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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신학적 이해를 위한 의의
 신자들의 부활에 관한 교리가 없다면 구원에 대한 어떤 이해도 불완전할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는 그분께서 본래 의도하셨던 삶의 온전한 회복인데, 그것은 죄와 사망의 비극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속죄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불멸의 상태로 변화되어 자신들의 필멸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에만 완성될 수 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의 진술이 그렇게 강했던 이유이다. 부활이 없다면 설교도 믿음도 쓸모없고(14절), 믿음은 헛것이고 우리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17절). (433.1)
 생명의 온전한 회복 및 죄와 사망에 대한 승리가 아직 실재가 되진 않았지만, 이미 그것들은 약속된 부활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소망의 경험 안에서 예기된다 여기서 “소망”이란 단어는 그 통상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일상적 대화 가운데서 소망은 종종 근거가 거의 없거나 전무한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소망의 신약적인 개념은 바로 보증과 확신으로 특징지어진 새로운 종류의 실재이다. 부활을 소망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것의 실재에 참여하는 보증과 확신의 분위기 속에서 사는것이다. (433.2)
 이 보증은 죽은 자의 부활이 예수와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예수의 부활은 신자들의 미래적 부활을 보증할뿐아니라그것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는 말의 의미이다. 이런 이유로 그의 부활은 단지 시신의 소생 정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종말론적 사건인데, 이것을 통해 예수는 영화롭게 된 몸을 취하셨고 의인들의 부활을 시작하셨을 뿐 아니라그것을 보증하셨다. 그분은 자기 제자들에게 생명을약속하는것 이상의 일을하셨다. 그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셨다. 그리스도인들은 확신 가운데 살기 때문에 미래에 있을 생명에 대한 실재적 소망을 흔들림 없이 기대한다. 예수의 부활은 삶을 풍요롭게하는 생각 혹은 현재의 삶이 줄 수 있는 의미를 나타내는 표상 그 이상의 것이다(물론 그러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신자들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보증이다. 이 보증 없이 그리스도인의 구원론이나 종말론은 결코 이해할수 없다. (434.1)
 확실한 보증에서 나오는 신자의 새로운 삶은 부활한 그리스도와의 교제 및 그의 몸인 교회에의 참여로 특징지어진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나 미래의 소망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지금 참여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이 참여에 대한 바울의 강조를 살펴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그리스도의 죽음뿐 아니라부활에도 동참하는 것을 의미했다. (434.2)
 이 유비는 오늘날의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보다는 바울에게 있어서 더욱 강력했다 우리는 훨씬 더 개인주의적이어서 오직 우리와 그분 사이의 관계에서만 그리스도와의 협력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부활 및 그분과의 교제에 참여하는 장(場)은 오직 신자라는 몸과의 연결에만 있는데, 그곳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자신을 알리시고 몸을 그 머리로서 지도하신다. 그는 몸의 머리이시다. 그것은 그의 몸이며, 따라서 그분과 협력한다는 것은 곧 그의 몸과 교제하는 것이다. (434.3)
 그리스도와의 협력의 이 단체적 특성은 영혼의 불멸성 대신 신약의 부활 개념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그것은 모든 자들이 마지막 상급을 공동체로서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11:39, 40은 선포하기를 믿음의 위대한 모본들조차도 아직 그들의 마지막 상급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더 나은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카에 쿠보(Sakae Kubo 136)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적절하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사건이다. 죽은 의인들이 모두 함께 일어나며, 살아있는 자들은 그와동시에 승천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죽지만 함께 일어난다. 모든 이가 영원의 축복들을 함께 누린다” (434.4)
 확실한 소망과 그리스도와의 동참이라는 이 새로운 삶은 신약에서 여러 용어로 묘사되고 여러 은유로 예증된다. 그러나 결국 한 사람을 부활과 궁극적 구원에 합당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경험(바울이 믿음이라고 말하는)에 대한 그의 신실한 참여이다. (434.5)
 부활의 교리는 죽음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이해에 비추어서만 온전히 평가될 수 있다. 인간의 통일체적 본질 및 인간적 관점에서 죽음의 종국성을 부정하는 영혼불멸이나 환생 같은 가르침은 생명의 원수인 죽음과 필멸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새로운 불멸성으로 정복하는 부활의 영광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한다. 부활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이고 제한적이며 유한한 능력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신다. 부활은 단지 한 형태의 생명에서 다른 형태의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존재하기를 멈춘 것에 대한 재창조이고 이제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에 의해 다시 사는 것을 말한다(참조 죽음 I. F. 6, 7; G. 2). (434.6)
 B. 실제적 경험을 위한 의의
 부활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매일의 삶과 실제적 관련성을 지닌다. 우리는 특별히 그런 관련성을 지닌 세 가지 측면을살펴볼 것이다. (435.1)
