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4. 아도나이—주인과 남편 (정혼한 남편)
 영어 성경 KJV 구약에는 간혹 하나님의 칭호를 “Lord”으로, 즉 첫 글자 “L”만 대문자로 쓰고 나머지 “-ord”는 소문자로 표기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히브리말 아도나이('Aḏonay )를 옮긴 것이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당신의 본질과 특성을 나타내실 때 언제나 하신 것처럼, 성령께서는 아도나이 란 이름을 인류에게 소개할 때도 가장 적절한 기회와 배경을 이용하셨다. (60.1)
 그러면 우선 어학적 측면부터 잠깐 다루기로 하자: 아도나이 란 말은 아돈('aḏon)이란 말에서 왔다. 아돈“굳게 다지다,” “결심하다,” 또는 “지배 아래 두다”의 뜻을 가진 동사에서 나왔다. 게세니우스(Gesenius)의 견해에 따르면, 이 말은 또한 (don), 즉 “판단하다” 또는 그 연장으로 “지배하다”의 뜻을 가진 말에서 유래했다. (Dan)이란 이름은 여기서 파생한 말이다. 다니엘(Daniel)의 뜻은 “내 재판장은 이다. 아돈 의 복수는 통상적으로 아도님 인데, 그 뜻은 아도나이 와 같다. 그러나 언제든지 아돈 이 하나님께 적용되었을 때는 아도나이 형으로 쓰인다. 아도나이샷다이 와 같이 원시적 복수형인지 모른다. 게세니우스를 포함한 몇몇 학자들은 헬라어의 아도니스(adonis)가 이 고어(古語)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믿는다. (60.2)
 단수형 아돈('aḏon)은 “주인”(왕상 16:24) 또는 “주(sir)”(창 43:20)로 번역된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주인”(master) 또는 “주”(lord)로 번역되었다(창 24:9, 12, 14; 45:8). 사라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왔을 때는 “남편”을 의미했다(창 18:12; 참고 삿 19:26, 27).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아돈 이 영어의 mister와 같이 쓰인다. 아돈“선생님” 할 때처럼 존칭어로 쓰인다(예: 창 43:20“sir”창 24:9“master”). 여호수아는 “온 땅의 주”아도나이 란 어휘를 사람으로 현현(顯現)하신 그리스도께 적용했다(수 3:11, 13). (60.3)
 단수형인 아도니('aḏoni)는 “내 주”라는 말인데 아버지(창 31:35)나 형(민 12:11), 또는 왕의 배우자가 왕을 정중하게 부를 때(왕상 1:17, 18) 쓴 호칭이다. 이것은 요즘 우리가 편지 쓸 때 “존경하는 ____님께”라고 서두를 시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복수형인 아도님('aḏonim)은 단수형 또는 복수형 인칭 대명사와 결합될 수 있다. “내 주(복수)”가 그 한 예이다(창 19:2, 18). (61.1)
 아도나이 가 인류에게 소개되다
 구원의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우리가 아도나이 를 처음 만난 것은 아브람과 사래의 신앙 경험 초기의 일이다. 아브람은 하늘의 부름에 순종하여 가나안으로 이주했고, 롯을 구출한 후 멜기세덱을 만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그에게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의 후손이 나서 광활한 대지를 유업으로 받고 그의 가문을 이을 것이며 그 후손이 크게 복을 받아 세상을 복되게 할 것을 약속하신다. 세상을 복되게 할 아들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확약을 들은 아브람은 불평 조로 볼멘 소리를 한다: 아도나이(내 주) 야훼 여, 나에게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나이다!”(창 15:2). 아도나이 는 이 때 첫선을 보인 후 자주 시편과 선지서에 나타난다. 그러나 오경(五經)에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61.2)
 이미 살펴본 것처럼, 야훼 라는 새 이름을 소개할 때 영감은 그 이름을 이미 알려진 엘로힘 이란 이름과 함께 제시했다(창 2:4). 그래서 우리는 엘로힘야훼 가 동일한 한 분임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어떤 다른 신이 소개된 것이 아니라 엘로힘 에 관해 이미 알려진 개념을 능가하는 새로운 내용이 추가로 소개된 것이다. 이 원칙에 따라 아도나이 가 처음 성경에 나올 때 야훼 와 함께 제시되었다는 것은 아도나이야훼 가 한 하나님을 가리키는 칭호라는 진리를 강조한다. 실제로 모세가 야훼아도나이 라 불렀다(출 5:22)는 사실은 그가 이 개념에 익숙했음을 의미한다. (62.1)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권고하는 그의 마지막 유언 가운데 모세는 그분이 천지를 소유한 분이심을 상기시킨다(신 10:14). 그리고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이는 야훼 너희 엘로힘 은 신들의 신이시며, 주들의 주 [아도님아도나이]시며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능하시고 두려우신 분이시며, 사람의 외모를 개의치 아니하고 보상을 받지 아니하시니”(신 10:17; 참고 시 136:3).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는 야훼, 엘로힘, 아도나이 를 모두 동일시하고, 그 세 이름을 모두 한 하나님께 적용했다. 이 용법은 분별력 있는 독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여러 특성과 기능을 주목하게 만든다. (62.2)
