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4. 아도나이—주인과 남편 (정혼한 남편)
 야곱이 자기 장인에게 묶이어 그를 섬긴 것은 자의에 의해 종으로 매인 경우이다. 그는 아내 될 여인의 몸값을 치르기 위해 일하는 동안, 스스로 종의 신세가 되어 정해진 기간 동안 약정된 급료를 받고 정해진 일을 구체적 목적을 위해 감수하기로 결심했다(창 29:18-20, 27; 30:25-30). 이 계약으로 주인은 종의 부채를 떠맡고 그의 히브리인 종에게 일정 기간의 노동으로 부채를 갚게 하였다. 이는 노동에 의한 채무 할부 상환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인척이 나타나 종 된 자가 채주와 합의한 액수를 지불하면 종이 풀려나는 길이 있었다(레 25:47-55; 참고 출 21:26, 27; 레 19:20). (65.1)
 히브리인 주인은 “매인 종”을 인자하게 취급할 의무가 있었다(레 24:22; 출 21:20). 주거와 양식을 제공할 뿐 아니라 아내를 얻어 장가까지 들여 주는 제도가 있었다(출 21:4). 그는 종이 병들거나 사고를 당하면 보살펴 주어야 했다. 종이 주인의 폭행으로 부상을 당하면 그것이 그에게 자유를 주어 보내 주어야 할 합법적 사유가 되었다(출 21:26, 27). 이러한 제도적 배경을 근거로 시인 다윗은 이렇게 호소했다: “오 아도나이 여, 진실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나는 주의 종이며 주의 여종의 아들이니다. 주께서 나의 결박들을 푸셨나이다.” 다윗은 하늘 아도나이 는 주인도 되고 남편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이 여기 나타난다. 주인은 종이 심판을 받게 될 경우 종의 편이 되어 대적의 세력을 파괴할 책임이 있었다(시 143:2, 3). (65.2)
 히브리인들의 법은 동족 종의 복무 기간을 6년으로 제한했다. 그 기간이 끝나면 그는 풀려나 자기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었다(출 21:2). 만일 종이 처음 매일 때는 독신이었으나 복무 기간 중 주인이 아내를 얻어 주었으면, 혼자만 풀려나고 처자는 주인집에 그대로 두어야 했다. 그들은 주인의 소유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처자를 데려가기 위해서는 다시 계약을 맺고 더 일하여 처자의 몸값을 지불하도록 되어 있었다. (65.3)
 라반은 야곱의 자녀들이 자기의 소유라고 주장했으나 그것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는 야곱이 처자와 짐승들의 값을 지불하기 위해 20년이나 일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창 31:43). 야곱은 처음 14년 동안 두 아내를 위해, 그 후 6년 동안 가축을 위해 일했다. 라반은 인간 아돈 이 자기에게 “매인 종”을 잘못 취급한 본보기 인물이라 하겠다. (66.1)
 그러나 만일 종이 솔직히 말하기를 “내가 내 주인과 내 아내와 내 자식들을 사랑하여 자유로이 나가지 않겠노라” 하고 인자한 주인 집에 영구히 머물어 처자와 함께 살기를 원하면 주인의 주선에 따라 특별한 의식을 마친 후 계속 그를 섬길 수 있었다(출 21:1-6). 그 의식은 아돈 과 자원하는 종과의 사이에 공식적으로 행해지는 특별한 법적 절차였다. 사도 바울은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런 특별한 협약을 맺은 자신의 신분을 “내가 속해 있고, 또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란 말로 확인했다(행 27:23). (66.2)
 종 되는 계약의 비준은 자기의 피로써 했다
 주인과 종은 이 새로운 계약을 비준하기 위해 판사 앞으로 찾아갔다. 판사는 절차를 설명하고 의식을 지도했다. 그 때 종은 주인을 따라 주인 집 대문으로 가서 문설주에 귀를 대고, 주인은 송곳으로 종의 귀 바퀴에 귀고리 할 때 모양 구멍을 뚫었다. 귀는 잠시 동안 문설주에 박히고(출 21:6), 그 자리에 언약의 핏자국을 남겼다. 이것은 이 때부터 종의 귀에 대한 독점권이 주인에게 있음을 상징했다! (66.3)
 그러므로 종은 남은 여생을 주인을 섬기며 그 집 대문을 드나들며 주인의 명령을 준행할 것인데, 출애굽 직전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설주에는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었듯이 주인 집 문설주에는 종의 피가 묻어 있는 것이다. 그 핏자국은 죽기까지 순종을 서약한 인(印)과 보증인 동시에, 그 종은 이제 그 집을 출입할 당당한 권리가 있음을 의미했다. 그는 이제 그 집에 속한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66.4)
 히브리 노예 제도에 따른 이 피의 언약에는 풍부한 메시야적 의미가 들어 있다. 예수는 그의 아버지 아도나이 의 이상적 종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자(人子)가 되어 인류를 구원하는 사업에 투신하기 위해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장정(長程)에 오르실 때 선언하신 말씀을 상기했다: “주께서는 희생 제물과 예물을 바라지 아니하시고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주께서 죄로 인한 번제와 희생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니, 그 때 내가 말씀드리기를 ‘오 하나님이시여, 보소서! 주의 뜻을 행하려고 내가 왔나이다’ 하였노라”(히 10:5-9). (67.1)
 그리스도의 몸은 그의 과업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것
