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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화”(glorification)라는 단어는 예수와 신자 모두의 부활 후 상태와 경험을 가리킨다. 예수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 사이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부활의 모델 역할을 하는 “첫 열매” 또는 “첫 태생”이라는 그의 부활 후 경험으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의 표현처럼,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빌 3:20, 21) 것이다. (431.1)
 A. 예수의 영화롭게 된 상태
 부활 후 예수께서는 단순히 이전처럼 제자들과 함께 계속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으셨다. 그 대신 예수는 여러 차례 그들에게 “나타”나셨다(고전 15:5-8). 이 출현들은 종종 갑작스럽게 시작되고 끝나곤 했다. 이런 경우들은 누가가 40일로 명시한 것처럼 부활과 승천 사이의 짧은 기간에 제한되었다(행 1:3).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것을 이례적인 일로 여김으로써 그분의 출현이 매우 짧은 시간에 일어났음을 암묵적으로 지지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것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헬라어 에크트 로마[고전 15:8])에게 나타나신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에게 나타나신 일이 비록 시간적으로는 이례적인 것이었지만, 바울은 그것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간주했고, 이는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것과 견줄 수 있는 것이었다. (431.2)
 이 모든 것은 부활 전과 후의 예수의 본성에 분명한 불연속성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연속성은 예수께서 문이 닫혀있을 때 갑자기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요 20:19)과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지신 사실(눅 24:31)에서도 볼 수 있다. 영화롭게 되신 상태의 예수에게는 어떤 신비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431.3)
 그러나 복음서의 강조점은 명백히 연속성에 있으며 불연속성에 있지 않다. 누가와 요한은 특별히 부활이 실재이며 예수의 영화롭게 된 몸은 유령이나 영이 아니라 지상에서 그분이 인간으로 사셨던 삶과 연속성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다. (431.4)
 예수가 마리아를 만난 일은 그분의 목소리로도 그분을 인식할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요 20:16).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 누가는 그들의 눈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눅 24:16). 마리아는 예수를 “붙들”수 있었고(요 20:17), 도마는 그분의 상처를 볼 수 있었으며(20절) 심지어는 그의 손가락을 그분의 상처 안으로 넣으라는 허락까지 받았다(27절). 예수는 심지어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드셨다(눅 24:43). 그러나 아마도 연속성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부활하신 예수가 “영”이라는 사상을분명하게 거부하는 36-39절에서 볼 수 있다. (431.5)
 여기서 영광스럽게 된 예수께서 부활 전 과거의 자신과 연속성이 있다는 점이 뚜렷하게 선언된다. 영광스럽게 된 몸은 영이 아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알아본다. 그들은 그분을 “만질” 수 있다. 그분은 “살과 뼈”도 소유하셨다. 분명히 누가는 예수의 이러한 모습을 신자의 부활의 모델로 삼기를 의도하는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신자의 부활후상태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대단히 명시적으로 말한다. (432.1)
 B. 신자의 영화롭게 된 상태
 신자에게도 땅의 몸과 영화롭게 되고 부활한 몸 사이에 연속성과 불연속성 모두가 있다. 바울에 의하면 불연속성은 한 가지 기본적 사실로 요약될 수 있다. 즉땅의 몸은 죄와죽음의 율법에 매여 있다. 그것은 필멸적이다. 그것은 원수인 죽음을 정복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길 능력을 가지고 계시며, 부활한 몸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는 몸이며 불멸성을 부여받았다. 부활한 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은 고린도전서 15:35-50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바울의 사상을 이 본문에서 보기 전에 바울이 특정 인류학적 용어를 일반적으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432.2)
 “육”, “몸”, “영혼” 그리고 “영”이라는 네 개의 단어가 여기서 중요성을 띤다 바울은 한 번도 이 단어들이 다른 부분들로부터 분리되는 인간의 한 부분을 의미하는 것으로사용하지 않는다. 그대신각 경우에 바울은 전체 사람[전인]을 보는 관점의 다양한 표현들을 사용한다. 이 단어들은 인간존재의 여러 다른 요소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J. A. T. 로빈슨이 바의 사상에서 몸에 대한 개념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육”“몸”은 전인(全人)을 지칭할 수 있지만 그 강조점이 다르다고 한다. “육”(헬라어 사르크스)은 하나님과 대조된 사람, 곧 필멸적이고 세상에 속한 인간을 강조한다. 그것은 지구의 생명체들과 인간의 결속성을 보여 준다. 그것은 중립적이어서, 인간이 세상에서 사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죄됨을 뜻할 수도 있다(Robinson 19-25). 헤롤드 바이스(Herold Weiss 106)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한다. “육(flesh)은 남녀가 죄와 죽음이 인생 사이클의 한 부분을 이루는 생태적 체계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432.3)
