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J. Daniélou,
The Theology of Jewish Christianity, 1964, 342.
2) J. Daniélou,
The Bible and the Liturgy, 1966, 243.
3)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53. 다른 추론을 통해 H. Riesenfeld 또한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H. Riesenfeld,
“Sabbat et jour ju Seigneur,” New Testament Essays. Studies in Memory of T. M. Manson, 1958, 213. Y. B. Tremel,
“Du Sabbat au Jour du Seigneur,” Lumiére et Vie (1962):44. Pierre Grelot,
“Du Sabbat juif au dimanche chrétien,” La Maison-Dieu 124(1975):28-31.
4) W. Rordorf,
Sunday, 237. 일요일 준수라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를 옹호했던 다른 저자들로는 다음을 보라. H. Dumaine,
“Dimanche,” DACL IV, col. 89. P. Cotton,
From Sabbath to Sunday, 1931, 71. J. Nedbal,
Sabbat und Sonntag im Neuen Testament, dissertation 1956, 170. C. Callewaert,
“La synaxe eucharistique á Jerusalem, berceau du dimanache,” Ephemerides Theologicae Lovanienses 15 (1938):34-73.
5) P. K. Jewett,
Lord’s Day, 57.
6) W. Rordorf,
Sunday, 218.
7) P. K. Jewett,
Lord’s Day, 57. J. A. Jungmann은 안식일이 일요일로 대체된 것은 유대인들의 박해의 결과로 스데반의 순교와 A.D. 44년에 있었던 박해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고 주장한다.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와 관련해 전해지는 정보를 통해 이 견해가 신빙성을 잃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he Mass of the Roman Rite, 1950, I, 20).
8) 참고, W. Rordorf,
Sunday, 232-237.
9) Ibid., 219.
10)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53.
11) W. Rordorf,
Sunday, 218.
12) Eusebius,
HE 3, 25, 5,
NPNF I, 159. 다음 글에서도 같은 해석을 찾아볼 수 있다. Theodoret,
Haereticarum fabularum compendium, 2, 1,
PG 83, 389.
13) H. Dumaine은 에비온파 사람들에게 일요일 준수는
“예루살렘의 초기 교회의 관습이 유지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제도는 헬라적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는 견해를 내 놓는다(
“Le dimanche,” DACL IV, col. 893). 참고, C. Callewaert, 51.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54-55. Rordorf,
Sunday, 216-218. P. K. Jewett,
Lord’s Day, 57.
14) W. Rordorf,
Sunday, 218.
15) 성전: 행 2:46; 3:4; 5:12, 20, 25, 42. 회당: 행 9:20; 13:5, 14, 42; 14:1; 17:1, 10, 17; 18:4, 19, 26; 19:8. 가정: 행 1:13; 2:46; 5:42; 12:12; 20:7. 강가: 행 16:16.
16) O. Cullman은 개인 가정집들도
“교회-εκκλησία”로 여겼기 때문에
“성전에서”라는 표현은
“집 안에서”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이 두 가지 용어가 분명히 존재했고, 그것은
“성전-ιερόν”과
“교회-εκκλη”를 가리키는데 쓰였기 때문이다. O. Cullman,
Early Christian Worship, 1966, 10.
17) 참고, 행 3:11; 5:12; 요 10:23.
18) H. Riesenfeld는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말씀과 기도 때문에 성전과 회당에서 예배를 하며 유대인들의 자본금 조성에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치는 제물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맞바꿔진다는 것을 언제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성전에서 예배를 참석한 후, 그들은 서로 모여(행 2:46; 5:42), 다시 말하면 한 개인의 집 다락방과 같은 곳에서(행 1:13) 사도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들으며 성만찬에 참여해 떡을 떼고 기도에 힘썼다(행 2:42; 참고, 6:1-2)”(H. Riesenfeld, 212).
19) Ralph P. Martin,
Worship in the Early Church, 1974, 18. 참고. T. W. Manson,
“The Jewish Background,” Christian Worship: Studies in its History and Meaning, ed. N. Micklem, 1936, 35.
