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5장 예루살렘과 일요일
 우리가 앞서 언급했던 것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A.D. 58-60년)은 예루살렘교회가 율법에 대한 준수에 헌신했음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가 된다. 바울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행 20:16) 갔으며, 빌립보에서 “무교절을 지냈다는(행 20:6) 누가의 언급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규범적인 유대의 예식 달력에 의해 생활을 조절했음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분명한 것은 예루살렘 그 자체에서 발생했던 사건의 전말에 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한(행 21:19) 후에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행 21:20, 21). (194.2)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이 유대 종교 전통에 뿌리 깊은 충성을 다한 것은 자명하다. 야고보와 장로들은 그들의 교회에 수만 명의 유대인 신자들이 “다 율법에 열심이 있는 자”(행 21:20)들이라고 바울에게 말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심지어는 그 사도가 모세에 의해 전해진 할례와 같은 조상들의 관습들을 시행하지 말도록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설득시켰다는 소문에 맞서도록 권면했다. 그들의 염려가 기우였음(사실 그것들이 진실이라는 증거는 없다)을 믿는 마음으로,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로 하여금 분명히 의식율을 범하였었던 4명의 교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 결례를 행함으로 그에게 부과된 부당한 비난이 잘못된 것이며, 율법을 준수하고 있다(21:24)는 것을 증명해 주도록 제안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루살렘교회의 다수의 신자들과 그 도시 안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은 스스로 그 사도가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따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194.3)
 렌스키가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팔레스틴에 사는 유대인 신자들로 하여금 바울이 조상들의 규례들을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야 한다고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이 염려하고 있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바울에 대한 잘못된 소문들로 인해 아마도 교인들이 고민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정결한 음식만을 먹고, 안식일을 지키는 등 유대인들의 삶의 방식을 여전히 따르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50) 이것은 저들이 복음을 받아들여도 그들의 삶의 방식에 특별한 변화를 요구하지 않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수만 명”의 유대인들(행 21:20)이 쉽게 개종하도록 하는 원인이 되었다. (195.1)
 유대교의 종교적 관습들에 대한 예루살렘교회의 이러한 대단한 집착은 아마도 기독교계의 모(母)교회를 그들의 종교적 삶의 이상적 모델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을 당혹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독교사상은 유대사상의 뿌리와 줄기로부터 일어났다는 것이다. 초기 유대인 개종자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그들의 종교적 골격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차원에서 그들의 종교적인 삶을 고양시켜준 메시아적 기대에 대한 성취로 보았다.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점차적으로 그림자를 실체로부터 분리시키고, 일시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5.2)
 바울의 행위 또한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성전에서 정결케 하라는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양보했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려운데, 일례로 그는 벨릭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때 그 사건을 언급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행 24:17, 18). 어떤 사람은 제안하기를, 사실상 사도 바울은 이미 겐그레아에서 자진해서 나실인의 서원을 했(행 18:18)기 때문에, 그의 서원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성전에서 희생을 드릴 계획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서원을 하였다는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 이 가정을 입증해 준다.51) 게다가 홀트(F. J. A. Hort)가 진술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그가 서원을 시작해서 완성할 수는 없었다.”52) 그러므로 바울이 유대인의 진영과 이방인의 진영을 서로 더 친밀하게 이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민족을 구제할 제물을 가지고”(행 24:17) 오려고 계획했었다고 추정하는 것은 그럴듯해 보인다.53)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바울은 역시 율법과 관례들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충성을 가시적으로 표현해야할 필요를 분명히 느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율법을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사도 바울이 생각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유대의 종교적 규례들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그의 유대인 형제들에게 본의 아닌 변호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도의 태도는 안식일의 폐지와 일요일 준수의 도입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고자 하는 그 어떤 노력도 신뢰성이 없는 것임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196.1)
