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4 장 재림소망의 확실성
 아마도 이날은 고난 주일 중 화요일 오후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 그의 제자들이 건물의 웅장함을 가리켜 보였다. 놀라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건물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셨다. 그들은 베다니로 가는 도중 감람산 비탈을 올라가서 성전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쉬게 되었다. 이 때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은밀히 접근하여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막 13:4)라고 질문을 했다. (58.3)
 문제점. 제자들의 질문은 분명히 성전의 역사적인 멸망이었다. 어떻든 마태복음에는 제자들의 질문에 다른 두 사건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성전의 멸망)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3). 우리는 마태복음에 있는 질문의 형태가 마가복음에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주석하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오심과 세상의 끝에 대하여 마태복음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말씀은 세상 종말 전에 있을 징조들 중 하나로 분명히 보여 준 성전의 멸망에 대한 언급이 마가복음에 암시되어 있다. (58.4)
 제자들의 이중(二重)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징조와 상황이 일어날 것에 대해서 그들에게 미리 경고하셨다. 문제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역사적인 성전의 멸망과 그분의 오심과 관계되는 징조들 사이를 구별하고자 시도하지 않으신 것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오심에 대한 종말론적인 맥락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큰 환난”(막 13:14~21; 마 24:15~28)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분명히 이러한 사건들을 “군대들에 의해 에워싸이는 것”(눅 21:20)과 관련 시키고 있다. (58.5)
 해결책. 많은 보수주의 주석가들은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을 누가복음의 빛 가운데서 해석함으로써 이 상이점을 조화시킨다. 이렇게 할 때, 환난과 멸망의 가증한 것은 결국 AD 66~70년의 성전 멸망으로 끝나는 역사적인 사건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58.6)
 이러한 해석은 유대로부터 산으로 도망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같은 일부 경고가 종말론적인 적그리스도에 의해 야기되는 세계적인 환난과 거의 연관지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다소의 장점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파루시아가 “그날 환난 후에 즉시(마 24:29; 막 13:24 참조)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렇게 되면 마지막 날의 사건들이 AD 70년의 역사적인 환난과 멸망의 가증한 것과 동시에 발생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에 문제이다. (58.7)
 예언적 전망. 여러 다른 해결책들이 감람산 설교 속에 있는 역사적인 것과 종말론적인 언급 사이에 있는 분명한 긴장을 조화시키기 위해 제안되어 왔다.3 우리의 입장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설명은 소위 예언적 전망에서 찾아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1장에서 연구했다. 구약 선지자들과 같이 예수님께서도 역사적인 것을 종말론적인 사건과 혼합하신다. 다시 말하자면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의 절박한 멸망과 관계된 그러한 사건들의 투시를 통해서 그분의 파루시아로 이끌어 가는 사건들의 성취를 본다. 미래를 현재에 연결시키는 것은 내세에 현실성을 부가시켜 주는 데 이바지 한다.4 (59.1)
 교훈. 감람산 설교에서 주어진 마지막 날의 세부적인 징조들은 8장, 9장, 그리고 10장에서 연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파루시아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것만을 간단히 보도록 하자. 첫째, 그는 자신의 강림을 범 세계적으로 신자들을 모으는 장엄한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막 13:26, 27). 이 묘사는 은밀한 휴거(携擧)를 용인하지 않는다. 마태복음에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번개와 비교하여(마 24:27) 강조하고 있다. (59.2)
 둘째,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오심이 “가까이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막 13:29; 마 24:33 참조)고 가르치신다. 그는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를 보게 될 때 여름이 가까웠다는 징조들을 지적하심으로써 이 진리를 강조하신다. 그리스도의 긴박한 강림에 대한 의미를 다음 두 장에서 생각해 볼 것이다. (59.3)
 셋째,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임함”이 노아 당시의 사람들에게 홍수가 있었던 것처럼 갑작스럽고, 예상하지 않았던 것이 될 것이라고 가르치신다(마 24:36~39). (59.4)
 넷째, 예수님께서는 그가 다시 오실 때 단지 두 종류의 사람들, 곧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만이 있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있게 될 현저한 구별이 분명하게 극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마 24:40, 41). (59.5)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강림을 위해 깨어 있도록 강력히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43; 막 13:35~37 참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감람산 설교에서 반복해서 말씀하신 주요 말씀이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줄곧(stay wide) 깨어 있으라”는 말로서 당신의 오심을 위해서 준비하라는 것이다. (59.6)
 이것은 세 복음서에 나오는 감람산 설교 자체의 끝맺음의 말이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막 13:37; 마 24:42~44; 눅 21:34 참고). 그리고 감람산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강림이 영광스럽고, 가시적(可視的)이며, 촉박하고 급작스러운 것이라고 하시면서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깨어 있어야 된다고 가르치신다. (59.7)
 3.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
 배경. 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요한복음 14~16장)를 감람산 설교 대신에 기록하고 있다. 배경은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셨던 예루살렘의 다락방이다. 가룟 유다가 그 방을 떠났을 때(요 13:30), 예수님께서는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요 13:33)고 말씀하셨다. (60.1)
 그들의 두려워하는 얼굴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보증의 말씀으로 시작되는 유명한 설교로 반응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60.2)
 그리스도의 약속의 요체. “내가 다시 와서”라는 말씀은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의 요체이었으며 그것은 미래에 대한 의구심과 불확실성으로 인해 자주 고난 가운데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요체가 되는 약속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다시 와서” 라는 말씀을 보혜사(요 14:18, 28)로 일컬어지는 성령의 오심을 언급하는 것으로 주석한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 설교의 중요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요 14:15~24, 15:26, 16:4~15). (60.3)
 예수님께서는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써 제자들의 생애 속에 들어오셨다는 의미도 있다(실현된 종말론으로 알려지고 있음). 진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생활 속에 실제로 임재하신다(요 14:16).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신자들 가운데 자신이 직접 임재해 계실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자들을 데려가시기 위해서 개체(個體)로서 오시는 미래의 임재도 또한 가르치고 있다. (60.4)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서 지금 그를 따를 자들에게(to) 오시고, 미래에 그를 따를 자들을 위하여(for) 개체로서 오신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요한복음에는 그리스도의 미래의 강림이 삭제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구체화되었다. (60.5)
 요한은 사랑하는 제자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록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개체로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제시한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요 21:22). “내가 올 때까지”라는 구절은 오순절을 언급하는 것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요한은 이 말씀을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을 때, 즉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여러 해 후에 기록했기 때문이다(요 21:33).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재림을 언급한 것이다. 요한이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편만한 기대감을 암시하면서 자신의 복음서를 끝맺는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다. (60.6)
 4. 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