20) Ralph P. Martin, 19.
21) F. J. Foakes Jackson and Kirsopp Lake,
The Beginnings of Christianity, 1933, I, 304. Karl L. Schmid,
“εκκλησία,” TDNT III, 501-536. Ferdinand Hahn은
“교회”가 회당에서 그 형태를 빌려왔다는 이론을 거부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의 모든 전통의 상당부분을 고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The Worship of the Early Church, 1973, 41). Hahn은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유대인들의 예배와 구분 지었지만, 나중에 들어 특히나 주의 형제인 야고보 당시 오히려
“율법의 엄격한 준수, 종교적 의식에 대한 충실, 뚜렷한 배타주의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고 주장 한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에는 유대인의 예배를 버리고 이후 다시 그것에 이끌리게 된 것일까? 이 이론을 뒷받침할 근거는 신약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Hahn은
“40년대 장로회의 직위는 의식적으로 유대인들의 관례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예배가 회당의 예배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는 비슷한 의존성이 초기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루살렘 교회에 의한 장로회의 직위가 실제로 유대인의 관례로의 회기를 의미하는 것인가? 오히려 당시의 유대인들이 갖춘 형태 이후로 교회의 조직적 구조의 측면의 발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대인들의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해 일곱 집사를 임명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Hermann W. Bayer,
“διάκονος,” TDNT II. p. 91). 새로운 집사들을 택한 것은 반드시 공동체의 성장에서 비롯된 교회의 현지 구조의 발전의 문맥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조직적, 예배적 구조는 하나의 타당한 본보기를 제공했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급한 상태에 따라 조정해 사용했다. Mario Fois는 초기 팔레스타인 지역의 교회의 구조가 당시의 유대인들의 형태들을 본따 발전되어 갔는지를 보여준다. Mario Fois,
Collegialitá, Prinato e Laicato nella Chiesa Primitiva, Gregorian University, 1973, 52–75.
22) C. W. Dugmore,
“Lord’s Day and Easter,” Neotestamentica et Patristica in honorem sexagenarii O. Cullmann, 1962, 272.
The Influence of the Synagogue upon Divine Office, 1944, 7. W. O. E. Oesterley,
The Jewish Background of the Christian Liturgy, 1925. P. P. Levertoff,
“Synagogue Worship in the First Century,” Liturgy and Worship, ed. W. K. L. Clarke, 1932.
23) O. Cullmann, 10-11.
24) H. Riesenfeld, 213.
25) O. Cullmann, 9.
26)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179-180. 그는
“회당에서” 라는 표현이 사용된 마태복음(4:23; 10:17; 12:9)에서 이미 회당으로부터의 분리에 대한 암시가 있었다고 이해한다.
27) 참고. O. Cullmann,
“Dissensions Within the Early Church,” Union Seminary Quarterly Review (1967):83. M. Simon은 이러한 헬라화된 유대인들 에비온파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가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후에 에비온파가 유대인 기독교의 후기 발전을 대표하기 때문일 것이다(
St. Stephen and the Hellenists in the Primitive Church, 1958, 113). E. Lohmeyer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도의 신학을 구분한다(
Galiläa und Jerusalem, 1936). 참고, H. R. Baltz,
Methodische Problem der neutestamentlichen Christologies, 1967, 171.
28) O. Cullmann,
“Courants mulitples dans la communauté primitive,” Judéo-christianisme, ed. Joseph Moingt, 1972, 58.
