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4 장 재림소망의 확실성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자들과 함께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계 6:10) 라며 분명히 부르짖고 있었다. 파루시아 때에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는(계 7:9) 묵시의 광경은 존귀를 입은 고령의 요한에게 고난을 참도록 하는 힘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계 16:14) 의가 옹호되고, 불의가 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70.6)
 결론
 탁월한 교훈.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시 오신다는 신앙은 신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많은 말씀과 긴 두 설교, 그리고 자신의 영광스러운 재강림을 다루는 그리스도의 많은 비유들을 찾아보았다. 이러한 언급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미래의 강림을 영광스럽고, 가시적이며, 임박해 있으며, 갑작스러우며 또 친히 오시는 것으로 제시한다. (70.7)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목적은 우주적으로 자신의 사업을 옹호하고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을 모아, 영원한 나라로 영입(迎入)하며, 또 죄와 악인을 멸망시키고 새 세상 질서를 세우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반복해서 하시는 말씀의 요지는 그의 오심을 위해서 끊임없이 준비하라는 것이다. 이 준비는 영적인 준비와 불쌍한 자를 위한 사회적인 준비를 포함하고 있다. (70.8)
 다양한 명칭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의 근본적인 중요성이 베드로, 바울, 야고보, 요한 같은 신약 저자들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 우리는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재강림에 대한 확실성을 반복해서 담대히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건은 구원의 날, 심판의 날, 개인적 강림의 날(파루시아), 악인의 끔찍한 멸망과 신자들의 생생한 변화를 경험하는 날 등 다양한 방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71.1)
 번개, 구름, 나팔, 예리한 낫, 추수 그리고 말탄 정복자와 같은 다양한 표현이 그리스도의 걍림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암시적인 상징들은 재림의 독특하고 비교할 수 없는 특징을 가리키는데, 그 사건은 결코 인간에 의해 목격된 적 없기에 인간의 어떤 유추(類推)도 초월하는 사건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와 신약 저자들이 파루시아에 대해 어떻게(how) 보다는 왜(why)에 더 많이 강조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 같다(역자주: 재림의 모습이나 방법 보다는 재림의 이유를 더 강조함을 말함.) (71.2)
 구속의 완성.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가 신약에서 강조된 것은 자신의 성육 신에서 시작된 구속 사업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초림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목적을 나타내셨다. 재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완성하실 것이다. (71.3)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은 사단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하여 마귀의 지배로부터 남녀를 구출하셨고, 그들을 자신의 통치 하에 들어오게 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모든 형태의 악과 사망을 완전하고도 영원히 파멸시키고 신자들을 부활시켜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자신의 영광스런 파루시아 때이다. (71.4)
 역사의 목표. 인자의 강림은 신약 성경에서는 현재의 역사적인 질서의 절정과 전환점을 나타내는 사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사랑과 공의가 지배하고 그분의 영원한 통치가 있을 새 질서를 세울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 속에 최종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71.5)
 신약은 재림을 진정한(real) 구세주와 구원받은 진정한 무리들 사이의 진정한 재연합이 있게 될 구체적이고도 참된 사건으로 보고 있다. 이 때에, 지금은 볼 수 없고 단지 믿음으로만 시인하던 그리스도의 주권이 가시적이고 공적이며 승리의 표명으로 이 세상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71.6)
 이러한 재림소망의 확실성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인간의 통찰력이나 소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속과 자기 백성을 위해 하늘 성소에서 수행하시는 현재의 봉사와 그리고 신자들의 생애에서 맛보는 그분의 능력과 은혜의 경험 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복스러운 소망은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덕적이고 역동적인 생애를 위한 위안과 동기가 되었으며 또 현시대의 불확실함과 고통 가운데서 살아야 하는 신자들에게 오늘날도 여전히 용기와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71.7)
 각주
 1. 모우레(C. F. D. Moule)는 복음서 기자의 의도는 “예수의 봉사에서 일어났던 분명한 이야기”를 확실히 복음적인 목적을 위해 기록하는 것이었다고 강조한다(“The Intention of the Evangelists,” in New Testament Essays, ed. A. J. B. Higgins 〔Grand Rapids, 1959〕, p. 176).

 2. 본장에서 토론되지 않은 나머지 다른 재림에 대한 귀절들은 마 19:28; 눅 17:22; 마 10:23; 눅 18:18에 나타난다.

 3. 다양한 견해들의 짧막한 토론을 위해서는 래드(George Eldon Ladd)의 신약 신학(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1974〕. pp. 197~198)을 참조하라

 4. 이 견해는 크랜필드〔C. E. B. Cranfield〕에 의해 “St. Mark 13” Scottist Jourmal of Theology 6(1953):297~300에서 전개되었다.

 5. Ralph Earle,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Second Coming (Grand Rapids, 1973), p. 27.

 6. 고전 15:23; 살전 2:19; 3:13; 4:15; 5:23; 살후 2:1, 8.

 7. 살후 2:8; 딤전 6:14; 딤후 4:1, 8; 딛 2:13.

 8. 바울은 또한 신의 현현에 대한 구약 언어에 영향을 분명히 받았다. 구약은 하나님에서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심판을 베풀고 그의 왕국을 건설한 그날을 기대하고 있다(사 2:12~22; 26:31; 35:4; 40:10; 슥 14:5)

 9. 밑줄친 부분 강조.

 10. 밑줄친 부분 강조.

 11. 밑줄친 부분 강조.

 12. 계 4:8; 6:10, 17; 11:15; 14:14; 16:15, 20; 19:7, 17; 21:11, 21; 22:7, 17. (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