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추가적인 부활을 보는데, 둘 다 분명히 미래에 있을 것들이다 이것은 더 이상 현재의 영적 경험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미래에 무덤에 있는 자들이 나올 것이다. 요한은 두 부활의 시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구분 할 뿐이다. (424.3)
 다음 장에서도 상황은 동일한데, 6장에서 요한은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묘사한다. 요한복음 6:54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여기서 다시 현재의 실재와 미래의 소망이 나란히 놓여 있다. 자신을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자는 지금 영생을 소유한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그는 마지막 날에 일으키심을 받을 것이다. 다시 한번 미래의 소망은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관점에서 제시된다. 그러나 여기서 요한은 5장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의인이 부활할 시점을 말한다. 그것은 마지막 날에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불의한 자들의 부활에 대한 언급은 없다. (424.4)
 부활은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의 또 다른 담화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11장에서 예수는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신다. 요한 특유의 문학적 방식에 비추어, 예수의 이 말씀은 표적(sign)으로 기능하면서 그 표적을 가리키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는데, 이 경우에 그것은 나사로의 부활을 가리킨다. 예수는 나흘 후 나사로를 부활시키심으로써 그분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보여 준다. (424.5)
 여기서 요한은 자신의 독자들에게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당시 퍼져 있던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일반적 신앙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다. 마르다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이미 믿고 있다. 그녀는 오라비 나사로가 마지막 날 부활에 일어 날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한다(24절). 그러나 예수는 그녀에게 보여 줄 더 많은 뭔가를 갖고 계신다. 그녀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가 부활에 대한 그녀의 소망의 기초라는 점이며, 따라서 그분은 미래 사건에 대한 소망 이상의 것을 제시하신다. (424.6)
 예수는 그녀에게 그분의 인격적인 임재를 부활이요 생명으로 제시하신다. 부활은 단지 미래의 사건만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그것은 예수의 임재로 인해 현실화된 산 소망이다. 그리고 마르다에게 진실인 것은 모든 신자에게도 진실이다. 그 산 소망은 현재의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누구든지 살아서 그분을 믿는 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이다(26절). 그리고 비록 우리가 죽더라도 새 생명에 대한 확신이 있다(25절). 실제로 소망의 현재적 실재가 의미 있는 이유는 오직 부활에 대한 미래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의 현재적 실재는 신자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데, 그것이 미래의 소망 역시 보장하기 때문이다. (424.7)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현재와 미래적 실재의 결합을 본다 그리스도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분과 연합한 자는 이미 너무나 확연히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기 때문에 그것은 오직 영생으로 불릴수 밖에 없다. 그들은 또한 소망 가운데서 살며, 그들이 죽을지라도 마지므1 날에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을 안다. (424.8)
 물론,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독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를 하는 마지막 부분에 도달할 때 그가 5장, 6장 그리고 11장에서 말한 내용을 기억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예수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궁극적 증거는 그분 자신의 부활이다. 그러나 요한에게 예수의 영광화와 높임은 결코 부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십자가 또한 예수를 구세주로 높인다. (425.1)
 요한은 이중적 의미를 가진 단어를 가지고 언어유희를 사용함으로 이 점을 강조한다. “높이 들려”라는 문구는 십자가를 가리키는 특수한 지시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누가복음 18:14 같은 본문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상징적인 들어 올림 즉 그분의 높여지심을 말할 수 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가진 이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가 십자가에서 높임을 받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요 12:31-33). (425.2)
 요한에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두 그분의 구원하는 능력을 드러낸다. 요한은 예수의 부활을 제시할 때, 현장에 있지 않아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물리적으로 직접 보지 못했던 자들도 예수를 믿고 그분을 부활이요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불리한 입장에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다. 그의 복음서만이 도마에게 나타난 부활하신 그리스도 사건을 기술한다. 먼저 예수는 도마가 부재한 상태에서 제자들을 만나셨으며 그들에게 성령을 불어 넣으셨다(요 20:19-24). 8일 후 예수가 이번에는 도마가 있는 상황에서 다시 나타나실 때까지도 그는 이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보고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도마가 그의 믿음을 표현했을 때,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 (425.3)