29) W. Rordorf, Sunday, 127, 217. Rordorf의 가정은 사도행전 6:14에 근거하고 있는데, 여기서 거짓 증언자들은 다음과 같은 발언을 이유로 스데반에게 죄를 묻는다.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그는 안식일도 그
“규례(customs)”에 포함된다는 근거 없는 추론을 내놓는다. 참고, M. H. Shepherd,
The Paschal Liturgy and the Apocalypse, 1960, 17.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스데반이 아닌 거짓 고발자들이 한 말이라는 사실이다. 바울도 비슷한 비난을 받았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한다”(행 21:21). 바울은 이를 부인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노라. 분명 바울은 일례로 스스로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버리라고 권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선한 마음으로 이와 같이 답했을 것이다. 이는 오직 이방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행 15:23). 이것은 바울이 할례와 관련해 고소를 당했으나 안식일에 대해서는 동일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와 동일하게 스데반에 대한 비난도 성전과 율법, 규례에 대한 포괄적 언급은 있으나 안식일에 대한 명확한 암시는 찾아볼 수 없다.
30) 이 표현은 다음의 글에서 발견 된다. E. Haenchen,
Die Apostelgeschichte, 1959, 226.
31) T. W. Manson, 35.
32) F. A. Regan,
Dies Dominica, 4.
33) B. Bagatti,
The Church from the Circumcision, 1971, 67.
34) F. F. Bruce,
Commentary on the Book of the Acts, 1954, 429. Charles W. Carter and Ralph Earle는 같은 견해를 옹호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조직적으로 유대인의 성전 양식을 빌려왔을 가능성이 있다. 야고보는 고대 유대 교회의 행정을 지원하기 위해 산헤드린에 해당하는 70명의 장로로 구성된 조직을 두었을 것이다.” Charles W. Carter and Ralph Earle,
The Acts of the Apostles, 1905, 322.
35) Lino Randellini는 예루살렘 교회는 정확히 규정되지 않는 어느 한 시기에
“유대교 안의 한 분파로 보이는 할례 받은 히브리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성전을 자주 오가며 축제들을 기념하고 안식일과 단식을 지키며 자신들을 법적 규율들에 헌신하며 자녀들에게 할례를 베풀었다”고 주장한다(
La Chiesa dei Giudeo-cristiani, 1967, 27). 또한 Carol and Leclerq는 스데반의 죽음 이후 교회의 첫 확장 당시에
“거의 모든 행정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비롯되었고, 내부의 불린 바대로 유대주의자들의 권위와 우세는 헬라화 된 유대인들의 영향력을 훨씬 넘어섰다”라고 지적한다(
Monumenta eclesiae liturgica, 1902, I, XVID. C. W. Dugmore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곧 이어 교회의 관습에 영향을 미치기는 했으나 그 기원과 핵심에 있어 유 본질적으로 유대적인 교회로 합류하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 한다(C. W. Dugmore,
The Influence, 44). Mario Fois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구조를 세우는데 있어서
“당시의 유대, 그리고 헬라-로마의 형태를 참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Mario Fois, 52-75). 참고, D. Judant,
Judaisme et Christianisme, Dossier patristique, 1968, 15.
36) 참고, 갈 1:19; 2:9, 12; 고전 15:7; 행 12:17; 15:13; 21:18.
37) 이 글들에 나타난 야고보의 승격에 대한 간단한 연구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B. Bagatti, 70-78.
38)
The Protoevangelium of James, 18.
39)
The Gospel of the Hebrews,
“주께서 제사장의 종에게 세마포 옷을 주셨을 때 그분은 야고보에게 나타나셨다. 이는 바로 야고보가 그가 주의 잔을 마신 때로부터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나신 그 분을 보기 이전에는 떡을 먹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얼마 후 주님은 말씀하셨다. 상과 떡을 내오라! 즉시 이와 더불어 그분은 떡을 떼시고 축복하사 그것을 구워 의로운 야고보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형제여, 이제는 내가 이렇게 살아났으나 너의 떡을 먹으라.”(E. Hennecke,
New Testament Apocrypha, 1963, I, 165. 참고.
The Protoevangelium of James 18;
The Kerygmata Petrou 1:1
“Peter to James, the lord and biship of the holy church ∙∙∙”(E. Hennecke, II, III).
40) 참고,
II. Apocalypse of James III-IV(나그함마디에서 발견). Recognitions of Clement 1. 68에서 야고보는
“주교의 장”으로 칭해 진다(
ANF VIII, 94). 동일 문서에서 다음에 이러한 설명이 언급 된다.
