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본문에는 중대한 번역상의 난해함이 있고, 또한 부활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이 본문의 목적은 아니지만, 욥은 하나님의 구속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능력이 자신의 당면한 문제와 죽음 모두를 초월한다는 확신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마침내” 그의 가죽이 썩은 후에 욥은 그의 구속자를 그의 눈으로 볼 것이다(욥 19:25-27). (429.6)
 이사야 24-27장은 포로기 이전의 선지자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것보다 더욱 묵시적 형태가 기대되는 단락을 구성하고 있다. 이 단락은 야훼가 백성들의 범죄와 언약 파기 행위로 인해 지구를 파멸시키며 황폐하게 하실 것에 대한 선포로 시작한다. 그러나 멸망에 대한 선지자의 선포와 그에 대한 백성들의 슬픔의 반응 사이에서 믿음과 찬양의 표현들을 찾을 수 있다. 사실상 이 단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흩어진 백성을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앗수르와 애굽의 포로들이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에서 야훼를 경배하기 위해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으로 끝난다. (429.7)
 이 단락에서 소망의 표현들은 이사야 25:826:19에 나타난다. 전자는 야훼가 죽음을 영원히 삼키시고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야훼가 이 승리를 이루기 위해 사용하실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구체적 설명도 없다. 그러나 두 번째 구절은 죽은 의인들의 부활에 대해 언급한다. (430.1)
 이사야 26:13-15에서 백성들은 그들이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이 신들은 이제 죽었으며 다시 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그림자이다. 출생의 유비는 16-18절에서 더 깊은 비탄의 이유를 묘사한다. 백성들은 해산하는 여인과 같았으나 그 진통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다. 다시 말해, 백성들은 그들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데 아무런 영향을주지 못했다. (430.2)
 그런 다음 19절에서 분위기가 반전되는데, 19절은 14절에서 거짓 주들에게 적용된 표현을 이용하여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소망의 표현으로 돌려놓는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430.3)
 이 구절에 나타나는 여러 번역상의 문제들은 본고의 범위를 넘어간다. 예를 들어, 첫째 줄에서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들의 시체들” 대신 “나의 시체”라고 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대명사의 변경은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를 알기 어렵게 만든다. 화자는 과연 야훼인가, 선지자인가, 백성인가?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몇 가지는 분명하다. 무덤으로 내려간 “망령”[죽은 자]들은 살 것이고, 시체들은 죽음에서 일어날 것이며, 찬양과 기쁨을 발할 것이다. (430.4)
 이 모든 점에 비추어, 이 본문을 야훼에게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나 여전히 두가지 가능성은 열려 있다. 야훼에게 말하는 화자는 개인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고백하는 사람인가? “그들의 시체들”“나의 시체”의 대조는 이 견해를 지지한다. 전자는 의로운 죽은 자들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개인 화자를 말하는 것이다. 또는 이것은 국가 전체가 말하는 것일까? 그렇게 함으로써 기별이 에스겔 37장과유사하고 또 그것이 국가의 번영의 회복을 말하는 것인가? 앗수르와 애굽에서 복귀할 포로들에 대해 말하는 이사야 27장 끝부분의 최종적 약속이 이를 지지할 수 있다. 그러나 증거의 비중에 비추어 볼 때 전자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Hasel 272-276). 이 본문에 부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육체의 부활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430.5)
 우리는 여기서 구약에 나오는 개인의 부활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언급을 찾을 수 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부활, 곧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본다. (430.6)
 “많은”이라는 단어가 해석상 어려움을 야기한다. 다니엘은 부분적인 부활만을 내다보는가? 아니면 때때로 셈족 사상에서 그렇듯이 “많은”이란말이 “모든”을 가리키는 구어적 표현으로 쓰였는가? 어떤 이들에게 구약의 이사야 53:12 및 신약의 마가복음 14:24로마서 5:15 같은 본문들에서 사용하는 “많은”이라는 단어의 쓰임새를 보면, 다니엘이 부활에 대해 말할 때 모든 죽은 자를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기에는 셈족 사상에서 이 단어의 용법이 너무 광범위하다는 점이 잘 드러난다. 하젤(279-281) 같은 이들은 다니엘이 특별 부활에 대해 말한다고 주장한다. (430.7)
 엘렌 화잇(각 시대의 대쟁투, 637)은 “셋째 천사의 기별을 믿고 죽은 사람들”이 무덤에서 나와 예수를 못박은 자들과 함께 그분의 재림의 광경을 목격하는 특별 부활을 언급할 때 이 본문을 인용한다(1. A. 1과 이 논고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엘렌 화잇의 언급을 보라). 어떤 경우이든 마지막 때의 부활은 분명한 실재로 제시 된다. (430.8)
 구약에 대한 이 개괄적 연구를 통해, 신약이 부활에 대해 가르치는 것보다 구약이 덜 명시적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신약과 조화된다는 점이 드러난다. 인간의 소망은 인간 내면의 한 부분의 불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으로 회복시키고 재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431.1)
 부활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예수는 일곱 형제 가운데서 어떤 형제가 “부활 때에” 과부된 한 여인의 남편이 되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으셨다(마 22:23-29). 또한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 대한 확신을 고백했다(요 11:24). 이런 사상이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문헌에 나타나기는 하지만(참조 IV. B), 구약이 부활에 대한 믿음의 충분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다. (4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