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과 마찬가지로 베드로전서도 최소한 어느 정도의 핍박을 당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시험”(벧전 1:6)을 당해야 할 수도 있으며 “거류민과 나그네”(벧전 2:11)가 될 수도 있다. 사도는 독자들을 격려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뿐 아니라 현재를 위한 도움도 줄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면서 충성될 것을 권한다. (427.2)
 그의 인사와 짧은 축사 후에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을 받았다고 선포함으로 편지를 시작한다(벧전 1:3). 또 다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의 소망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본다. 소망 가운데 산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확신에 찬 삶, 곧 현재의 어려움들을 초월하는 삶이다. 믿음과소망은하나님 안에 있을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셨고 그분에게 “영광을 주”셨기 때문이다(21절).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부활이 가져다주는 미래에 대한 소망은 또한 현재의 삶을 확신의 새로운 삶으로 바꾼다. 그러나 이 소망은 현재를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한다. 베드로전서 3:21에 의하면, 부활은 또한 깨끗한 양심을 가질 수 있도록 힘을 준다. 이런 일은 침례를 통해서도 일어나지만, 부활은 침례에 그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했던 것과 같이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악을 정복하셨고 이제 모든 권세들이 그분께 복종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을 모든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며 그리스도의 용서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 것이다. (427.3)
 신약은 부활의 중요성,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의 관련성, 미래의 삶에 대한 소망의 견고한 실재 그리고 미래의 소망이 현재의 삶에 가져다 주는 풍성함에 대해 일관되게 묘사한다. (427.4)
 B.구약
 신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신자의 부활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시키는지를 이해한다면 구약이 부활에 대해 훨씬 덜 명시적이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을 것이다. 신약에서 신자의 부활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과 이 부활의 신학적 중요성은 모두,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드러난 것처럼 그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훨씬 함축적이며, 부활에 대한단몇 개의 구체적인 언급만 았을뿐이다. (427.5)
 1. 미래 삶에 대한 일반적 관점들
 구약의 저자들은 미래의 삶에 대한 소망의 기초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미 과거에 있었던 사건으로 가리킬 수 없다. 더군다나 구약의 “사상 세계”는 우리의 세계보다 훨씬 더 공동체 지향적이었으므로 종종 미래의 소망은 국가 또는 공동체의 미래로서 제시되었다. 이런 측면은 현대의 개인주의적인 독자들에게는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구약 세계에서 한 사람의 정체성과 운명은 공동체 안에서의 그의 참여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인간삶의 기본적 요소는 자율적 개인이다. 구약 시대의 사람에게 있어서 삶의 기본적 요소는 가족이나 부족이나 국가등 사회적 단위였다(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조사하려면 세 천사의 기별 I. A. B; 4BC 25-38을 참조하라). (427.6)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몇몇 강조점은 신약의 가르침과 중요한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가리킨다. 이것들은 선한몸, 인간 존재의 통일체성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소망등에 대한강조를 포함한다. 몸이나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을 변변찮게 보는 여러 사상의 형태와는 달리 부활의 교리는 생명과 몸을 긍정하는 관점을 제공한다. 구약은 이 관점을 일관되게 말한다. 예를들어,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을 그분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창 1:27) 그분이 만드신 것이 “아주 좋았”다고 긍정하신다(31절). 구약은 결코 몸이 없는 존재가 가능하거나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428.1)
 몸에 대한 이런 긍정적 관심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인간의 통일체성에 대한 강한 강조이다. 이 통일체적 관점은 창조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창조하셨을때 그 안에 영혼을 두지 않았고, 그 대신 육체적 몸을 생명의 숨결로 살게 하셨으며, 인간은 살아있는 영 즉통일체적인 존재가되었다(창 2:7). 인간은 생명의 숨결에 의해 살게 된 몸이다(참조 인간론 I. E. 1-3;죽음 I. A. 4). 죽음에 대한 구약의 관점은 인간에 대한 이런 통일체적인 이해에서 나온다. 그것은 조상들과 함께 잠들고(신 31:16), 구덩이나 웅덩이에 내려가고(겔 31:16; 32:24), 띠끌 가운데 눕거나(시 22:15), 대부분의 경우처럼 무덤이나 스올로 가는 것으로 죽음을 묘사한다. (428.2)