 예루살렘으로부터의 도피와 관련된 그리스도의 권면 또한 이 점에서 중요하다. 마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그의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권고를 이렇게 기록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24:20). 이미 이 구절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이 말씀이 로세(E. Lohse)의 주장처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안식일이 준수되고 있는 한 실례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54) 이 말씀은 안식일 준수에 대한 예루살렘교회의 관심을 잘 반영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단순히 예루살렘이라는 그 도시에 대해 실질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초기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마태복음은 팔레스틴에 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아람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197.1)
 예루살렘교회와 관련된 신약성서의 자료들에 대한 지금까지의 분석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최초의 구성원들과 그 공동체를 지도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안식일 준수와 같은 유대의 종교적 규례들을 철저하게 신봉하던 개종한 유대인들이었음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교회가 A.D. 70년에 그 도시가 멸망하기 전부터 일요일 예배를 채택했을 것이라고 가정하기는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지도자들과 회원들이 그 교회 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 미루어 보건데, A.D, 70년 이전에 어떤 교회 혹은 어떤 지역 내에서 일요일 준수가 채택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 사회의 전문가로 잘 알려진 데이비스(W. D. Davies)는 그 시기의 종교적인 상태를 다음과 같이 견결하고도 명백하게 요약하고 있다. (197.2)
모든 곳, 특별히 로마제국 내의 동쪽 지역에는 외관상의 생활 방식이 유대인들의 삶의 방식과 두드러진 차이가 없어 보이는 유대인 그리스도 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연히 그 복음이 유대사상의 연속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체결하시고 죽으심으로 인치신 그 새 언약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었던 언약이 효력을 상실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유월절, 오순절 절기를 지켰고, 성전 예식을 거행하였다. 할례도 역시 계속해서 거행하였고 매주일의 안식일도 지켰으며 음식과 관련된 모세의 규례도 따랐다. 몇몇 학자들에 따르면, 그것들은 너무 확고했기 때문에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때까지도 계속 유효했으며, 그 규례들은 기독교 운동에서도 주요 요소들이 되었다.55)
(198.1)
 A.D, 70년 이후의 예루살렘교회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가 A.D. 70년에 그 도시가 파괴되기 직전에 도시를 탈출한 후 안식일 준수 대신에 일요일 예배를 채택했다고 보는 것은 가능한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 도시를 버리고 펠라(베뢰아 북쪽에 위치한 트랜스요르단의 도시)로 이주한 역사적 중요성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레브레톤(J. Lebreton)은 그 사건의 중요성을 적절하게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98.2)
그 탈출은 예루살렘교회에게 결정적인 결과들을 가져다주었다. 유대교 및 성전과의 연계된 마지막 연결 고리는 끊어졌고, 그들이 애정을 쏟았던 그 장엄한 건축물들과 의식들, 그리고 유물들은 끝내 사라졌다. 이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버리게 하셨다. 그래서 이 탈출은 마침내 그들이 유대인들의 견해를 떠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들은 가장 엄청난 고난의 시간에 예루살렘을 버리고 떠났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민족의 신앙이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구원을 갈망하게 되었다.56)
(198.3)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 도시를 포기하므로 그들은 안식일과 같은 유대의 제도들도 역시 멀리하는 결과를 가져왔는가? 레간(F. A. Regan)은 그의 학위 논문에서 바로 이러한 입장을 취하면서, A.D. 70년은 안식일과 일요일 사이에 결정적인 분리가 발생한 때로 기록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기록한다. “안식일과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 사이에 발생한 결정적인 분리가 이루어진 특별한 사건을 지적할 수 있을까? 가장 가능성 있는 날짜는 아마도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날이 될 것이다.”57) (199.1)
 예루살렘의 파괴와 그곳으로부터의 탈출은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미 A.D. 70년 혹은 그 이후에 팔레스틴에 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 준수를 포기하고 일요일 준수를 채택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주장을 부인하는 중요한 역사적 징조들이 있다. 보다 더 적절한 역사적 자료들 몇 개를 간단히 살펴보자. (199.2)
 역사가 유세비우스(A.D. 260-340년 경)와 에피파니우스(A.D. 315-403년 경)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정보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포위할 때(A.D. 135년)까지 예루살렘교회는 개종한 히브리인들로 구성되었으며, “할례 받은 자,” 즉 유대인 혈통을 가진자들로부터 선출된 15명의 감독들에 의해 관리되었다.58) 그들은 기본적으로 유대의 종교적 관례들에 충성을 다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인 그리스도인 그룹의 한 부류인 에비온파의 보수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모두는 “율법의 문자적인 준수를 열정적으로 고집하였다”는 것이다.59) (199.3)