 로빈슨에 따르면, “몸”(헬라어 소마)은 부활할 수 있는 인간을 강조하며 우리말의 “인격”(26-28)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두 단어를 대조한다. 사르크스가 피조물과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거리를 둔 사람을 말한다면, 소마는 피조물과의 유대관계를 가지면서 하나님을 위해 지어진 사람을 말한다”(31). (432.4)
 “영혼”(soul, 헬라어 프쉬케)은 단순히 “사람” 또는 “인간의 생명”이라는 의미로 인간 존재 전체를 가리킬 때 가장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그것 또한 특별한 강조점이 있다. H. 바이스(Weiss 106, 107)는 요약하여, “영혼”“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있는 특별한 종류의 생명을 지칭한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이 생명은 연약하여 사소한 사고에 의해서도 꺼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라고 한다. “육”이 종종 그러하듯이 “영혼”은 인간의 죄성보다는 인간의 연약성과 약점을 강조한다. (432.5)
 마지막으로 “영”(spirit, 헬라어 프뉴마)도 바울의 편지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그것은 비물질적인 것이나 비물리적인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은 인간의 생명을 말한다. “영”은 하나님이 소유한 독특한 것이고, 인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다. “육”과 대조적으로 그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생명이다. “영혼”과 대조적으로 그것은 아담의 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참여하는 생명이다. 이런 정의들을 염두에 두고서 신자들의 부활과 영광화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살펴보도록 하자. (432.6)
 바울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유비로 시작한다. 씨가 땅에 묻힌 후 죽어서 새로운 실재로 싹을 틔우는 것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죽은 후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부활의 때에 새로운 삶으로 나온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것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했다. 인간, 짐승, 새, 물고기는 각각 다른 종류의 몸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또 다른 종류의 존재를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불연속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 존재에 있어서 새로운 점은 정확히 인간의 필멸성과 연약성이라는 데 놓여있다. (433.1)
 고린도전서 15:42-49에서 바울이 대조한 점들을 보면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433.2)
구약 신약
썩을 것으로 심음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남
욕된 것으로 심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남
약한 것으로 심음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남
육의 몸으로 심음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남
흙에 속한 자와 유사함 하늘에 속한 자와 유사함
(433.3)
 이 목록에서 네 번째 대조에 대한 〈개정표준역(RSV)〉의 번역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육적인 몸”“영적인 몸”과 대조하여 마치 물질적인 몸과 비물질적인 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데, 그것은 바울의 사상이 아니다 바울은 연약한 몸을 강한 몸과 비교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하여 영화롭게 된 몸은 연약성 및 죄와 죽음에 예속된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된 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셨던 대로 살 자유가 있는 몸이다. (433.4)
 바울은 이 본문을 누가복음 24:39과 모순되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는 진술로써 마무리 짓는다. 거기서 예수께서는 그분의 부활 후의 존재가 “살과 뼈”(flesh and bone)를 지닌 존재였음을 제자들에게 증명하셨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50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flesh)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이 “육”(flesh)이라는 단어를 쓰는 특별한 방법을 기억한다면 문제는 해결된다.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그것을 부활 후의 몸의 육체적 실체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신다. 바울은 이 육체적 실체를 당연시하고 “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죄악 세상을 향한 삶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은 모순되지 않는다. (433.5)
 영광스럽게 된 몸은 부활 이전의 몸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이고, 이 세상에서 서로 알고 지냈던 다른 성도들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 4:13-18에 분명히 드러나 있는데, 여기서 바울은 그들을 부활 후에 다시 만날 것이라는 확신으로써 사랑하는 자들을 잃은 신자들을 위로한다(참조 인간론 III.C). (4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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