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5장 예루살렘과 일요일
 “그 분파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도망친 후에 형성되었는데,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 펠라에서 살고 있었으며, 임박한 포위로 인해 산으로 이주했다. 그 결과 이와 같이 베뢰아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었다. 나사렛 이단은 거기에서 처음 시작되었다.”66) (202.2)
 그 존재가 4 세기에 히에로니무스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는 이 나사렛파는67) 펠라로 이주했던 예루살렘교회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직계 후예들로 나타난다. 시몬(M. Simon)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의해 저들의 정체성을 잘 평가하고 있다. (203.1)
그들의 특징은 본질적으로 유대교의 규례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만일에 그들이 모교회의 눈에 이단적으로 비춰졌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입장을 계속 고집하였기 때문이었다. 에피파니우스는 그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지만, 그들이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직계 후예들을 잘 대표하는데, 그 분파는 유대인들에 의해 나사렛인과 동일한 이름으로 명명되었음을 그는 잘 알고 있다.68)
(203.2)
 만일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나사렛파가 실제로 “예루살렘의 초기 공동체의 직계 후예들”이라면, 우리는 이들이(에비온파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유대계 기독교의 원래의 의식을 계속 유지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특별히 그들의 예배일과 관련해 에피파니우스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를 읽을 필요가 있다. 비록 그 감독이 그들을 “이단자”로 헐뜯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조와 관련된 더 광범위한 설명에서는 그들의 이단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동일한 구약성서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들을 유대인과 동일하게 여긴 후 그 는 다음과 같이 계속 말한다. (203.3)
나사렛파는 본질적인 요소들에 있어서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해 규정된 관습과 교리들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예외적인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으며,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 되었음을 믿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가르친다. 그들은 히브리어를 배우기까지 한다. 그들은 율법을 낭독한다. ∙∙∙ 그러므로 그들은 유대인들과도 다르 고 그리스도인들과도 다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유대인 들과 다르고, 할례, 안식일, 및 그 밖의 다른 유대인들의 규례들을 아 직까지 따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과 다르다.69)
(203.4)
 나사렛파의 모습은 우리가 앞에서 재구성한 예루살렘교회의 모습과 매우 잘 조화를 이룬다. 따라서 나사렛파가 초기 유대계 기독교의 인종적이고 신학적인 유산을 계승받은 대표적인 부류일 가능성이 존재한다.70) 그들이 안식일 준수를 그들의 구별된 표식 중 하나로 계속 유지했다는 사실은 이것이 예루살렘교회의 원래의 예배일이었으며, 그 도시가 파괴된 후에도 팔레스틴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안식일이 일요일로 바뀐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204.1)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저주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팔레스틴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안식일 준수가 계속 유지되었음을 나타내주는 또 다른 암시가 회당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했는지의 여부를 가려내기 위해 랍비들이 도입한 테스트에 의해서 제공된다. 그 테스트는 매일의 기도에 포함시키고(셰모네 에스레, Shemoneh Esreh), 회당 예배에 참석한 어떤 참석자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에 반대해 선언된 저주로 되어 있다. 마셀 시몬은 그 저주와 관련된 팔레스틴 텍스트를 소개하면서,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는 그것이 도입된 날짜를 또한 제한다. (204.2)
미님(Minim)에 대항한 다음의 그 유명한 문구인 셰모네 에스레(Shemoneh Esreh)가 삽입된 것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직후에 약 A.D. 80년경에 가말리엘 2세(R. Gamaliel II)의 발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배교자는 어떤 희망이든 가질 수 없을 것이며, 자만의 제국은 우리 시대에 즉시 근절될 것이다. 나사렛파와 사소한 사람(Minim)은 즉시 소멸될 것이고, 그들 모두는 생명의 책에서 삭제될 것이다. 그들은 의로운 자들 중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오! 하나님, 자만심을 꺾은 자에게 축복을 내리소서.”71)
