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에 대한 바울의 관점을 연구할 때 그 주제를 상세하게 다루는 소수의 본문에만 제한하면 바울 사상의 풍부함을 많이 놓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언급은 그의 서신들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이런 언급들에서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등장한다. (421.4)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함께 참여한다는 개념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신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역사적 사건들 이상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그분 및 그분의 사명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기꺼이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그고난에 참여함을알고자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10, 11절). 그는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을 분명히 하지만, 그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421.5)
 이 주제는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바울의 논의에 생생하게 나타난다. 거기서 바울은 침례의 예증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므로 계속해서 죄를 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한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와 침례로 하나 되는 경험은 죄를 경홀히 여기는 모든 태도를 배제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5-11). (421.6)
 두 번째 중요한 주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부활에서 드러난 생명의 새로움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바울은 몸의 실재적 부활이 아직은 아니며(not yet) 미래의 재림 때에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지만(참조 빌 3:12; 고전 15:52; 살전4:16; 딤후 2:18), 부활에는 이미(already)의 요소도 있다. 이미 신자는 로마서 6:5, 6, 11에서 본 것과 같이 생명의 새로움을 나눈다 이 주제는 에베소서 2:3-7에 다시 나타나는데, 거기서 바울은 한때는 죄 가운데 있었으나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심을 받은 이방인들에게 말하고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그리스도인의 현재적 경험을 말하는 놀라운 은유이다. 그러나 여기서조차 바울은 현재를 넘어서 그리스도께서 장차 다가 올 세대에 하실 일을 가리킨다(7절). 그는 고린도후서 5:15에서 생명의 새로움은 존재의 새로운 중심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이 새로운 생명을 추가적으로 정의한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가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422.1)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그분께 참여한다는 것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현재의 새로운 생명을 포함하며, 삶의 새로운 초점과 목적 및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산 신자들이 불멸의 생명으로 변화되는 미래에만 실현될 수 있는 소망도 포함한다. (422.2)
 b. 공관복음과 사도행전
 복음서의 특성상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가르침은 바울의 글에서보다 덜 명시적이다. 복음서에서 부활에 대한 주요 초점은 예수의 부활 이야기이다. 누가복음-사도행전에 공관복음 중 유일하게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모든 복음서 저자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예수의 부활을 신자에게 생명을 수여할 수 있는 그분의 능력과 관련짓는다. (422.3)
 마태복음에서는 부활이 미리 예언되고(마 16:21; 26:32) 사건 발생 이후 여자들에게 선포되었을 뿐 아니라(마 28:6), 부활하신 예수가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그들에게 복음 대사명을 주기까지 하신다(16-20절). (422.4)
 마태만 기록하고 있는 한 사건에서 예수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의 관계가 특별히 강조된다. 마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2, 53). 이 성도들이 누구인지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또한 그분의 부활이 신자들도 무덤에서 나올 “성도들” 중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해 주는 산 증거가 되었다. (422.5)
 필사본들은 마가복음의 결론부(막 16:9-20)와 관련하여 다른 점을 보여 준다. 이 본문의 필사상의 이문(異文)들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든 예수의 부활은 여전히 명백하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자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422.6)
 마가는 고난 받는 종인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참된 제자도의 본질임을 보여 준다. 마가의 신학적 핵심은 8-10장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서 예수는 그분의 죽음을 세 차례에 걸쳐 예고하시며 제자들을 종으로 초청하신다. 이 예고들 각각은 예수가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단언을 포함한다(막 8:31; 9:31; 10:34). 부활에 관한 이 예고는 예수가 이어서 제자도와 생명의 약속으로 부르시는 일에 의미를 부여한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에서 우리는 예수의 부활과 신자의 생명에 대한 소망 사이의 관련성을 발견한다. (422.7)
 동일한 관련성이 마가복음 5장에서 예수가 죽은자를 일으키심으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실 때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웃는데, 그녀가 분명히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녀를 생명으로 일으킬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죽음에서 부활하시는 분으로서의 예수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시는 분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모습은 천사가 무덤으로 온 여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때 확인된다.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막 16:6). (423.1)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무덤 앞에 있던 천사들이 예수의 부활을 알린 것에 대해 기록한다(눅 24:4-7). 그는 또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13-32절) 그리고 다락방의 제자들에게(33-43절) 나타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목한다. 누가는 더 나아가 신자의 부활에 대해서도 말한다. 부활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사도행전에도 나타난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행한 일에 대한 상급은 부활 때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누가는 기록한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눅 14:13, 14). (423.2)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이 부활에 불의한 자들도 포함될 것이라고 선포하는 바울의 언급들 중 하나를 인용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행 24:14, 15). 또한 누가는 바울이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신 첫 번째 분이심을 강조함으로써 신자들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시키려는 모습을 그린다(행 26:23). (423.3)
 c. 요한의 글들
 요한이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전달하기 위해 복음서에서 사용하는 핵심적 표현은 “생명” 또는 “영생”이다. C. H. 도드(C.H. Dodd)를 따르는 많은 이들이 요한의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라는 주제를 강조해 왔는데, 그것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영생을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제가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한에게 있어서 영생에 대한 현재적 실재 즉 “이미”(already)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이란 말로 정의된 미래적 소망의 실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423.4)
 실현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의 평행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 주고, 또 신자의 부활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가장 잘 설명하는 본문 중 하나는 요한복음 5:19-29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이 본문에는 적어도 세 가지 다른부활이 언급된다. (423.5)
 첫째는 신자가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생명의 영적 소생이다. 이것은 분명 24절과 25절의 핵심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423.6)
 ‘이때’라는 시간이 이 부활을 가리키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강조는 바울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사상은 비슷하다. 바울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에 대해 말하였고(롬 6:4), 요한은 영생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둘 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가 경험하는 새 생명이라는 의미 있는 실재를 가리키며, 이 경험은 너무도 압도적인 것이어서 종말론적인 용어로밖에 정의할 수 없는 경험이다. (424.1)
 요한은 더 나아가 다가을 미래의 때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이를놀랍게 여기지 말라무덤 속에 있는자가 다 그의 음성을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 29). (4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