였다. 신약의 퀴리에(kurie)는 구약의 아돈 과 같은 호격(呼格)이다. (71.4)
 여기 “복종”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휘포스타소(hupostaso)인데, KJV에는 “submit”으로 번역되었다. 바울이 이 말을 쓴 진의가 무엇인지 영어와 헬라어를 분석하여 알아보자. 먼저 영어의 submit은 라틴어의 (sub)과 밋토(mitto) 에서 유래했다. (sub)은 “아래” 또는 “밑”이란 뜻이고(예: sub-marine), mit의 어원인 밋토(mitto)는 “보내다”란 뜻이다(예: transmit). 그러므로 submit은 “자기를 밑으로 넣는다”는 뜻이다. 집을 지을 때 기초가 집 밑에서 집을 받들어 지탱하는 것과 같다. 헬라어의 휘포스타소(hupostaso)도 이처럼 분해하여 뜻을 알아볼 수 있는데, 휘포(hupo)“아래” 스타시스(stasis)“입장을 취해 서다”란 뜻이다. 그러므로 영어와 헬라어 모두 “지지하고 받들고 힘을 북돋아 준다”는 뜻이다. 바울은 충성과 협조의 사상을 많이 강조했는데, 그것을 구세주와 그 아버지와의 관계로 설명하곤 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심 같이” 남편은 가정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의 신자들에게 자원하는 사랑과 협조와 지지와 충성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아내는 남편을 가정의 머리로 삼고 가족과 온 집을 떠받드는 초석과 기둥이 되어야 한다. (72.1)
 그러므로 교회의 신자들은 항상 기쁨으로 자원하는 이해심과 협력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제자 훈련은 무의미해진다. 그와 같이 가정에서는 아내의 지성적이고 이해성 깊은 협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는 그 가정에 문제가 있다. 사랑의 줄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묶으시는 것처럼 남편은 애정의 줄로 가족을 한 데 묶어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복종(submission)의 성서적 의미 속에는 굴종(屈從)은 전혀 들어 있지 않고 옹호(擁護)와 지지(支持)의 뜻을 크게 내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72.2)
 그리스도는 신랑, 교회는 그의 신부
 그러나 궁극적 부부 관계는 그리스도와 모든 시대의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성경에 설명되어 있다(사 54:5; 렘 3:14; 호 2:19, 20). 헬라어로 교회를 퀴리아케(kuriakē)라 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주(kurios)께 속한 것”이란 뜻이다. 교회라는 영어 단어 church는 불어 세르클(cercle)에서 온 것으로, 신자들이 예수를 중심으로 모여 둥근 원을 이룬 것을 말한다. 구세주는 후세의 모든 제자들이 아버지를 알고(요 17:3), 성장해서 당신과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요 17:21). 이 두 용어는 이상적 결혼 관계에 나타난다. 세상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요 8:19; 17:25; 행 17:23; 고전 1:21; 살후 1:8). 그러나 참된 제자는 자기의 하나님을 “안다”(참고 삼상 3:7; 렘 9:26; 24:7; 31:34). 악인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나(단 8:4; 11:3, 16; 시 12:4), 성도는 “주여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나이까?”(행 9:6)라고 묻는다. (73.1)
 성경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신부를 구하는 이야기가 있다(마 9:15; 참고 요 3:29).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교회­신부가 될 신자들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노력을 어렴풋이 설명한다. 그 신부를 이사야는 새 땅으로 이해했고(사 62:4, 5), 요한은 새 도성으로 보았으며(계 21:1, 2),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된 새 사회로 보았다(엡 5:24, 25). 바울은 전도자로서의 자기의 역할을, 참된 개심자들을 순결하고 사랑스런 처녀들로 신랑 그리스도께 “바치려는” “신랑의 친구”인 중매인으로 간주했다(고후 11:2; 요 3:29; 참고 엡 5:23, 24, 32; 계 19:7; 21:2, 9; 22:17). (73.2)