(205.1)
 이 저주가 회당에서 정규적으로 선언되었다는 사실은 몇몇 교부들의 증언에 의해서도 확인된다.72) 예를 들어, 히에로니무스는 “모든 회당에서 매일 세 번씩 나사렛의 이름 아래서 당신은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한다”고 명확하게 기록한다.73) 그 문구의 목적은 단지 그리스도인들을 배 교자로서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마셀 시몬이 진술하는 것처럼 그들을 찾아내기 위한 “실제적인 테스트”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05.2)
직무 중인 제사장들의 부재 시에, 그 공동체의 모든 회원들이 그 공중 집회에서 차례로 예배를 인도하도록 요청될 수 있었기 때문에 방법은 분명했다. 이설과 더불어 타락한 참석자는 축복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선언을 하는데 있어서 부득불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탈무드는 매우 분명하게 말해준다. “누구든지 미님(Minim)에 대한 축복에 있어서 실수를 할 때에는 언제든지 그가 민(Min)인 것으로 추측 되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다시 불려 세워지게 되었다.”74)
(205.3)
 예루살렘의 파괴후 회당 예배에 그리스도인들이 출석하는 것을 금지 시키기 위해서 팔레스틴의 랍비들에 의해 한 테스트가 채택되었다는 사실은 팔레스틴에 사는 많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자신들을 본질적으로 유대인으로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75) 그들이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인 것 자체는 그들이 안식일 예배를 위해 회당에 참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이 존재했다고 해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기에 안식일 준수를 일요일 예배로 대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206.1)
 하드리아누스의 정책
 A.D. 70년 이후에도 예루살렘교회에서 안식일 준수가 계속되었다는 것을 추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간접적인 징후가 A.D. 135년 하드리아누스가 그 도시를 파괴한 것과 관련된 사건에 의해서도 제공된다. 바르코케바의 반란(A.D. 132-135)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후 그 황제는 파괴된 예루살렘 도시 위에 새로운 로마 도시인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를 재건립하였다.76) 이 때 잔인한 속박이 유대인들에게 강요되었다. 그들은 그 도시로부터 추방되었으며, 그곳에 다시 들어오는 것이 절대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들의 종교적 의식, 특별히 그들의 가장 특징적인 관례들인 안식일과 할례를 시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강요된 속박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풍부한 랍비들의 자료들에서, 그 황제의 통치 시기는 일반적으로 “박해의 시대”(Shemad) 혹은 “칙령의 시대”(gezarah)로 언급된다.77) 다음의 인용문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반 유대인 정책과 관련해 탈무드에서 흔히 발견되는 진술들의 한 유형이다. (206.2)
로마 정부는 그들이 토라를 공부해서는 안 되며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해서도 안 되고 안식일을 준수해서는 안 된다는 법령을 반포하였다. 유다 벤 샴무아(Judah B. Shammu’a)와 다른 동료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그들은 로마의 명사들이 종종 찾아가곤 했던 한 유명한 부인에게로 가서 자문을 구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밤중에 가서 당신들의 고난들에 대해서 외치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그들은 밤에 가서 이렇게 외쳤다. “아아, 도대체 우리는 당신들의 형제들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는 한 어머니의 자녀들이 아니란 말인가? 당신들이 우리를 대적해 그러한 잔인한 법령을 반포하다니 우리가 왜 다른 모든 민족과 방언들과 다르단 말인가?”78)
(207.1)
 반유대정책을 위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취한 이러한 억압적인 법령들은 유대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에도 널리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예루살렘교회의 인종적 구성과 신학적 경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후자와 관련해서 유세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207.2)
