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트와 브룬너 같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불트만의 접근방식의 측면들에 찬성하지 않지만, 그들 또한 부활을 실존론적으로 적용한다. 바르트는 부활절이 부활한 주님에 대한 믿음의 부활이라는 불트만식 해석을 부정하는데, 부활한 주님에 대한 믿음은 그의 역사적 현현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Dogmatics 3. 2. 443). 예수의 부활과 출현들은 사실적 역사로 수용되어야 한(447). 그러나 이것은 부활이 모든 관찰자에게 열린 보통의 역사적 사건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감추어진 존재와 사역이 노출되고 드러났다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부활에 대해서는 어떤 “거룩한 불가해성”이 존재한다(4.2.146). (440.6)
 브룬너는 부활이 그것을통해 다른 것을볼수 있는 “구멍”이라고 말하면서 비슷한 견해를 제시한다. 부활은 사실임이 분명하지만, 일련의 역사 사건들 가운데 넣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에서 역사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지 그 사건의 메아리일 뿐이다. 그것은 초역사적이며 종말론적 역사이므로 더 이상 역사가 아니다.”(Brunner 583). 육체의 부활은 죽음 후 개인의 인격의 지속성을 의미한다. (440.7)
 불트만의 전통을 잇는 몇몇 신학자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부활에 관련해서는 불트만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28-133)는 부활의 역사성을 긍정하지만 육체적 부활은 부정한다.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그리스도교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시킨 사건의 실재성에 따라 세워지거나 무너지거나한다”라고 주장한다(165). 이 실재성은 불트만이 주장했던 신앙의 부활그 이상이다(173).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식하는 것은 곧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미래를 이 사건 안에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부활은 약속과 소망의 문제이다. (440.8)
 몰트만과 판넨베르크 모두 불트만의 사상 가운데서 중요한 부분을 수정했지만, 그들이 신자에게 있어 죽은 자의 문자적 부활을 긍정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와 관련하여 J. 크리스티 안 베커(J. Christiaan Beker 103)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적절하다 “사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이 소망의 신학자들은 마지막 때를 실재적 사건보다는 개념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본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마지막 목표와 의미를 이룬다.” (441.1)
 대부분의 보수적 그리스도교인들은 불트만에 의해 특징지어진 전통 전체를 부정했으며, 예수와 신자 모두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문자성을 확증했다. 그러나 자주 부활의 확실성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영혼불멸 개념과 결합되었고, 그리하여 부활은 육체와 영혼의 재결합으로 이해된다. 보수주의 그리스도교인들과 관련하여 강조할 점은, 그들이 믿음과 역사의 문제에 대해 논의하려는 노력은 거의 기울이지 않고 여러 종류의 성경적 및 역사적 증거로써 부활을 입증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441.2)
 그러나 근자의 복음주의자들은 그러한 문제들을 제기했다 예를 들어, G. 엘든 래드(G. Eldon Ladd 263-284)는 부활의 역사성을 확증하고,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들은 성경적인 신앙에 이질적인 전제들을 들여올 것이라고(267-271) 주장한다. 불트만에 반대하여 래드는 예루살렘 바깥의 한 정원에서 객관적인 사실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래드는 또한 부활에 역사를 훨씬 능가한다는 점이 있음을 보여 주려 한다. (441.3)
 “예수의 부활은, 영원한 어떤 것이 역사적이고 한시적인 무대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사건들의 일반적 발생의 ‘중단’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의 출현이다. 영원한 생명이 필멸성 가운데 나타났다.”(273). (441.4)