 위에 본 바울의 글은 「70인역」의 시편(40:6-8)에서 인용한 것이다. 왜 그는 시편의 다른 번역을 따르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시편 40:6의 난외주에는 “내 귀를 주께서 찌르셨나이다”로 되어 있다. 이것이 오히려 같은 원문에서 인용된 다른 본문들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예컨대 마태는 주님의 표현을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내면 ...”(마 12:28)으로 기록했는데, 의사인 누가는 해부학적 관점을 살려 “그러나 만일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을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내면 ...”(눅 11:20)으로 그리스도의 은유를 기억했다. 이런 차이에 대한 해명은 마태는 누가의 상징적 어휘를 해석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손가락”은 돌 판에 십계명을 기록하시고 또 벨사살 왕의 연회장 벽에 바벨론의 멸망을 글로 알리신 성령의 정확한 역사를 상징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종이 되시기로 서약하신 것에 관한 히브리 성경과 「70인역」의 차이도 같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67.2)
 시인이 계시로 본 메시야 예수의 예언적 주장은 “주께서 내 귀를 여셨나이다”로 되어 있으나, 난외주는 문자 그대로 “주께서 내 귀를 찌르셨나이다”로 되어 있다(시 40:6). 이것은 주인을 영원히 섬기기로 선택한 종에게 주인이 송곳으로 귀를 뚫은 관습을 두고 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의 헌신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칠십 인에 의한 역동적 번역에 따르면 이 상징적 구절의 의미가 이렇게 밝혀졌다: “주께서는 ... 나를 위하여 한 몸을 맞추셨나이다[맞춤옷을 만들 듯].... 주의 뜻을 행하도록”(히 10:5-7 난외주). 종이 귀 뚫는 의식을 행한 후에는 “영원”토록 주인의 눈치와 부름을 살피며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출 21:6). 물론 그 영원은 살아있는 동안을 의미한다. 예수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기로 선택하시고 아버지의 명령을 듣는 즉시 이행할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빌 2:7). 우리 주님의 몸은 4,000년에 걸친 선택적 유전을 통해 그 과업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맞춘” 몸이었다. 이 준비는 그로 하여금 세상의 남녀들이 당했던 어떤 시련보다도 심한 시련을 감당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했다. 이 엄숙한 개념을 좀 더 설명해 보자. (67.3)
 우리는 누구나 어떤 유혹에 대해 약한 성품상의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유혹만 감당하면 되니 하나님 앞에 감사한 일이 아닌가? 그와 반대로 인간 예수의 몸과 마음은 세상에 살아 존재했던 모든 사람이 당했던 모든 유혹을 대결할 전쟁터로 계발되었다. 그는 사람이 당하는 모든 시련을 다 당하셨으나 죄는 범하지 않으셨다. 명령으로 하달된 하나님의 뜻은 피묻은 그의 영혼의 문호를 통해 신속 정확하게 이행되었다. 예수는 그러므로 야훼 의 가장 큰 종이시다. 하나님의 칭호 아도나이 는 하늘의 모든 요구에 대한 종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의미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종으로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주종 관계의 모델을 제시한다. (68.1)
 오 우리 주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 주셔서 주의 사업에 가치 있는 공헌을 하도록 만들어 주소서. (68.2)
 서약으로 스스로 종의 신분에 묶이신 예수
 히브리 민족의 이러한 노예 제도는 주인의 뜻에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종의 봉사와, 주인이 무엇을 명하던지 기쁜 마음으로 즉시 즉시 이행하는 종의 순종을 그 이상(理想)으로 했다(참고 엡 6:5-8; 골 3:22). 한편 주인, 즉 아돈 은 계약에 의해 종의 모든 필요를 보살피고 소용되는 것들을 알아서 친절히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엡 6:9). (68.3)
 성경의 이 이상은 하나님과 그를 섬기는 언약의 종들과의 사이에 있어야 할 주종 관계를 묘사한다. 성경의 손꼽히는 위인들은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최대의 영예로 여겼다. 아브라함이 그랬고(창 26:24), 이삭(창 24:14), 야곱(겔 28:25), 모세(출 14:31), 충성된 이스라엘 백성(사 41:9 외 다수), 엘리야김(사 22:20, 메시야의 전형), 다니엘(단 6:20)이 다 그런 인물이었다. 특별히 아도나이 의 종이라 불린 메시야 가지(슥 3:8; 6:12)가 그랬다. (69.1)
 이 “종”이란 말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든 시대의 경배자에게 수없이 적용되었다. 성전에서 노래하는 레위인 가수들이 종으로 불렸고(시 113:1), 선지자들로 그랬다(왕하 9:7).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일반적 진술들을 보게 된다: “그의 종의 번영을 기뻐하시는 주”(시 35:27), “곧, 그의 종 이스라엘에게 유업을 주신 분”(시 136:21, 22). 그러나 고집스레 불순종하는 그의 백성이 아도나이 를 등지고 그와 그들의 대표 다윗 간에 체결된 피의 언약을 파기하자 하나님은 부득불 그 “종의 언약”(시 89:39)을 폐기하실 수밖에 없었다. (69.2)
 영원하신 아버지여, 이 노래를 우리 것으로 삼게 도우소서. (69.3)
은혜로우신 주여, 주님은 나의 모든 봉사를 받으실
권리가 있음을 내가 믿나이다.
주의 명령 순종함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옵니다.
(6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