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4 장 재림소망의 확실성
 알곡과 가라지. 자신의 강림의 목적과 그 준비에 대하여 설명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비유들을 사용하셨다. 알곡과 가라지 그리고 그물의 비유에서(마 13:24~30, 36~43, 47~50) 그리스도께서는 재림으로써 그 절정을 이룰 복음 시대의 성격을 예증하고 계신다. (61.1)
 두 비유는 종교 자유의 원칙을 가르쳐 준다. 이 시대 동안에는 아무도 가라지로부터 알곡을, 나쁜 물고기로부터 좋은 물고기를, 즉 왕국에 있지 못한 자들로부터 왕국에 있는 자들을 분리해 낼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분리는 마지막 날에 있어야 한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갉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39~43, 13:49, 50 참조). (61.2)
 이 두 비유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목적은 의인과 악인 사이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분리를 이룩하시기 위해서이다. 악인은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르친 것처럼 “풀무불”(마 13:50)에 멸망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님과 구원받은 자들이 악인을 통치할 천년기 후에 그리스도의 강림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거의 용납하지 않는다. (61.3)
 열 처녀. 마태복음에는 감람산 설교에 뒤이어, 세 비유를 포함하고 있는 한 장이 나온다. 각 비유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위한 준비의 국면을 강조하고 또 그 사건을 대표할 각기 다른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예기치 않았던 신랑의 도착에 비유된다(마 25:1~13; 눅 12:35~40 참고). (61.4)
 마지막 순간에 빌릴 수도 얻을 수도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 그 때는 너무나도 늦으므로 품성을 계발할 수도 또, 하나님과의 교제를 빌릴 수도 없다. 그가 오실 때 만약 우리가 주님을 맞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자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생애를 성령의 기름으로 끊임없이 채우는 것이다.(삼상 10:1, 6, 16:13). 신랑이 오실 때 문은 닫혀진다(마 25:10). 어떤 전천년주의 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두번째 기회의 여지는 없다. 재림은 개개인의 돌이킬 수 없는 결정과 운명을 인치는 것이다. (61.5)
 달란트. 달란트의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강림은 그의 종과 회계하기 위해 긴 여행으로부터 돌아오는 주인에 비유되고 있다(마 25:14~30; 눅 19:11~27 참고). 이 비유에서 강조되고 있는 준비의 영역은 우리의 자원이 되는 시간과 돈, 그리고 기술에 대한 청지기 직분이다. (61.6)
 랄프 얼(Ralph Earle)은 “예배에는 열심이나 봉사에는 약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달란트의 비유(14~30절)에 있는 경고에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영적인 헌신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우리 주인의 사업을 위해 바빠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왕국의 일을 확장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활용해야 한다”5고 기록하고 있다. (61.7)
 이 비유는 주인이 올 때 선한 일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기를 거절했던 “악하고 게으른 종”(마 25:26)을 저주할 것이라고 엄숙히 경고한다. 궁극적으로 형벌을 받게 될 자는 노력하지 않는 자이다. (62.1)
 양과 염소.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민족을” 심판하기 위해 오는 것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에 비유된다(마 25:31, 32). 이 비유에서 강조된 준비의 분야는 주님의 오심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인 책임이다. (62.2)
 그리스도께서 염소로부터 양을 그리고 불신자와 신자를 분별하는 기준은 지식이나 명성, 혹은 획득한 재산이 아니라 오히려 불쌍한 자에게 쏟은 관심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적하시는 세부적인 행위는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나그네를 대접하고, 병자를 위로하며, 옥에 갇힌 자를 찾아보는 것 등이다. (62.3)
 이러한 행위의 어떤 것도 큰 재정적인 낭비를 꼭 수반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누구나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날 때 매일 할 수 있는 단순한 행위이다. 그러한 행위는 자발적이고 본능적으로 행해져야 하며,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기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마 25:40)를 포함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단순히 도와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놀라운 진리는 그분께서 오실 때 그러한 모든 행위를 마치 직접 그분께 한 것으로 인정하실 것이라는 것이다(마 25:40). (62.4)
 결론. 예수님께서 자신의 봉사가 마쳐갈 때 말씀하신 이러한 비유들은 그가 다시 오실 것에 대한 확실성을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확신시키고, 자신의 파루시아를 위해 준비하도록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권면하기 위한 그분의 관심을 나타낸다. 이 준비는 지혜로운 처녀에 의해 예 영적, 도덕적 성장과, 선하고 신실한 종에 의해 보여진 선한 청지기의 직분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자신의 오른편에 두는 양에 의해 대표된 불쌍한 사람을 위한 사회적인 관심을 포함하고 있다. (62.5)
 이 모든 비유들은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 주실 마지막 보상은 당연히 얻게 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공언하는 것은 구원의 보증이 아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결혼식에 초대를 받았으며, 게으른 종들도 주인의 재산을 나누어 가졌으며, 염소 역시 같은 목자에게 속했다. 그러나 그들의 공언하는 바가 행실에 의해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보상 대신 징벌을 받았다. (62.6)
 제 2 부 베드로의 증언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베드로의 증거는 먼저 사도행전에서 찾게 된다. 오순절에 청중을 향해 회개를 촉구한 후, 베드로는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획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행 3:21, 22)는 하나님의 약속을 말했다. (62.7)
 이 선포 속에서 베드로는 선지자들이 예언한 마지막 회복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때까지는 그가 하늘에 머물러 있을 것을 함축하고 있다. 베드로는 여기에 함축하고 있는 것을 자신의 두 편지서에서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두 편지서 속에서 주요 역할을 하고 있는 주의 오시는 날은 구원의 날과 심판의 날로 제시되어 있다. (62.8)
 1. 구원의 날
 베드로는 재림을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벧전 1:5, 1:9 참고)의 때로 보고 있다. 신자들은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벧전 1:4) 이미 소유하고 있다. 하늘에 간직된 이러한 축복을 죽을 때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즐기게 된다. 그리하여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신자들은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벧전 5:4)게 될 것이다. (63.1)
 베드로는 이 재림의 소망이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는 신자들을 어떻게 견디게 해 주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이 가까이 이르렀을 때(벧전 4:7), 신자들이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벧전 1:6) 될 것을 보고 있다. 이러한 고통은 단지 “잠간” 지속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속히 자신의 백성을 “친히 온전케 하시며 강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벧전 5:10, 1:6 참고). 요약하면,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이 현재 하늘에 보관되어 있는 축복들을 지상에 있는 신자들에게 내려 주실 때인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다. (63.2)
 2. 심판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