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개별 저자들
 a. 바울
 바울이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서는 적은 지면만을 할애하지만,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바울의 서신들 가운데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주제들이다. 바울이 신자들에게 “첫째로 중요한” 것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 보이시고”(고전 15:3-5)라는 구절이다. 특이하게도 바울은 부활에 대해 말할 때 수동태를 사용한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키심을 받았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대한 아래의 전체적인 설명은 영생에 대한 모든 소망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되어 있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418.10)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첫 번째 주요한 논의는 현존하는 그의 서신 중 첫 번째 것에 나와 있는데, 데살로니가전서 4:13-18이다. 여기서 그가 그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죽은 자들에 대해 슬퍼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오해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사랑하는 죽은 자들의 운명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바울은 그들이 소망 없는 자들처럼 슬퍼하지 말고 그들의 주의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그때에 있을 죽은 자들의 부활로 돌리라고 역설함으로써 그들에게 답한다. 그는 사랑하는 죽은 자들이 살아 있다거나 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그들의 현재 상태가 잠자는 상태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주님은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 및 하나님의 나팔과 더불어 강림하실 것이다.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은 자들을 앞서지 못할 것이다. 먼저 후자가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고 그런 후 살아 있는 자들이 그들과 함께 공중으로 끌어올려 거기서 주를 만나 그분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산 자들뿐 아니라 죽은 자들을 위한 미래의 소망도 분명하게 세운다. (418.11)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14절)는 구절의 의미도 논란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에서 영혼 불멸에 대한 지지를 발견했는데, 하나님께서 재림 시에 하늘에서 영혼들을 데리고 오셔서 부활 시에 그 육신들과 재결합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고 간주한다. (419.1)
 몇 가지 중요한 고려 사항이 이를 반대한다. 첫째는 문맥이다. 여기에는 영혼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 본문 전체는 부활 및 “자는 자들”을 부활 시에 일어나라고 부르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여기에는 육신과 영혼을 재결합하는 것에 대한 말이 없다. (419.2)
 둘째는 이 본문 자체에 들어있는 대구법이다. 본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셨음을 믿기 때문에, 같은 방식으로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은 잠든 자들을 그분과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를 통해서”라는 표현이 “잠든 자들”과 함께 연결되어 이해되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어려운 표현을 어느 위치에 두어도, 문장의 첫 부분과 함께 이해되는 대구법은 “그분과 함께”가 예수 자신이 죽었으나 다시 일어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부활을 통해 이 죽은 신자들을 생명으로 데리고 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것은 “같은 방식으로”에 대한 거의 확실한 해석인데, 그것이 문장의 두부분들을 연결하는 역할을한다. 그러므로 문맥과 구문 모두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는 표현이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에 생명으로 데리고 오신 것처럼 그분께서 성도들을 예수와 함께 생명으로 데리고 오신다는 의미임을 지지한다. (419.3)
 마지막 고려 사항은 고린도후서 4:14에 어느 정도 유사한 진술이 나온다는 것이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함께”)이라는 전치사가 두 본문 모두에서 사용되는데, 이는 문맥과 구문 모두에서 도출된 내용, 즉 예수와 함께 잠든 자들을 데리고 온다는 말이 그들을 예수와 함께 생명으로 데리고 오는 것을 가리킨다는 논증을 지지한다. (419.4)
 그래서 이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소광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해 있음을 가르친다. 그분께서 다시 일어나신 것처럼 하나님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실 것이다. 이것은 재림 시에 일어날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자들이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기 위해 그들을공중에서 만나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다. (419.5)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을 부정하는 어떤 이들의 오해뿐 아니라 잘못된 가르침에 대응한다. 이것은 신약에서 부활에 대해 말하는 가장 포괄적인 본문이다. (419.6)
 다른 한편 바울은 신자들의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토대 위에 확고하게 세우고 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재확인함으로써 진술을 시작한다(3, 4절). 그런 다음, 그는 게바와 열 두 제자 그리고 단번에 500명 이상의 형제들에게, 야고보와 모든 사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에게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출현하셨음을 고린도신자들에게 상기 시키는데,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에게 나타나신 것은 나머지 경우와 달리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5-8절). 다시 말해,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겪은 경험에서 그가 사실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으며 그리하여 자신도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419.7)