 에비온파
 에비온파 내의 자유주의 그룹이 “안식일과 그 외의 나머지 유대인들의 규율” 뿐만 아니라 “구세주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서 주의 날”을 지켰다는 유세비우스의 진술은 몇몇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처음부터 일요일을 준수했어야 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주장한다. 그 가설에 따르면 이러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이탈한 이후에 이방인 교회의 예배일을 받아들였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 논제의 약점은 그것이 정당성이 없는 몇 가지 추측에 의존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켰던 에비온파의 보수주의 그룹은 “몇 가지 이유나 혹은 다른 이유들로 인해 나중에 일요일 준수를 포기하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배교한 자들을 대표하는 반면에, 일요일을 준수했던 자유주의 그룹은 ”유대계 기독교의 고유의 일요일 예배를 추종하던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추측한다.60) 사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율법을 깊이 존중한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특성을 고려해볼 때, 자유주의자였던 사람들이 후에 보수주의자로 변했다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였다는 것을 믿기는 어렵다. 에비온파에 대한 유세비우스의 기록은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 거의 250여년이 지난 후에 작성된 것이었으며, 일요일 준수를 언제 채택했는가와 관련된 내용은 상술되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보다 이른 시기의 자료에서 이레네우스(A.D. 130-200년 경)가 유세비우스의 기록과 거의 동일한 기록을 남기고 있지만, 그 역시 일요일 준수와 관련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하라.61) 따라서 교회의 주요 집단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중의 한 그룹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안식일을 준수하면서도 나중에 일요일 준수를 채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200.1)
 또 다른 잘못된 추론은 에비온파가 초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한 다거나 혹은 적어도 그 대표 그룹들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두 집단 다 안식일 준수를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된 입장에서 그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에비온파의 기독론은 그리스도를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람, 즉 마리아가 한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얻은 자식이라고 여기는 점에서 사실상 영지주의의 기독론과 같다.62) 그러한 기독론의 오류가 초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런 근본적인 교리상의 차이 때문에, 다니엘루가 잘 언급했던 것처럼, 에비온파는 “아람어를 사용하던 1세대 그리스도인들, 다시 말해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후 트랜스 요르단으로 피했던 그리스도인들의 계승자들과 전혀 혼동할 이유가 없었다.”63) 사실상 에피파니우스가 제공해준 정보에 기초해서 마르셀 시몬(Marcel Simon)은 주장하기를 “에비온파는 최초의 유대계 그리스도인과 기독교가 형성되기 이전의 유대교 분파 사이에서 일어났던 연합의 결과로 나타난 분파”라는 것이다.64) (201.1)
 이 이단적 유대계 그리스도인 분파의 기원은 신약성서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유스티누스의 시대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기독론적 이설이 아닌 율법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경향에 의해 그 특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한쪽 부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나 안식일 준수 혹은 다른 의식들을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다른 쪽 부류는 “이방인들에게 모든 점에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살도록 강요하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65) 유스티누스의 설명에 따르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그 온건한 그룹이나 엄격한 그룹 모두 안식일 준수를 강조했다는 사실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일요일 준수를 제정했다는 언급은 없다. 만일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그들의 안식일 준수 외에 또 일요일을 채택했었더라면, 유스티누스는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에서 기록된 안식일 문제에 대한 반복 된 논쟁에서 그것에 대해 언급했을 것이 거의 확실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그의 동족, 즉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지적하는 것보다는, 그의 유대인 친구인 트리포와 그의 백성들이 일요일을 준수하도록 장려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방법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유스티누스가 안식일 보다 일요일이 우월하다는 것을 구약성서를 통해 입증하고자 노력했다는 사실과 결부시켜 생각해 볼 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일요일이 준수되었다는 언급이 전혀 없음은 그의 시대에 일요일 준수는 유대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이질적인 것이었음을 추정하게 해 준다. (201.2)
 나사렛파
 초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통” 유대계 그리스도인의 분파인 나사렛파에 대한 에피파니우의 증언에 의해서 또한 지지된다. 그 감독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