“그가 주의 형제인 야고보, 혹은 그의 뒤를 잇는 누군가의 추천서를 예루살렘에서 가져오지 않는 한 그대는 어떤 선생도 믿지 말라는 이 거대한 경고를 주시하라”(4, 35
ANF VIII, 142). 야고보의 대주교로서의 동일한 속성은 Epistle of Clement to James의 서문에서도 발견된다.
“Clement가 주, 그리고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주교 중의 주교, 히브리서의 거룩한 교회, 그리고 온 세상 모든 교회인 야고보에게”(
ANF VIII, 218).
41) Gospel of Thomas, Logion 12.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기를, ‘저희를 떠나실 것을 알고 있나이다. 우리 가운데 가장 큰 자는 누가 되겠나이까?’ 예수께서 답하시기를, ‘너희가 어디를 가든지 의인 야고보에게 가라. 그를 위하여 하늘과 땅이 생겨났느니라’”(E. Hennecke, I, 290).
42) Hegesippus(Eusebius로부터 인용),
HE 2, 23, 5-6. 참고, Josephus는 공평한 유대인 시민들은 제멋대로 야고보에게 사형을 집행했다는 이유를 들어 대제사장 안나스를 집정관 알비누스에게 고발했다고 기록한다. 야고보는 분명 유대인들로부터의 많은 신임을 즐겼다. Josephus의 것으로 여겨지는 한 구절에서는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을 야고보의 부당한 죽음에 대한 처벌로 보고 있다(Josephus,
Antiquities 20, 9, 1).
43) B. Bagatti, 70. 야고보가 왕과 성직자적 권한의 영향을 교회에 미쳤다는 전통은 예를 들어 요셉을 사제로 보는
The History of Joseph the Carpenter에서도 찾을 수 있다. Epiphanius는 죽어가는 야고보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기록 한다.
“빛으로부터 계속되어져 온 그 빛이 내게 왕관을 씌울 것이다”(
Adversus haereses,
PG 41, 393-4;
Apocalypse of James VII, 2). B. Bagatti, 74에서 재인용.
44)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로도 분명 야고보에게서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권하고자 지지를 받았던(갈 2:12) 할례자 무리에 대한 우려는 당시 모세의 규례에 대한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음을 시시하고 있다(참고, 갈 5:12; 6:12; 빌 3:2; 행 15:1-2, 5).
45) W. Rordorf,
Sunday, 219. P. K. Jewett도 마찬가지로
“[즉, 안식일에 대한 논쟁]을 암시하는 그 어떤 것도, 더욱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행 15)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유대인 무리를 모함한 전체 사도 교회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 합일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첫 날 예배는 그러므로 바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라고 주장한다(
Lord’s Day, 56-57).
46) Joseph Addison Alexander,
Commentary on the Acts of the Apostles, 1956, 548. 이 글에서 저자는 다양한 관점에 대해 간결한 논의를 포함시키고 있다.
47) 참고. F. F. Bruce, 312,
“21절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적용하면 야고보가 의미한 바는 모든 성에 유대인 공동체가 있어야 하고 그들이 느끼는 양심의 가책도 존중을 받아야 한
다는 것이다.” 48) Everett F. Harrison, Acts:
The Expanding Church, 1975, 236-237.
“야고보가 원한 것은 다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가능한 한 거의 모든 곳에서) 회당에 참여하는 습관을 가진 이방인들은 그들에게 적용된 레위기 규율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로써 공의회의 요청이 터무니없거나 냉혹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49) F. F. Bruce, 312.
50) R. C. 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the Acts of the Apostles, 1944, 878. 저자는
“팔레스타인의 이러한 유대인 신자들이 바울에 대한 거짓소문들에 시달렸다”라고 말한다.
