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그의 인격 및 사역”1에 관한 그리스도론의 주제는 수많은 신학적 논쟁의 중심이 되어 왔다. 가장 위험한 이설과 극적인 분파 운동의 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29.1)
 신앙이 헬레니즘화되고 이단적 교리들의 발생으로 말미암아 사도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문제를 갖고 대처하였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엄격한 언어의 의미를 지닌 그리스도론,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명확한 교리상의 그리스도론이 생겨나게 되었다.”2 (29.2)
 오늘날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문제는 그리스도교회의 하나의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으며, 여러 교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애쓰고 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논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이해뿐 아니라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진리”(엡 4:21) 를 추구할 때, 우리 각 사람에게 기대되는 삶의 방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29.3)
 초기 이설들에 당면한 사도들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 제기된 의문은 ‘그의 본성이 무엇이었나?’보다는 ‘그가 누구인가?’에 있었다는 것을 살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29.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대답하기를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 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그가 질문하셨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3~16)라고 시몬 베드로는 대답하였다. 그레꼬—라틴 세계의 복음화 사업이 진행되면서 그 문제는 이미 예수가 누구인가의 단순한 지적 문제의 한계를 넘어섰다. 이제 그 질문은 바뀌었다. 곧 예수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였는가? 그는 참으로 하나님이셨는가? 아니면 단순히 사람이었는가? 만일 양쪽 모두였다면 그의 인성과 신성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설들에 직면했던 교회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해답을 찾아야 했다. 그분의 신성과 인성 문제에 대한 해답에서 거짓 교리에 대해 제일 먼저 책망한 사람은 바울과 요한이었다.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동등하심을 강조한 후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빌 2:7~8)라고 말한다. 또한 로마서에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롬 8:3)셨다고 기록하고 골로새서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1:15; 2:9)라 하였다. 더욱이, 요한은 그의 복음서 가운데 “말씀이 하나님이”셨으며, “말씀이 육신이 되”(요 1:1, 14)었다고 강조해 말한다. 그 다음 영지주의 이단적 주장에 부딪친 그는 교회에게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을 대적하도록 경고할 필요가 있다고 결단을 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요일 4:2, 3)라고 하였다. (30.1)
 역사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론
 이미 2세기 초부터 사도들의 계승자들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특히 그의 인성을 다루는 논쟁에 끊임없이 휘말려들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 주의의 발생에 대항하여 니케아 종교 회의(AD 325)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함으로 그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두 본성 곧 인성과 신성 문제는 칼케돈 종교회의(AD 451)에서 확정되기까지 남아 있었는데, 이 교리는 가톨릭교회의 신앙 고백서가 되기에 이르렀다. 종교 개혁자들이 그리스도론의 혁신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론보다는 믿음과 칭의의 본질에 관한 문제들에 더 관심이 많았다. 대체적으로 종교 개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함께 한 인격체와 이중적 본성의 기본 교리를 받아들였다.”3 다만 스위스에 살던 프랑스어권의 소수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두 개의 본성 교리”4를 결국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31.1)
 그러나 20세기의 여러 신학자들이 그들의 발자취를 따랐다. 예를 들면,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두 본성’에 관한 논의는 궁극적으로 헬라 사상적인 문제이지 유대적이거나 성경상의 문제는 아니다”5라고 했다. 에밀 부르너(Emil Brunner)는 “두 본성 문제 때문에 제기되는 복잡한 문제들은 잘못 제기되는 질문의 결과이며,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알고자 하는 데서, 다시 말해, 어떻게 신성과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체 안에 연합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6라고 설명한다. (31.2)
 이 신학자들의 칼케돈 교리로부터의 주목할 만한 이탈은 그리스도론의 새로운 추세 속에 뿌리잡고 있다. 오늘날 가톨릭이나 개신교회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연구가 인성에 관한 의미심장한 연구로부터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다고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현대 그리스도론의 한 특질은 인간학과 더욱 밀접하게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31.3)
 이 새로운 상호 관련성은, 매우 자연스럽게, 어떤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더 깊이 연구하도록 유도한다. (31.4)
 인자가 인성을 취하셨다는 개념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인성을 취하셨느냐 하는 것인데 즉, 타락의 영향을 입은 인성인가 아니면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의 인성인가 다른 말로 하면 아담의 타락 전 인성인가, 혹은 타락 후 인성인가? 하는 것이다. (32.1)