 부활 교리와 관련된 구약의 세 번째 중요한 강조점은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한 소망이다. 구약 전체에서 야훼는 생명과 소망의 근원이시다. 이스라엘은 그 자녀들에게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고 가르쳐야 한다(시 78:7). 예레미야는 야훼에 대해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오 고난당할 때의 구원자”라고 말할수 있다(렘 14:8). 하나님이 생명, 치유 그리고 회복의 근원이라고 믿는 확신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끝내기도 하시고 회복시킬 수도 있다는 확신을 포함하며, 이는 한나가 기도할 때 보여 준 것과 같다. “야훼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 (428.3)
 생명을 회복시키는 이 능력은 강한 공동체 중심의 구약적인 세계관과 일치하여 국가 전체에 종종 적용된다. 예를 들어, 에스겔 37장이 그런 경우인데, 여기서 선지자는 이상 가운데서 마른 뼈들로 가득 찬 골짜기를 본다. 그는 그것들이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처음에 그는 그 질문을 하나님께 되돌리지만, 그 후 뼈들에게 예언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렇게 할 때 큰 움직임이 있고 뼈들이 서로 모이며, 생명이 그들에게 불어넣어지고, 그들은 다시 살아 발로 서게 된다(1-10절). (428.4)
 거의 대부분의 주석들은 이 이상이 명백하게 개인의 부활을 명시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11절에 주어진 이상에 대한 설명을 보면 이 이상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적 재앙에 맞서서(바벨론 포로기) 백성들은 대중에게 이미 알려진 것으로 보이는 표현을 사용하여(참조 잠 17:22) 그들의 절망을 자신들의 뼈가 말랐다고 표현한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온 족속의 회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약속하는 이상을 통해 그 절망에 대해 응답하신다. (428.5)
 이상에 대한 해석은 에스겔 37:12-14에서 계속되지만 표현은 바뀐다. 하나님께서는 무덤들을 여시고 이스라엘을 그들의 무덤으로부터 일으키신다. 비록이 해석에 무리한 점이 없지는 않지만, 어떤 이들은 이 부분이 국가 전체의 회복 과정에서 그 국민 중 죽은 개인들의 부활로 전환되는 것이라고 본다. 에스겔 37장에 아름답게 묘사된, 국가를 회복시킬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이 확신은 무덤으로부터 돌아오는 개인들을 나타내는 은유에 기초된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사람이 죽음에서 돌아온다는 개념이 이스라엘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428.6)
 개인의 죽음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구약에서 적어도 세 번의 소생에 의해 입증된다. 이것들이 불멸성을 지닌 몸으로 일으킴을 받는 마지막 부활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개인의 생명을 죽음으로부터 회복시키실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구약의 확신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세 경우 모두 엘리야나 엘리사와 관계되어 일어난다. 첫째의 경우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다(왕상 17:17-24). 둘째의 경우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똑같은 일을 행한다(참조 왕하 4:18-37; 또한 8:1-5). 마지막으로 엘리사의 무덤에 우연히 매장된 한 남자가 선지자의 뼈와 접촉하자마자 살아난다(왕하 13:21). (429.1)
 이 간략한 개관은 소망에 대한 구약의 묘사가 구체적으로 부활을 다루고 있는 몇몇 명시적 본문에만 제한되어야 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명시적 구절들은 전체적인 그림을 이해하는 데 부가적인 도움을 준다. (429.2)
 2. 부활을 다루는 특정 본문들
 부활을 다루는 구약의 특정한 세 본문은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주지하는 대로, 욥기 19:25-27은 난해한 점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생명에 대한 확신은 분명하다. 다른 본문은 이사야 26:19다니엘 12:2이다. (429.3)
 여기서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그의 “구속자”(“혈족 구주”, 히브리어 고엘)가 되실 것이라는 욥의 확신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소망을 나타내는 이 표현은 욥이 자신의 신세를 통렬하게 한탄하는 장면을 기록한 긴 부분의 끝에 나타난다. 반복해서 그는 자신에게 재난을 가져다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지적한다(특별히 8-13절을 보라). 욥은 정의를 찾을 수 없고, 설상가상으로 그의 친구와 친지들도 그를 버렸다(13-19절). 그는 자신의 탄식이 돌로 된 책에 철필로 기록되어 결코 잊히지 않기를 기원한다(23, 24절). 그러나 25절에서 분위기가 전환되고, 욥은 그의 구속자가 그를 옹호하실 것이며 자신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확신을 고백한다. (429.4)
 구약에서 특별히 이 혈족 구주는 팔렸던 소유물을 다시 사며(레 25:25-34), 살인의 원수를 갚아주고(민 35:16-28), 상속자 없이 죽었던 이에게 상속자를 제공한다(신 25:5-10; 룻 4:1-6). 구약 전반에 걸쳐서 야훼는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혈족 구주로 드러내신다(참조 출 6:6; 시 77:15; 사 44:24). (4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