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중세
 중세에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인물은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이다. 그는 부활에 대한 한 논문을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포함시킨다. 그는 육체의 부활을 옹호하고(3부, 75번째 질문에 대한 부록) 그것을 세상의 끝에 둘 뿐 아니라(77번째 질문), 심지어 머리카락과 손톱도 부활될지(80번째 질문), 죽었을 당시의 나이일지, 다시 젊어질지, 신장이 같을지 그리고 양성이 모두 존재할지에 대해서도 추측한다(81번째 질문). 그러나 아퀴나스에게 부활은 육체와 영혼의 재결합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438.5)
 E. 종교개혁부터 계몽주의 시대까지
 종교개혁자들은 타고난 불멸성의 교리를 계속 고수하였지만, 일반적으로 로마가톨릭 사상에서 죽은 자들이 고통을 통해 순결해진다는 중간 상태인 연옥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재와 중요성뿐 아니라 그것이 가능케 하는 신자들의 부활의 실재와 중요성을 고수했다. 이런 일치점 외에는 그들 사이에 다양한의견이 있었다. 개혁자들은 부활이 어떻게 영혼의 불멸성 및 중간 상태와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부활한 몸이 이 땅의 몸과 같은 것인지에 대해 이견을 보였다. (438.6)
 루터(1509-1564년)는 상당한 모호성과 다양성을 보인다. 한편으로 그는 연옥 교리에 맞서면서 죽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기다리면서 무의식 상태에 있다고(Commentary on Ecclesiastes 9:6). 그러나 같은 〈전도서 주석〉의 앞부분에서 그는 “영혼들이 불멸하는 것은 확실치” 않다고 주장한다(3:20). (439.1)
 〈탁상담화(Table Talk)〉에서 루터는 이 모호성을 인지하고 부활의 비밀 및 중간 상태의 불가해한 본질을 지적한다. 그는 “영혼들이 죽음 이후 듣고 느끼고 보는 것은 맞지만,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다.”( 5534)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지옥으로 내려갔다고 선포하는 신조의 의미에 대한 추가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 루터는 그것을 믿어야 하지만 이해할수는 없다고 대답했다(위의 책). (439.2)
 칼뱅은 부활과 불멸 모두를 지지한다 그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으며 영혼은유한하다고한것이 오류였다고 설명한다(〈기독교 강요〉3. 25. 5). 더 나아가서 그는 두 가지 오류, 즉 영혼이 죽음의 시간 동안자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부활 시에 다른 육체가 영혼과 결합한다는 오류를 반박한다(3. 25. 6). 부활은 육체와 영혼의 재결합인데, 여기서 새로운 육체는 이전 것과동일한물질이지만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439.3)
 칼뱅은(혼수론〈Psychopannychia)〉에서 그의 주장과 반박 이론을 제시한다. 여기서 그는 영혼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죽음에서 부활까지 무의식 상태에서 잔다고 하는 자들이나 영혼의 실재적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을 반박한다(참조 죽음 II. D). 칼뱅은 영혼이 하나의 물질이며 실제로 죽음 후 부활까지 감각과 지각을 유지한 채 생존한다고 주장한다(Calvin 419, 420). (439.4)
 아마도 1646년 영국과 스코틀랜드 장로회에 의해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개신교도들의 합의의 핵심 사상을 다른 어떤 문서만큼이나 잘 진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직도 대부분의 가장 보수적인 개신교도들이 지지하는 입장이다. (439.5)
 “사망 시에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간다. 불멸의 영혼은 하늘로 받아들여지거나 지옥으로 던져진다. 마침내 모든 죽은 자는 동일한 육체를 가지고 부활하여∙∙∙그들의 영혼과 영원히 결합된다.” (439.6)
 “불의한 자들의 육체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 수욕 가운데 부활하고 의로운 자들의 육체는 그분의 성령을 통해 영광 가운데 부활하여, 그분 자신의 영광스런 몸과닮은 모습으로 변화된다.”(Leith 228,229). (439.7)
 종교개혁 이후 보편적 이성, 도그마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기적에 대한 회의(懷疑)를 강조한 계몽주의는 당연히 부활 교리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신론자들이 이미 부활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라이마루스(Reimarus, 1694-1768년)의 작업은 분수령을 이루었다. 함부르크의 교수였던 라이마루스는 예수가 계속 유대인으로 남았고, 의식법을 전복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한 적이 없으며, 새로운 종교를 시작하려고 의도하지 않았던 철저하게 도덕적인 교사였다고 주장했다(Reimarus 98-102). 예수께서 돌아가셨을 때 복음서 내의 여러 기사의 불일치점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그는 죽음에서 부활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들의 생업으로 복귀하기를 원치 않았던 제자들이 그분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것이다(153-164; 244, 245). (439.8)
 라이마루스의 이런 극단적인 입장을 따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부활과 관련하여 일어난 신앙, 이성 그리고 역사에 대한 질문들은 계속하여 더욱 더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439.9)
 F. 현대
 현대 그리스도교에서 부활에 관한 이슈는 세 갈래 주요한 사상적 흐름으로 나뉜다. 로마가톨릭 전통은 계속하여 부활을 육체와 영혼의 재결합으로 보고 영혼의 불멸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과거보다 연옥교리에 더 공을 들이진 않지만 아직도 그 교리를 위해 자리를두고있다. (439.10)
 자유주의적 개신교 전통은 부활과 내세에 대해 대단히 다양한 견해를 보여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내세의 개념과 기타 여러 종말론적 요소들의 개념을 어떤 식으로든 미래에 일어날 실재적 사건으로보다는 현재적 경험의 상징으로보려는 경향이 있어 왔다. (440.1)
 반면 보수적 또는 복음주의적 개신교도들은 부활을 동반하는,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문자적인 재림에 강조점을 둔다. 구체적인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다양성이 있지만,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영혼불멸을 고수하며 부활을육체와 영혼의 재결합으로 본다. (440.2)
 신정통주의 논쟁의 맥락에서 오스카르 쿨만은 영혼불멸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신약의 교리가 영혼불멸 신앙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다(Cullmann 15). 마지막 날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시기에 인간은 중간 기간의 긴장에 동참하는 기대의 상태에 놓여있다. (440.3)
 복음주의 전통에서 근자의 존 스토트(John Stott)와 클라크 피노크(Clark Pinnock) 같은 두드러진 사상가들은 영혼불멸 교리가 인간의 영적 생명뿐 아니라 물리적 피조물을 포함하는 모든 피조물의 총체적인 구원을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에 비해 미래에 대해 불완전한 소망만을 준다고 비판했다(Stott 313-320; Pinnock 16,17). (440.4)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은, 예수의 부활은 그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비신화화되어야 하는데, 그 의미가 곧 제자들에겐 신앙의 부활이었다고 주장했다(Bultmann 1951, 1:305). 이 신앙의 부활은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데, 그것은 약속된 종말론적 생명이다. 그는 신약의 신화적 종말론은 이제 “신약에서 기대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강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 단순한 이유로 인해 옹호될 수 없다. 역사는 끝에 이르지 않았고, 모든 어린이도 알듯이 그것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 문자적 재림과 죽은자들의 부활을부정했다(Bultmann 1957,5). (4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