51) Richard B. Backham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실제 그 제안 자체는 그의 [즉, 바울]의 지휘아래 제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갔던 때에 그가 나실인의 서원을 이행했기 때문이다(행 18:18). 또한 그는 스스로 ‘제물을 바치러(to make offerings)’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때는 그가 감사할만한 어떤 서약을 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The Acts of the Apostles, 1964, 414).
52) F. J. A. Hort,
Judaistic Christianity, 1890, 109-110.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사도행전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바울]는 이미 스스로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 기를 제안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이전에 한 서약과 관련이 있을 것이며, 또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이방인들의 기부금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기도 한다. 이 부분은 21장에 언급되고 있지는 않으며 24장 17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53) Everet F. Harrison은 바울이
“만일 여행의 실제 목적-교회의 유대인과 이방인 양 진영의 통합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교회에서 모은 자금을 가지고 가는데 만족하며 편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지적한다(328).
54) E. Lohse,
“σάββατον,” TDNT VIII, 29.
55) W. D. Davies,
“Paul and Jewish Christianity,” Judéo-christianisme, 1972, 72.
56) J. Lebreton and J. Zeiller,
The History of the Primitive Church, 1949, I, 306. 근래 이러한 학자들은 Eusebius게 제시한 펠라로 이주하는 일에 대한 역사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J. Munck,
“Jewish Christianity in Post-Apostolic Times,” New Testament Studies 6(1959-60): 103-104. G. Strecker,
Das Judenchristentum in den Pseudoklementinen, 1958, 229-231. S. G. F. Brandon,
The Fall of Jerusalem and the Christian Church, 1951, 169. Josephus, Epiphanius와 Eusebius는
Clementine Recognitions에서 관련 참고 문헌들을 분석하고 있는데, 펠라로 이주하는 것에 대한 반대는 바로 이러한 분석에 기반하고 있다. M. Simon은 만일 펠라 주변에 거주했던 이교적 분파들에 의한 공동체의 변질과 야고보의 순교에 대한 도피의 연쇄 작용을 고려할 경우 어떻게 반대의 견해들이 그 설득력을 잃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M. Simon,
“La migration à Pella. Légende ou réalité,” Judeo-christianisme, 37-54.
57) F. A. Regan,
Dies Dominica, 18.
58) Eusebius,
HE 4, 5, 2-11; Epiphanius,
Adversus haereses 70, 10, PG 42, 355-356.
59) Eusebius,
HE 3, 27, 2, Kirsopp Lake 번역, Eusebius,
The Ecclesiastical History, 1949, I, 263(이후 Lake, Eusebius로 인용).
60) W. Rordorf,
Sunday, 217-218. 참고, P. K. Jewett, Lord’s Day, 57.
61) Irenaeus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에비온파로 불린 이들은 할례를 베풀고 율법과 유대인들의 삶의 방식에 따라 그 관습들을 고수했다. 또한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집인 것처럼 그곳을 향해 기도했다”(
Adversus haereses 7, 26, 2,
ANF I, 352).
62) Eusebius,
HE 3, 27, 2,
NPNF I, 159. Irenaeus는 분명 씨린더스와 카포크라테스와 같은 영지주의자와 그리스도에 대한 에비온파의 관점을 연관시키고 있다. 이 두 관점은
“예수를 처녀로부터 잉태된 자가 아니라 인간 탄생의 보통의 방법으로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존재로 묘사했다”(
Adversus haereses 1, 26, 2,
ANF I, 352).
63) J. Daniélou,
The Theology of Jewish Christianity, 1964, 56. H. J. Schoeps 또한 그의 글에서 이를 구분하고 있다. H. J. Schoeps,
Aus Frühchristlicher Zeit, 1950, 282.
64) M. Simon, 48. Simon은 자신의 결론의 근거를 에비온파와
“Νασαραίοι-나사렛에서 난자들(Nasarenes)”이라 불린 기독교 이전 유대인들 종파의 신념 사이에서 발견되는 두드러진 유사성에 두고 있다. 여기서 후자 종파는 나사렛파와 구분되는 것으로 Epiphanius의
Adversus haereses(1, 18)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에비온파의 클레멘틴이라는 가명 저자(Pseudo-Clementine)가 주장한 바로 그 같은(same) 특정 교리들을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못 박는다. Ibid, 48.