 그러면 아브람과 사래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나중에 아브람은 하나님과의 대화 중에 아들을 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이 진정 이루어질 것을 보증하는 표징을 아도나이 야훼 께 요청한다(창 15:8). 하늘의 방문자는 그의 무례함을 개의치 않으시고, 간접적으로 표시된 그의 불신을 가벼운 꾸지람 한 마디 없이 사랑으로 용납하신다. 그후 아브람은 소돔 성을 위해 간구할 때 다시 아도나이 란 칭호로 하나님께 호소한다(창 18:3, 27, 30-33). “나의 하나님[엘로힘] 나의 주[아도나이]”께 도움을 호소한 다윗은 아마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아도나이 엘로힘]”(시 38:15)이란 어휘를 꾸며낸 장본인일 것이다. 이 어휘는 후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도전을 받은 도마의 입에서 나온다(요 20:28). (62.3)
 예수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윗이 깨닫도록 허락된 진리를 주목하게 하신다: “주 [야훼 ]께서 내 주[아도니—강조형 복수를 씀, 단수형 아도나이 가 아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나의 오른 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나이다”(시 110: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질문은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를 주라 불렀으니[즉 상전으로 강조했으니], 어찌 그가 다윗의 아들이 될 수 있겠느냐?”(눅 20:41-44; 참고 마 22:43, 44). (63.1)
 아도나이 는 하나님이 창조주 되심을 표시한다. 아도나이 , 온 땅의 주 (수 3:11, 13)라 했으니 이는 그가 온 땅의 소유자임을 뜻한다. 이는 “그 산의 주인['aḏoney, 아도네이] 세멜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 하였더라”(왕상 16:24)에서 보는 바와 같다. 만물을 소유한 이는 하나님이심으로 그는 창조된 만물의 순종을 명할 수 있는 위치에 계신다. (63.2)
 그러므로 아도나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본적 관계와 관련이 있다:

   (1) 주종 관계: 창 24:9, 10, 12, 27, 35, 등; 39:2, 3, 7, 8; 43:20; 출 21:4-6; 삿 19:11.

   (2) 부부 관계: 창 18:12; 삿 19:27; 왕상 1:17, 18; 시 45:11; 벧전 3:6. (63.3)
 이 관계들이 어떻게 되어야 성서적 이상에 융화되는지를 깨달으면, 우리는 우리의 생애에서 아도나이 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우리의 신랑 되신 주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 할지를 보다 잘 깨닫게 된다. (63.4)
 영원하신 하나님, 이제 성경에서 위에 본 두 가지 의미의 아도나이를 연구할 때 잘 깨닫도록 도와주소서. (63.5)
 I. 종들의 주인
 구약 시대에는 종이 두 부류가 있었다. 그들은 각기 아돈 과 명확한 계약을 맺고 있었다. 이런 관계를 전제로 하나님은 무관심한 이스라엘에게 폐부를 찌르는 질문을 하셨다: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자기 주인[또는 주인들]을 공경하나 ... 내가 아버지일진데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으며, 내가 주인[아도님 또는 아도나이—필사본(筆寫本)에 따라 차이가 있음]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말 1:6). (64.1)
 두 부류 중 첫째는 품꾼들이다. 그들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주인과 무슨 일을, 어떤 기간에, 품삯 얼마에 할 것을 합의한다(마 20:1-3). 품꾼들은 일을 마치면 품삯을 받고, 품삯이 지불된 후에는 삯꾼과 주인은 서로 아무런 책임이 없는 사이가 된다. 둘째 부류의 종은 “종” 또는 “매인 종[노예]”(`eḇeḏ, 에베드, 창 9:26, 27)으로 주인과의 관계는 채무나 그 밖의 사연(출 22:3) 때문에 얽맨 사이이다. 엘리사를 찾아와 죽은 남편의 빚을 갚기 위해 종으로 가게 된 자기와 두 아들을 구해 달라고 도움을 호소했던 과부 이야기가 그 대표적 예이다. 팔려 가면 그녀와 두 아들은 본의 아니게 채권자의 종이 되어 그를 주인, 즉 “주”로 섬겨야 한다. 그들이 자유를 얻으려면 부채를 전액 갚지 않으면 안 된다. (64.2)
 또 다른 시나리오에 의하면 딸이 동의하면 아버지는 딸을 아돈 , 즉 남편 될 사람에게 팔아 그에게 아내로 줄 수 있었다(창 29:15-20; 출 21:7-11). 또 여자는 집안 어른의 결정하면 남의 집에 보내질 수도 있었다(창 24:58). 이렇게 여자가 아돈 과 혼인하여 그의 아내가 되면 “주인”은 간음한 연고 없이는 아내를 버리지 못하는 법에 묶였다(신 24:1). 다른 방법으로는 전쟁에서 잡혀 온 타국 여인이 아내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레 25:44-46; 민 31:35). (64.3)
 그리스도의 비유에 나오는 빚진 신하는 왕에게 호소한다: “주여, 참아 주소서! 그러면 제가 다 갚겠나이다”(마 18:26). 왕은 그의 채무를 전액 탕감해 주고 그를 영원히 자기의 권한 아래 둔다. 그러므로 그 종은 더 이상 자기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고전 6:19, 20). 이 두 이야기에서 부채는 본의 아니게 아돈 의 종이 되게 만드는 원인이 됨을 보여준다. (64.4)
 야곱은 자원하여 종의 신분을 택한 사람의 한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