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4 장 재림소망의 확실성
 기롱하는 자들. 재림은 역시 베드로에게 있어서 의인을 위하여 “권고하시는 날”(벧전 2:12)이요 “심판의 날”(벧후 2:9)이다.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파루시아의 사상에 대해 비웃고 조롱하여 말하기를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같이 그냥 있다”(벧후 3:4)고 한다. 이 질문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기대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을 뿐만 아니라 조롱하는 자들에 의해 비웃음을 받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오늘날 “만물이 창조될 때와같이 그냥 있다”라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는 진화론의 결과 때문에, 조롱하는 자들이 수적으로 증가되고 또 위세를 떨치고 있다. (63.3)
 베드로는 먼저 조롱하는 자들에게 이 땅이 홍수로 한 번 멸망당한 것과 “심판의 날”(벧후 3:7)에는 불에 의해 최종적으로 더욱 끔찍하게 파괴될 것을 상기시켜 응수한다. 두번째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다르게 시간을 계산하신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8절). (63.4)
 어떤 사람에게는 파루시아의 지연이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구원의 목적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즉 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더 많은 시간과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정한 때가 이르면 그리스도께서는 밤에 도적처럼 갑자기 오실 것이다(벧후 3:10). (63.5)
 심판날의 기능. 베드로는 심판날의 두 기능, 즉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벧후 3:7)과 현재의 타락한 질서에서의 회복(벧후 3:10)을 강조한다. 베드로후서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범죄한 천사를 용서하지 않으셨고, 노아의 때에 타락했던 고대 세계를 용서하지 않으셨고 악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재가 되게 하셨다면, 그분께서는 분명히 심판날에 불의한 사람 역시 멸망시키실 것이다(벧후 2:4~10, 3:7, 10 참조). (63.6)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현재의 세계를 완전히 변형시켜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한 변형은 전적으로 부패한 이 지구를 깨끗이 하여 결과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되게 하는 것이다(벧후 3:10, 12, 13).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묘사는 매우 극적이다.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64.1)
 어떤 이들은 이 대격변에 대한 묘사를 시적(詩的)인 공상이나 묵시적 상상의 부산물로 돌려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핵(核) 시대에 그러한 묘사가 매우 실제적으로 성취될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존 질서가 완전히 파괴되는 것은 끝이 아니며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의 시작이다. (64.2)
 이 새 세상에 대한 소망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자극을 준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1, 12, 14). (64.3)
 구원과 파멸과 회복의 약속인 재림의 소망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미래에 대한 기대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생애를 살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현재의 능력도 된다. 우리의 가치관과 결심, 그리고 소망과 우선권에 대한 내용은 16장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64.4)
 제 3 부 바울의 증언
 구세주의 임박한 강림에 대한 소망은 바울의 생애와 사상의 중심이 되었다. 이것은 재림에 대하여 빈번하고도 생생하게 말한 그의 진술에서 나타나고 있다. 재림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의심의 여지도 없이 신약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영향력이 있는 것이다. 그의 주요 업적은 막다른 두 골목인 비역사적 영해주의(非歷史的靈解主義)와 시기를 정하는 관능주의(官能主義)로부터 재림의 소망을 보호하는 것이다. (64.5)
 시기를 정하지 않음. 바울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이 자신의 시대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으나(롬 3:11; 살전 4:15; 고전 7:26, 31) 결코 시기를 정하는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재강림에 대한 확신이 시기를 정하는 요인에 대한 생각을 억누르고 있었다. (64.6)
 영해하지 않음. 더 나아가, 비록 사도 바울이 재림의 소망을 예로 들어 우리가 이미 재림 추수의 “처음 익은 열매”(롬 8:23)를 즐거워하고 있으며,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생애하고 있다(빌 1:21)고 말하므로 구체화하고 있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볼 수 있는 재림의 실체를 감상적인 것으로 돌리려는 어떠한 시도도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주의 날이 이르렀다”(살후 2:2)는 기만적인 가르침에 의해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 하게 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기만적이고 분열시키는 재림에 대한 영해주의를 꺾어 버리기 위해 바울은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살후 2:3~12). (64.7)
 재림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쉽게 요약하는 방법은 이 사건의 중요한 국면을 묘사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네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연구하는 것이다. (65.1)
 1. 주의 날
 결정적인 심판. 바울이 사용한 한 가지 표현은 “주의 날”이다. 이 문구는 이미 본 것처럼 임박한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판과 신실한 자들을 구원하고 악한 자들을 멸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권고의 날을 묘사하기 위해 구약에서 자주 사용된다. (65.2)
 바울의 편지서에서 “주의 날”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집행하실 최후의 심판을 의미한다. 그날은 다양한 방법, 곧 “주의 날”(살후 2:2, 5:2),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 1:8), “주 예수의 날”(고전 5:5; 고후 1:14), “그리스도 예수의 날”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날”(빌 1:6, 10, 2:16), “그날”(살후 1:10; 딤후 1:18) 등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다양한 명칭은 그분께서 오실 때 그리스도에 의해 집행될 심판의 거대한 중요성을 지 적하고 있다. (65.3)
 징벌과 보상. 주의 날은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의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고전 3:13) 때가 될 것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안식”하고 “영광”스러운 시간이 되지만(살후 1:7, 10), 반역자들에게 그날은 두려운 형벌의 시간이 될 것이다(살후 1:8~10). (65.4)
 바울은 “그날”“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에게 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딤후 4:8). 그러므로 “밤에 도적같이 이를”(살전 5:2) 주의 날을 바라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지 말고 “깨어 근신”(살전 5:6)하므로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빌 1:10) 이르게 되도록 격려를 받고 있다. (65.5)
 2. 파루시아(주님의 강림)
 기쁨의 상봉. 바울은 일곱 번이나 “파루시아”(Parousia)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강림을 언급하고 있다. 이 단어는 오고 있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과 함께 “임재”(빌 2:12)와 “도착”(고전 16:17; 고후 7:7)의 개념을 결합한 것이다. 예를 들어 바울은 “디도의 옴(Parousia)”(고후 7:6)이 가져온 기쁨을 묘사하고 있다. (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