 래드에 따르면 이 “초역사적” 사건은 역사적 재구성과 방법론에 의해 확립되고 알려질 수 없는데, 역사적 증거들이 [말씀을] 들음에서 나오는 믿음을 좌지우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280). 초역사적인 사건은 믿음과 이성을 분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둘이 동일하진 않지만 협력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부활은 오직 믿음으로만 수용될 수 있지만, 믿음은 성령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이며, 성령은 역사적 증인들을 믿음을 유발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믿음을 좌지우지하기 위한 증거로 사용하시지는 않는다. (441.5)
 G.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입장
 성경의 논의를 다룬 부분 전체가 부활에 대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이해에 관한 설명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는 부활 교리에 대한 재림교회의 이해와 관련된 역사를 간략하게 다룰 것이다. (441.6)
 재림에 동반되는 부활에 대한 기본적 그림은 재림교회가 공식적으로 태동하기 직전에 이미 윌리엄 밀러의 설교 가운데 들어 있었다. 그는 의인의 부활이 천년기 직전에 일어날 것이며, 악인의 부활은 천년기 끝에 일어날 것이라고 가르쳤다〈참조 Damsteegt 38-40;Nichol 506, 507). (441.7)
 〈리뷰 앤드 헤럴드〉지에 출판된 부활에 관한 가장 초기의 기사들은 다른 자료들에서 재인쇄된 것들이었다. 첫 번째 기사는 1852년 12월 9일의 것으로, 〈밤중소리〉(1843)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1,000년의 간격을 두는 두 부활에 대한 잘 구성된 논의가 1853년 9월 27일자에 실렸지만 그것도 이미 1843년에 출판된 것이었다 세 번째 기사는 1854년 4월 18일의 것으로, 침례교회 자료에서 나온 것이다. (441.8)
 1856년에 러프보로(Loughborough)는 〈리뷰 앤드 헤럴드〉지에 “영혼은 불멸하는가?”라는 제목의 독창적인 기사를 실었는데, 여기서 그는 미래의 삶에 대한 유일한 소망은 문자적 부활에 기초한다고 주장했다. J. Η. 왜거너(J. H. Waggoner)는 악인들의 부활에 대한 성경적 증거를 분석하여 1857년 2월 5일자 〈리뷰 앤드 헤럴드〉에 출판했다(참조 죽음 II. Ε). (441.9)
 그러므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그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의인의 부활(첫째 부활)을 기대할 수 있고, 또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죽은 자들은 무의식의 수면 가운데서 사람이 전인적으로 부활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시종일관 주장해 왔다. 또한 재림교인들은 악인들의 부활(둘째 부활)이 천년기의 끝인 1,000년이 지난 후에 일어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441.10)
 이 입장의 일관성은 교회가 채택한 신앙에 대한 여러 진술에서 확인된다. 1872년 그 신앙에 대한 가장 최초의 출판된 진술 중 하나에 인간의 전인성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 포함되어 있다. 이 진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칭의를 위해 부활하셨으며(2번) 죽은 자들이 육체의 부활에 의해 무덤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의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 첫째 부활에서 그리고 악인들은 1,000년 후 둘째 부활에서 나온다(21번). 마지막 나팔 소리에 살아있는 의인들은 변화되어 불멸의 존재가 된다(22번; Land 232-236). (441.11)
 1931년에 발행된 진술은 하나님만이 불멸성을 갖고 계시며, 인간은 태생적으로 죄 있고 죽어가며, 불멸성과 영생은 오직 복음으로부터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 주어진다고 선언한다(9번). 10번과 11번째 진술은 죽음의 무의식적인 상태와두 부활에 대해 말한다. (441.12)
 최근의 신앙 진술은 1980년에 가결되고 출판된 것으로 다음과 같다. (441.13)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홀로 불멸이신 분으로서, 영생을 그분의 구속받은 자들에게주실 것이다. 그날까지 죽음이란 모든 사람에게 있어 무의식 상태이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나타나실 때 부활한 의인들과 살아있는 의인들은 영화롭게 될 것이고, 그들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 끌어올려질 것이다. 둘째 부활, 즉 악인들의 부활은 천년 후에 일어날 것이다(롬 6:23; 딤전 6:15, 16; 전 9:5, 6; 시 146:3, 4; 요 11:11-14; 골 3:4; 고전 15:51-54; 살전 4:13-17; 요 5:28, 29; 계 20:1-10).”(SDA Yearbook 1991,8.) (4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