이처럼, 그 도시에서 유대민족이 없어지고, 그곳에 고대로부터 거주하던 사람들이 완전히 타파되자, 그곳은 다른 종족들이 이주하였고, 그 결과 이름이 바뀌어 로마인들의 도시가 되었는데, 그 명칭은 아엘리우스 아드리아누스안(Aelius Adrian)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아엘리아(Aelia)로 불려졌다. 그리고 그곳의 교회는 이제 이방인들에 의해서 채워졌고, 할례 받은 감독들을 대신해서 그 교회를 이끈 첫 번째 사람은 마르쿠스(Marcus)였다.79)
(207.3)
 하드리아누스 칙령의 결과로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감독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대체되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 그 두 그룹 사이에 분명한 차이를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지적해 준다. 그 차이는 인종적 요소에 한정되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유월절과 안식일과 같이 독특한 유대인의 절기들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인 경향도 역시 포함되어졌음을 우리는 추측하게 된다. 이러한 추측은 에피파니우스의 증언에 의해서 지지되는데, 그는 유월절 의식이 거행되는 날짜와 관련된 논쟁에 대하여 장황하게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 고 있다. “그 논쟁은 할례 받은 유대인 감독들이 추방된(A.D. 135년) 이후에 일어났다(εταράχθη, 문자적으로는 선동되었다).”80) 에피파니우스 감독은 A.D. 135년까지 예루살렘교회를 관리했던 15명의 유대계 그리스도인 감독들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였는데, 그들은 스스로 사도헌장(Apostolic Constitutions)으로 알려진 문서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때까지 14일교도(Quartodeciman)들의 유월절을 준행하였다. 그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규칙이 주어졌다. “그대는 시간의 계산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할례 받은 자들로부터 나온 그대의 형제들과 동일한 시간에 그것을 거행할 것이다. 그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켜라.”81) (208.1)
 에피파니우스의 기록이 항상 믿을만한 자료는 아니지만, 예루살렘교회가 A.D. 135년까지 14일교도들의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과 그 시기에 논쟁이 발생하였다는 그의 정보는 몇몇 이유 때문에 믿을만한 가치가 있다. 그 기록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자료들로부터 예루살렘교회의 신학적 경향에 대해 우리가 알게 된 내용들과 잘 조화된다. 더욱이, 이 사례에서 에피파니우스 감독은 단지 아우디안파(Audians, 유월절 시간에 대한 니케아 회의의 결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분파)가82) 니산월 14일에 유월절을 거행함으로써 그들이 사도들의 사례와 권위를 따르고 있었다(사도헌장에 표현된 것처럼)고 믿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단언된 사도적 교령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그는 다만 니산월 14일 대신에 마침내 부활절 일요일 날을 채택하므로 모두가 신앙의 일치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사도들의 의도였기 때문에, 아우디안파는 그것의 의미를 오해한 것이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유월절의 거행 일정과 관련된 그 논쟁은 “할례받은 감독들이 추방된 이후에 일어났다”는 그의 언급(그것은 매우 잘 알려지고 받아들여진 사실이었다)은 위에서 그가 제시한 그러한 해석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잘 보여 준다. 한 예는 바로 그가 그 시기 이전부터 14일 교도들의 계산법이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이다.83) (208.2)
 그 유월절 논쟁은 분명하게 14일교도들의 유월절 관습을 포기하고 부활절 일요일을 새로운 제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소수 그룹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 분명했다.84) 유월절의 날짜와 관련된 논쟁이 이방인 교인들과 지도자들로 예루살렘교회가 재구성되도록 하게 한 원인이 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유대인 정책이 수립되기 이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정책이 수립된 시기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두 가지의 내용을 시사해 준다. 첫째로, 원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었던 그 교회는 그 때까지 유월절, 안식일과 같은 유대의 종교 제도에 기본적으로 충실 했었다. 둘째로, 유대 종교 관습에 대해 황제가 새롭게 취한 억압적인 조처로 인해 특별히 예식 달력에 분명한 변화가 야기되었다. 이 문제는 부활절 일요일과 주간 일요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좀 더 고찰 될 것이다. 그 연구를 통해서 상호 연관성을 가졌었고, 여전히 그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그 두 절기들이 분명히 동일한 원인으로 인해 동일한 장소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2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