 첫째, 그것은 신자에게 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공한다. 하나님께서는 몸의 창조자이자 구속자이신데, 이는 육체적 생명이 좋은 것임을 보여 준다. 그들 중 적어도 몇 사람은 부활의 이해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던 고린도인 교인들이 몸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역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분명 그들 중 몇은 창기와 함께 성적 타락에 탐닉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꼈으며(고전 6:16), 다른 이들은 결혼 후에도 남자가 여자에게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고전 7:1). 바울은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논박했으며, 그의 논증에서 부활의 교리를 사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몸이 선한것이라고 인정하며, 그것에 대해 죄를 범하는 것을 경고한다. 몸은 주님을 위하며, 주님은 몸을 위하신다(고전 6:13). 그것은 성령의 전이다(19절). 그리스도인은 남자나 여자 모두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20절). 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울이 하나님께서 몸을부활시키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14절). (435.2)
 만약 하나님께서 몸을 귀하게 여기셔서 그것을 회복시키고 영원을 위해 부활시키신다면, 그리스도인들 또한 그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이것은 성(性)뿐 아니라 건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간이 전인적 존재이지, 어떤 헬라 철학자들이 가르쳤던 것과 같이 빠져나갈 길을 찾고 있는 몸 안에 갇힌 영혼이 아니라는 사실은 몸에 대한 가치와 긍정적 자세를 가져야 함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생명을 긍정하고 몸을 긍정하는 소망이다(참조 건강). (435.3)
 둘째, 부활의 교리는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에 대한 적절하고 현실적인 태도를 제공한다 육체적 생명이 귀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은 자연스럽게 생명을 장려하고 죽음을 대항할 것이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문학이 묘사하는 것처럼 죽음은 친구, 삶의 자연스런 부분또는삶의 여러 단계 중하나일 뿐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에 대해 실수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죽음은 원수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패배한 원수이다. 이는우리가확신을 갖고 그것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 한시적 승리들이 지배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건강과 화평의 편에 그리고 우리가 싸우는 대적이 결국 이길 것이라고 낙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을 드높이는 모든 것의 편에 설 수 있다. (435.4)
 죽음을 포용하지도, 그 앞에서 움츠러들지도 않는 죽음에 대한 이런 현실적 관점은 그것을 패배한 원수로 여길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죽은 자들과 연결되고 소통하려는 모든 시도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인데, 그 이유는 불멸하는 영혼이 없고 죽은 자들이 무의식의 수면 상태에 있다면 그러한 가정적 소통은 모두 일종의 속임수일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적 이해는 우리가 이러한 속임수들을 피하도록 도와준다(참조 죽음 I. D). (435.5)
 마지막으로 부활의 교리는 그리스도인에게 현세에서 삶과 일에 대한 현실적 태도를 제공한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의 세계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어야 한다. 본질상 삶을 긍정하는 그들의 소망은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삶을 위해 일하게 한다. 또한 그들의 소망의 단체적인 특성은 그들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위해 일하게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명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일에 참여하고 그것을 기대하는 것임을 안다. 이것은 자신들의 노력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지막 날에 일으키실 것이라는 그들의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그의 나라를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바칠 수 있도록 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귀히 여기지만 궁극적인 것으로는 여기지 않는다. 생명은 포용하고 귀히 여길 선물이지만, 하나님과 다른 이들에 대한 책임을 어기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이기적으로 보존돼서는 안된다. (435.6)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다가오는 실재에 대한 이상은 우리가 현재에 더 구체적인 자세를 취하게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길, 곧 고난에서 영광으로 가는 길이 지시하는 방식으로 인내하며 용감하게 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봉사 그리고 그분을 위한 봉사에 자신들을 기꺼이 드리는데, 생명의 면류관이 참으로 있다는 온전한 확신 가운데서 “죽도록 충성”해야 할 때라도 그렇게 한다. (436.1)
 이것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도 옛 삶과 죽음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 가운데서 자신을 봉사에 바치는 것은 이미 생명 자체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이를 잘 요약한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4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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