 이사야는 이보다 훨씬 앞서 이 관계를 이렇게 묘사했다: “너를 지으신 이들은 네 남편들이니 ...”(사 54:5, 히브리어의 복수는 삼위를 지적한다). 한편 예레미야는 제멋대로 사는 아내를 붙잡고 호소하시는 야훼 의 호소를 엿들었다: “타락한 자식들아, 돌이키라. 주[야훼]가 말하노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장가들었음이라. 내가 너희에게서 성읍 중 하나와 족속 중 둘을 취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리라”(렘 3:14). 당신의 백성의 거절과 불충에도 불구하고 아돈 의 사랑과 헌신은 감소되지 않는다. 주님은 당신의 선지자를 통해 선언하신다: “마치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리라”(사 62:5). (73.3)
 비할 데 없이 낭만적인 에스겔의 연가(戀歌)에서 하나님은 인내하는 구애자로 묘사된다(겔 16:1-22). 그는 갓난아기 이스라엘을 얻어다 길러 마침내 자기의 신부로 만든다. 그러나 그녀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들에 버려진 누추한 핏덩이, 다 죽게 된 계집 아이였다. 그는 아기를 불쌍히 여겨 그 누추한 벌거숭이를 데려다 기르기로 결심한다.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될 때까지 그는 애지중지 모든 필요를 공급하며 보살피며 기다린다. 그러다가 “때가 사랑의 때”가 되었을 때, 드디어 아도나이 는 그녀에게 청혼하고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된다(겔 16:8). 그 후 그는 그녀에게 온갖 선물을 쏟아 붓는다. “그러나 ...”(겔 16:15) 이야기는 슬프게 바뀐다. 너무도 빠르게 그녀는 고마운 남편을 잊고 그가 베푼 풍부한 양식과 축복을 가지고 다른 애인들을 사는 데 탕진한다. 그녀는 자기의 결혼 서약을 파기하고 하늘 신랑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74.1)
 예수는 아도나이 의 폭넓은 아량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리스도는 아도나이 의 구현(具現)이요, 아내인 교회에게 흰 세마포 혼인 예복을 제공하는 교회의 신랑이시다(마 25:1-13). 흰 예복은 한량없이 고귀한 그의 보혈로 산 성품을 상징한다(계 19:7-9). 신부가 신랑과 최종적으로 연합될 준비가 되면, 아버지는 아들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대대적인 잔치를 베푸신다. 그 혼인으로 아들은 재창조된 땅인 지구(사 62:4-7), 금 도성 새 예루살렘(계 21:1, 2), 그리고 구속받은 그의 백성인 장자들의 교회(고후 11:2; 렘 6:2)와 삼중 결혼을 하게 된다. 이 잔치에는 많은 손님이 초대된다(마 22:2-14). 그러나 이 모든 풍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회—아내는 고멜처럼(호 1-3장) 창녀 짓을 하며 어리석게 놀아난다(렘 3:14, 20). (74.2)
 다시 요약하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부부는 “하나[`eḥaḏ ]”가 되어야 한다(창 2:24; 참고 요 17:21). 이 “하나”란 말이 최초로 쓰인 것은 “저녁”“아침”의 연합을 설명할 때였다(창 1:5). 우리는 어둠과 빛을 구분하는데 아무런 곤란이 없다. 그 둘은 각기 현저히 다른 특성을 유지하면서 생태계에서 제각기 특별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그 둘은 합해서 하루라고 하는 “하나”의 단위를 구성한다. 부부는 연합된 가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각자 개성을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역할에 따라 각기 할 일을 해야 한다. 아도나이 는 그러므로 신부인 당신의 교회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려는 신랑이신 하나님을 나타낸다. 이 목적이 달성될 때 아내는 비로소 그녀의 남편을 “알”게 된다. 그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요 17:3). (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