65) Justin Martyr,
Dialogue with Trypho 47,
ANF I, 218. Philip Schaff와 Henry Wace는 이 사실을 인정하며 Justine 당시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교리적 이교성”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되는 경향”으로 인해 구별되어졌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몇 세기 이후, Irenaeus 때에
“Justin이 온건파와 강경파 사이에서 발견한 차이는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모두가 이단자의 신분으로 분류되었다”(
NPNF I, 158). 두 저자는 또한
“사도 시대에 [에비온파와 나사렛파 사이]의 차이를 이끌어 내려는 것은 역사학자들의 습관이었다. Epiphanius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온건파(나사렛파)와 강경파(에비온파) 존재의 지속성을 탐색하려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Nitzsch는 이 차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임을 밝혔다(Dogmengesch, 37). Epiphanius가 만든 이 분열은 Justin 뿐 아니라 Origen과 Eusebius의 견해와도 다른 것이었다”(Ibid.). 에비온파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한 결과로 그리스도에 대한 그노시스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인 이교분파로 발전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 분리는 유대인들에 대한 당시 로마의 억압적인 조치로 조장된 것일 수도 있다. Justin은 이 사실을 통해 당시의 그리스도를 따르고 순종하면서 동시에 유대인들의 제도들을 준수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감히 교제를 하거나 온정을 베풀지” 못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그는 서둘러
“나는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인다(
Dialogue 47,
ANF I, 218). 그러므로 기독교국(Christendom)의 주류에 끼지 못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유대인 그노시스적 분파에 가까워지면서(적어도 일부는) 그들의 그리스도론과 일요일 준수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Irenaeus 때에 그들은
“에비온파”로 알려지기 시작 했는데, 이는 주교가 그들을 그 이름으로 명확하게 그들의 신원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
Adversus haereses, 1, 26, 2).
66) Epiphanius,
Adversus haereses 29, 7,
PG 42, 402.
67) Jerome은
“Beroes, a city of Syria”에서 나사렛파를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Jerome,
De Viris ill. 3,
NPNF 2nd, III, 362.
68) M. Simon, 47-48. 참고, B. Bagatti, 31-35. J. Daniélou 또한 나사렛파를 아람 말을 쓰는 그리스도인들의 후손으로 이해한다. 이 후손들은 트랜스요르단 도피해
“나머지 교회로 부터 분리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할례와 유대인들이 준수한 안식일을 여전한 의무로 여겼기 때문이다”(J. Daniélou, 58).
69) Epiphanius,
Adversus haereses 29, 7,
PG 42, 402.
70) B. Bagatti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사렛파는 자신들을 이방인 후손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대등하다고 여겼다. 그 주창자의 한 사람으로써 저자 Hegesippus는 그들은 이교들과 심지어 자신들의 후손들 가운데서도 구별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했다고 말한다”(B. Bagatti, 30~31).
71) M. Simon,
Verus Israel: études sur les relations entre chrétiens et juifs dans lempire romain, 1964, 235. 이와 같은 저주가 A.D. 80~90년에 등장했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모든 학자들에게 용인되고 있던 사실이었다. 추가 참고 문헌은 다음의 글을 보라. W. Schrage,
“αποσυνάτος” TDNT VII, 848. James는 다음의 논거를 들어 저주의 시점을 입증하고 있다.
“이단 저주의 기도문(the Birkath-ha-minim), 이 선포는 1세기 후반기에 살았던 작은 자(the Small) 사무엘이 쓴 것이었다. 정확한 날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는 Camaliel II와 동시대의 사람이었는데, Camaliel II는 야브네에서 의식을 주재했던 인물로 70년에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두 명의 랍비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로써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는 Camaliel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그가 저주문을 쓴 시기는 80년과 90년 사이라는 것이다.” James,
The Conflict of the Chruch and Synagogue, 1934, 77-78. 참고. C. W. Dugmore,
The Influence, 4.