 아직 보지 못한 자들이 여전히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한에 의하면, 그 이유는 믿는 것이 단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부활하시고 영광 받으신 이후 성령의 사역으로부터 이르러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예를 들면, 요 2:22; 12:16) 제자들은 예수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부활 이후에야 그들은 “기억”하며 예수가 행하신 일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여기서 기억한다는 것은 단지 생각을 되살리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예수의 삶을 신자에게 실재하는 것으로 만드는 새로운 이해이다. 그것은 약속된 성령이 기억나게 하시는 것이다(요 14:26). 성령의 이 행위를 통해서 모든 신자는 예수의 생명의 의미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며 예수를 실제로 보았고 그분과 함께 있었던 자들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 있지 않다. (425.4)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에 대한 기사는 요한의 독자들이 영생을 믿고 경험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 준다. 요한은그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우리가 본 바대로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의 현재적 경험과 부활에 대한 미래적 소망을 포함한다. (425.5)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에 비추어 모든 신자가 가지는 부활의 소망과 영생에 대한 신약의 강조를 절정으로 이끈다. 동시에 이 책은 새로운 기여를 한다. 요한계시록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 사이의 시기적 차이를 구체적으로 말하는 유일한 책이다. (425.6)
 요한은 즉각적으로 예수를 부활하신 분으로 묘사한다.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계 1:5). 이 묘사는 이 책의 첫 독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황제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이었을 버가모의 안디바는 그의 믿음으로 인해 순교를 당했다(계 2:13). 이제 그들은 예수가 단지 최초의 “충성된 증인”으로서 지금은 세상의 황제들을 다스리는 분이실 뿐 아니라, 또한 죽음에서 “먼저 나신” 분이라는 사실을 듣는다. 바꾸어 말하면, 그분은 단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을 뿐 아니라, 먼저 나신 분으로서 길을 앞서 인도하시며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위해 부활의 소망을 확증하는 분이기도 하다. 요한계시록 1:18에서 요한은 예수가 죽었다가 이제 영원히 사시는 분으로서 천국과 지옥(무덤, 또는 죽은 자들의 장소)의 열쇠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선포함으로써 이 점을 다시 강조한다. 그는 단지 죽음을 이겼을 뿐 아니라 죽음에 대한 그의 승리를 다른 이들에게 제시하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훼방할 수 없는 세상의 황제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425.7)
 이 점은 요한계시록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예를 들면, 서머나 교회는 핍박받을 것과 몇몇이 투옥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지만, 또한 죽기까지 충성한 자는 그리스도의 면류관, 곧 생명 자체를 얻게 될 것도 약속 받는다(계 2:10). 이러한 이유로 요한은 신자들에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순교할 때 그것을 패배가 아닌 승리로 간주하라고 격려한다. 마귀는 그의 가장 잔혹한 무기인 죽음을 사용해 믿음을 제압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죽음조차도 충성된 자를 설득하는데 부족하며,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그들은 승리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2:11에서 요한은 충성된 자들에 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마귀이고 사탄임(9절)]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426.1)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는 20장21장에서 종결된다. 20장에서 죽음과 지옥은 불못에 던져지고 파괴된다. 죽음은 더 이상 권세를 얻지 못한다. 21장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간(4절; 참조 새 땅 II. B. 3) 새 하늘과 새 땅을 함께 나눈다. (426.2)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 사이의 시간은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사탄이 결박되어 있는 천년기로 규정된다. 이 시기의 시작점에서 의인이 부활하여(4절) 그리스도와 함께 1,000년 동안 통치한다. 5절의 전반부는 삽입구로서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라고 선언한다. “나머지 죽은 자들”은 악한 자들일 것인데, 4절이 이미 의로운 자들에 대해 말했기 때문이다. 5절의 삽입구 이후 요한은 4절의 사상의 흐름을 유지하면서 “이는 첫째 부활이라.”라고 덧붙인다. “첫째 부활”에 대한 언급이 다시 4절을 가리키며 의인의 부활을 말한다는 점은 6절의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 요한은 이 부활에 동참하는 자들이 “복된” 자들이며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1,000년 동안 다스릴 것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의인의 “첫째” 부활이 1,000년의 시초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동참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통치한다(참조천년기1. C. 1-3). (426.3)
 악한 자들의 부활은 “나머지 죽은 자들”이 살아날 때인 1, 000년 후에 일어난다. 이 부활에 대한 세부 사항은 주어져 있지 않지만 7-10절에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데, 그 이유는 사탄이 옥에서 놓이는 잠깐 동안 악한 자들을 모아서 거룩한 도성을 포위하려 할 때 악인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 시도는 요한이 말하는 “둘째 사망”(14절)으로 실패하는데, 이때 마귀, 악한 자들(15절에 의하면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들) 그리고 죽음 자체가 불못에서 소멸된다. (426.4)
 d. 기타 신약의 글들
 히브리서는 부활을 수용하며 신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과 그것이 그리스도인 삶에 지니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히 6:1, 2)에 포함되며, 책의 독자들은 이제 이것 이상으로 전진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부활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426.5)
 그 중요성은 특별히 믿음의 위대한 증인들을 제시하는 11장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믿음의 중요한부분은 죽은 자들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이다. 저자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삭을 기꺼이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자발성을 이러한 종류의 믿음으로 해석한다. 그는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수 있는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충성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19절). 부활에 대한 믿음은 예전의 충성된 여인들이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 들이기도” 했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부각된다(35절;아마도 왕하 4:8-37에 기록된 사건을 가리킬 것임).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저자에게 있어서 그토록 중요한 “믿음”은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포함한다. (4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