 12-19절에서 바울은 논란의 핵심에 다가선다. 어떤 이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상을 부추긴 것이 무엇인지 지목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후의 영지주의적인 이설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사상과 유사한 요소들이 고린도교회에 존재했다는 점은 최소한 일단의 고린도 교인들이 이 이설의 초기 형태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바울의 반응은 믿을수 없을 만큼 놀랍다는 식이다. 그리스도를 부활하신 분으로 전했는데, 그들이 어떻게 부활이 없다고말할수 있는가? 이 성경 구절들을 보면,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 및 의미심장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하나의 중요한 패키지임이 분명해진다. 이 패키지 가운데서 한 부분이라도 제거하면 전체를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부활이 없는 설교는 공허하고 믿음도 헛되며, 바울은 하나님을 잘못 드러내는 것이고, 또한 신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죄 가운데 있고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들이 될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강한 어조이지만 바울은 각각의 요소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419.8)
 20절에서 바울은 이전 문단에 나오는 ‘만약’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죽음에서 일으킴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그런 다음 그는 이것이 고립된 행위가 아니라 부활에 대한 신자들의 소망과 연결된다고 역설한다. 그리스도를 “첫 열매”로 말하는데, 이는 구약의 절기들로부터 도출된 유비이다. 그분의 부활은 아직 더 많은 것이 이르러 올 것이라는 보증이다.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유비에 대해 말한다. 죽음은 아담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으로 이르러 왔다. 이제 생명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르러 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까지 포함하는 모든 능력과 권세에 대한 그분의 승리를 드러낸다. 신약에서 사용된 전형적인 형식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이 신학적으로 연결된다. (420.1)
 29-34절에서 바울은 12-19절의 주제로 되돌아가 부활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거부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한다. 부활이 없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위해 침례를 받는가?(불행히도 이 사람들과 그들의 관습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또한 부활이 없다면 왜 바울은 매일 죽음에 직면 해야하는가? (420.2)
 다음으로 사도는 독자들이 제기할 수 있는 반론을 상정하여 죽은 이들이 어떻게 부활하며 부활한 그들이 어떤 몸을 가질 것인지에 대한 의문에 답한다. 이 부분(35-50절)은 아래의 영광화에 관한 논의에서 다뤄질 것이므로 여기서는 바울이 부활은 단지 시신의 소생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고 말했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더 이상 죽음에 매이지 않을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포함한다. 바울은 이것을 “신령한” 몸이라고 일컫는다. (420.3)
 마지막으로 바울의 관심은 “마지막 나팔”(52절)로 지칭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향한다. 거의 시적인 형태를 사용하여 그는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에 길을 내어줄 때 일어날 순간적인 변화로 독자들의 관심을 돌린다. 그때에 죽은 자들이 일으킴을 받고 또한 그들이 산 자들과 더불어 불멸의 몸으로 변화될 때, 죽음은 승리 안에서 삼켜진바 될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이것을 이해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사역에 끊임없이 헌신하게 될 것인데,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58절). (420.4)
 이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그리스도인 신앙의 절대적인 요소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이 없다면 그리스도인 신앙은 공허한 것이다. 또한 그는 신학적으로 이 두 가지 부활을 연결시키려 하고, 또한 예수의 부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목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그는 부활한 몸이 더 이상죽음에 예속되지 않는, 영화롭게 된 새로운 몸이며, 또한 이 일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이며 그때에 살아있는 의인들도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될 것임을 보여 준다. (420.5)
 고린도후서 5:1-5고린도전서 15장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부활”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진 않았지만 이 본문의 신비스러운 특징으로 보아 여기에 부활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현재 우리의 존재를 가리키는 “땅에 있는 장막”을 손으로 짓지 않은 “하나님의 지으신 집”, 곧 우리의 장래 소망과 비교한다. (421.1)
 어떤 이들은 여기서 바울이 몸을 땅의 장막, 곧 불멸하는 영혼이 거하는 일시적인 그릇이라고 명명함으로써 영혼불멸 사상을 지지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본문을 주의 깊게 분석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바울은 어디에서도 몸과 분리된 영혼이나 어떤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인간을 두부분으로 나눈다는 사상을 지지하는 어떤 실마리도 없다. 대신 바울은 땅의 장막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어도, 그것이 영혼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땅의 장막이 없을 경우 일어날 일에 대한 비유로 벌거벗음을 예로 든다. 그는 이런 상태를 원하지 않는다 만약 바울에게 있어서 중간 상태가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의식을 가진 채 존재하는 것이었다면, 그가 그것을 거부할 리가 없다. 그러나 바울은 벌거벗겨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더욱 덧입기를 원하는데, 이를 썩을 것이 생명에 삼켜진바 될 때 일어나는 일과 같은 것으로 본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에 나팔소리와 함께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에 길을 내주는 고린도전서 15장의 후반부에서 말하는 소망과 평행을 이루는 것임이 분명하다. (421.2)
 그러므로 바울이 “부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15절에서 구체적으로 부활에 대해 언급한 점을 미루어보아 그가 여기서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현재의 필멸적 상태는 땅의 장막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안전하지 않다. 이 은유의 대상은 사람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인으로서의 사람이다 바울은 죽음을 열망하지 않는데, 그는 그것을 벌거벗음과 비교한다. 그 대신 그는 하나님이 지으신 집과 비교되는 새롭고 불멸하는 존재로 변화됨으로써 더욱 덧입혀지기를 바란다. 이 새로운 상태는 그분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며, 그러한 소망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 그분의 성령을 보증 또는 일종의 선금으로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과 고린도전서 15장의 사상 사이에 상당한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참조 죽음 I. E. 2). (4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