72) 참고. Justin Martyr,
Dialogue 16. Epiphanius,
Adversus haereses 29, 9,
PG 41, 404-405. Jerome,
In Isaiam,
PL 24, 87 and 484.
73) Jerome,
In Isaiam, 5, 18,
PL 24, 87.
74) M. Simon, 236.
75) James Parkes는
“이 시험이 회당 예배 중에 언급되었다는 사실로 우리는 그때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회당을 자주 출입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78). Abel 또한 이러한 결론을 공유 한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 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 들이는 것이 유대교의 규례들을 따르는 것과 무관하다고 생각했으므로 회당에 나가는 일을 멈추지 않아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자신들의 신념을 내비 치지 않으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 결과로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단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채택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방법이 바로 A.D. 80년경 Shemuel ha-Qaton이 쓴 이단 저주의 기도문(the Birkath-ha-Minim)이었다.” Ernest L. Abel ,
The Roots of Anti-Semitism, 1943, 131.
76) Dio Cassius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폐허가 된 한 장소에서 성을 발견하고 그 이름을 Aelia Capitolina라고 지었다. 또한 신전의 자리에는 주피터를 위한 새로운 성전을 세웠다”(
Historia 59, 12, 1,
LCL VIII, 447).
77) S. Krauss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극적인 상황을 종합해낸다.
“유대인들은 지금 쓰라린 박해의 시기를 지나왔다. 안식일, 축제들, 토라 연구와 할례는 금지되었다. 이는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의도로 보였다. ∙∙∙ 이후 시대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위험한 시기(sha’at hasekanak)였고, 당시 가장 의식들을 준수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탈무드에서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Geiger’s ‘Jud. Zeit’ i. 199, ii. 126; Weis, ‘Dor’ ii. 131. ‘Rev. Et. Juives,’ xxxii. 41), 비상시 일부 규정들은 허용이 되기도 했다. 이때는 포고령(‘gezarah’) 혹은 박해(‘shemad,’ Shab. 60a; Caut. R. ii, 5) 의 시기로 불렸다.” S. Krauss,
“Berkokba,” Jewish Encyclopedia, 1907, II, 509. 또한 다음을 참고하라. H. Graetz,
History of the Jews, 1940, II, 425. S. Grayzel,
A History of the Jews, 1947, 187. S. W. Baron,
A Social and Religious History of the Jews, 1952, II, 40-41, 107.
78)
Rosh Hashanah 19a in
The Babylonian Talmud, trans. I. Epstein, 1938, XIII; 78.
Baba bathra 60b에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 한다.
“정부는 우리에 대한 잔인한 법령들을 공표하고 토라와 규례들을 지키지 못하도록 금지하며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
Babylonian Talmud, XXV, 246).
Sanhedrin lla, 14a;
Aboda Zarah 8b; 랍비 문헌들에서 발견되는 예배에 대한 Hadrian의 반유대적인 칙령들은 Hamburger가
Real-Encycolopedia fir Bibel and Talmud 2 ed.에 담고 있다(
“Hadrianische Verfolgungsedikte”라는 단어를 보라). J. Derenbourg는 Hadrian의 전쟁과 정책들에 대한 잘 정리된 논의를 펼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로마 정부는 위반시 사형을 전제 로 할례, 안식일 준수, 율법 연구를 금지시켰다”(
Essai sur Thistoire et la géographies de la Palestine, 1867, 430). Jean Juster은 Hadrian의 반유대적 칙령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간단히 언급한다.
“그들의 존재는 랍비들의 자료들에서 그 문제와 관련해 합의되어 있었기 때문에 반박이 불가능했다. Hadrian에 대한 보인 깊은 Titus에게 보였던 것보다 더욱 극심한 증오는 Hadrian이 유대인들에 맞서 매우 비참한 일들을 자행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Les Juifs dans l’empire romain 1965, 226).