 현대 그리스도론
 과거 여러 세기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은 타락 후의 아담의 인성과 동일한 것이었다고 감히 말하는 것이 중대한 이설로 간주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 질문은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음을 인정한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 발트(Karl Barth),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루돌프 볼트만(Rudolf Bultmann),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로빈슨 (J.. A. T. Robinson) 및 20세기 후반의 가장 유명한 신학자들이 타락에 의해 영향을 입은 예수님의 인성을 공공연하게 지지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32.2)
 칼 발트(저 유명한 <로마서 주석>의 저자이며 20세기 최고의 신학자:역자 주)는 1934년에 출판된 기사를 통해 이런 해석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 첫 번째 사람이다.8 그런데 가장 이해하기 쉬운 그의 변증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9이라는 제목하에 설명된 그의 교리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하나님이셨음을 분명하게 인정한 다음 그는 어떻게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지에 대해 깊은 변증을 한다. 그에게는 예수의 죄 있는 인성에 관한한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가장 분명하게 말하기를 “예수님은 죄 있는 인간이 아니셨다. 그러나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그의 상태는 죄 된 인간의 상태와 동일하였다. 그는 아담이 행한 것처럼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담의 행동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원리와 여건 하에서 취해야 할 형태의 삶을 사셨다. 그분은 아담과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가 정죄 된 그 죄를 짊어지셨다. 그분은 우리 망각의 존재와 결속하고 필요한 연합을 하려고 스스로 우리 속으로 들어오셨다.” (32.3)
 “오직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고 그분과 우리 사이 의 화목이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10 (33.1)
 발트는 바울 편지서와 히브리서의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여 자기의 결론을 합리화시킨 다음에 부가하기를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취하신 본성이 우리가 타락한 자의 시각하에서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본성과 동일하다는 구원의 진리를 약화시키거나 애매모호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참으로 우리와 같아 질 수 있는가? 우리와 그분과 무슨 상관이 있게 되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타락으로 인해 특징지어진 상태로 선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을 뿐 아니라 그분이 우리 인성의 확고한 형태 속으로 들어오셨으며 그 상황 하에서 우리는 정죄되고 상실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그분은 이 형태를 우리와 다르게 만들거나 세우지 않으셨다. 비록 죄가 없으셨지만 죄가 되셨고 또한 정죄되셨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과의 완전한 결속에서 떨어지게 한다거나 그러한 방법으로부터 그분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게 해 서는 안 된다.”11 (33.2)
 에밀 부르너는 그의 교리서 가운데서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는 주저 없이 말하기를 “그분이 우리와 똑같이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가 진정으로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12고 했다. 그는 다시 확증한다. “그렇지만 예수가 참으로 우리 자신과 같은 한 사람이었는가? 그래서 죄 있는 사람이었는가?” 그 해답은 성경에 나온다. “사도 바울이 예수의 참인간성을 말할 때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롬 8:3)라고 말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히브리서는 첨가하여 말한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13 부르너는 “그가 우리와 같은 사람”임을 동의하는 한편, “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14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33.3)
 동일한 성경절을 가지고, 불트만과 쿨만은 완전히 의견을 같이 한다. 빌립보서 2장 5~8절에 관한 그의 주석에서 쿨만은 기록하기를 ‘종의 형체를 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의 형 영향을 받은 한 사람의 형체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고 했다. 이것이 ‘사람의 형상과 같이(Likeness)된다’(7절)는 표현의 의미이다. 호모이오마티(Homoiomati)의 이 의미는 완벽하게 정당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역자 주:HomoiomatiLikeness의 원어로 HomosexHomo처럼 ‘같다’는 뜻) 더욱더 다음 구절은 성육신하심으로 ‘사람’이신 예수는 ‘사람들’의 조건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본질상 유일한 신—인(the only God—man)이셨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그의 구속 사업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죄 있는 육신으로 성육신하신 사람(a Man)이 되셨다.”15 (34.1)
 영국 성공회 감독인 J.A.T. 로빈슨의 견해를 여기에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그는 바울 신학 가운데 “몸(body)”에 대한 의미를 연구하면서 예수의 인성에 관해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그는 기록하기를, “구속의 드라마 가운데 제1막은 하나님의 아들이 죄는 없지만 타락한 상태의 육신의 몸(body)으로 오셨다는 것이다.”16 (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