Midrach Rabbaholl 에서도 역시 Hadrian의 칙령을 종종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15, 7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설사 대적하는 누군가가 안식일을 모독하고, 할례를 폐지하거나 우상을 숭배하도록 명령한다해도, 그들은[즉, 유대인들] 동화되기보다 오히려 순교의 고통을 겪을 것이다.” H. Freeman, M. Simon, eds.,
Midrach Rabbah, 1939, 93:170.
Ecclesiastes 2, 17:
“Imikanton은 황제 Hadrian에게 전하기를, ‘그대가 미워하는 것이 할례라면, 이스마엘의 자손들도 있습니다. 만일 또한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라면, 사마리아인들도 안식일을 지킵니다. 보십시오, 당신은 단지 그 사람들[이스라엘 민족]을 미워하는 것입니다’”(8:66-67). 참고. S. W. Baron, II, 107.
79) Eusebius,
HE 4, 6, 4,
NPNF 2nd, I, 177-178.
80) Epiphanius,
Adversus haereses 70, 10,
PG 42, 355-356.
81) Ibid.,
PG 42, 357-358. the
Didascalia Apostolorum에서도 비슷한 언급을 찾을 수 있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러므로 그대가 유월절에 근면함으로 연구하고 모든 주의를 쏟아 금식하는 것이 옳다. 또한 그들 중 형제들이 유월절을 지킬 때에 그대가 그 처음을 맡으라.” R. H. Connolly, ed.,
Didascalia Apostolorum, 21, 17, 1929, 187.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유사성을 토대로 Epiphanius가 인용한 the
Apostolic constitutions와 the
Didascalia Apostolorum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Epiphanius의 인용 본문은 우리가 오늘날 접하고 있는 Didascalia의 시리아 판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점이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한 논의는 다음을 참고하라. M. Richard,
“La question pascale au Ile siécle,” L’Orient Syrien 6(1961): 185-186.
82) 아우디안파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A. Bareille,
Dictionnaire de théologie catholigue, 1903,
“Audiens”라는 단어를 보라. A. Reignier,
Dictionnaire d’historie et géographie ecclesiastigue, 1931,
“Audée”라는 단어를 보라.
83) Epiphanius의 증언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다음의 글을 보라. Samuele Bacchiocchi,
Anti-Judaism and the Origin of Sunday, 1975, 45-52.
84) B. Bagatti는 예루살렘에서의 유월절 논쟁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성으로 돌아오면서 유발되었다고 보는데, 이는 약 6년 후에 14일주의자들(Quartodecimans)로부터의 반대에 직면해있던 예루살렘의 주교인 나르키수스가 그의 스승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PG 9, 1490). 이러한 사실이 새로운 이방인 회원들 가운데서도 일부는 새로운 부활절 일요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B. Bagatti, 10.
85) B. Bagatti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후로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유대인의 각인(Jewish imprint)’의 생존에 대한 추가적 설명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 한다.
“당시 교회 안에 남아있던 ‘유대인의’ 특성에 대한 다양한 증언들이 있는데, Bardesanus는 그의 제자들에 대해 전하면서(PS 2, 605) 그들이 안식일이 아닌 일요일을 준수하고 있으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처럼’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Bardesanus, 180-223). 후자는 가명 Clement라는 이름으로 Clementine books에서 다음의 제목으로 포함되어 있다(PG 2, 31-56).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거룩한 교회를 다스리는 주, 그리고 주교 중의 주교, 야고보에게’(To James, Lord and Bishop of Bishops, who rules the holy Church of the Jews of Jerusalem).” B. Bagatti, 33. Bagatti는 계속해서 5세기까지 줄곧 두 개의 경쟁적 공동체(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가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역사적 설명들을 제시한다(B. Bagatti, 10-14). 성의 파괴 이후 수세기동안 그와 같이 강력한 유대계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예루살렘에서 지탱되어 왔다는 것을 볼 때, A.D. 70이 안식일과 일요일이 갈라지는 역사적 시기로 보려는 시도들의 신빙성은 떨어진다.
(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