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5장 예루살렘과 일요일
 많은 학자들로부터 폭넓을 지지를 받고 있는 견해인 쿨만의 견해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집회는 매일 개최되었고, 산발적으로는 안식일에도 개최되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현현을 기념하기 위해 일요일에 정규적으로 개최되었다는 것이다. 이 중 초기 교회 시대에 일요일이 정규적으로 준수되었다는 주장을 살펴보기 위해서 다시 시간을 소비할 필요는 없는데, 그 이유는 이미 전 장에서 그러한 논제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신약성서의 인용문들에 대한 오해와 시도들의 문헌들에는 없는 신학적 동기에 의거하고 있는 것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185.1)
 매일의 집회와 관련해서, 누가는 적어도 세 가지 사례 속에서 사도들과 신자들이 “날마다”(καθ ήμέραν—πασαν ήμέραν, 행 2:46; 5:42; 눅 24:53 참조) 가르침을 받고 교제를 나누기 위해 함께 모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신자들이 얼마 동안은 오순절의 열광 속에서 사도들 주위에 날마다 모였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오직 제자들만이 성전과 집에서 가르치기(행 5:42) 위한 매일의 프로그램들을 계속 지속시킬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리젠펠트(H. Riesenfeld)가 적절하게 논평했듯이, “사도가 아닌 사람들에게 이것은 과장된 것임이 틀림없다.”24) 이러한 매일의 집회들은 분명히 그 본질상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안된 복음전도 모임이었다. 아마도 새로운 개종자들이 이런 집회에 참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 교인들이 매일의 예배의식에 참여했을 것으로 생각될만한 징후는 없다. (185.2)
 일반적으로 널리 보급되어 있는 견해를 대표하는 쿨만의 견해에 따르면, 안식일은 “이 곳 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지켜졌지만, 그 초기 시기로부터, “교회는 유대교와 신중하게 구별하기위해 주일의 첫 날을 새로운 예배일로 선택하였다”는 것이다.25) 다음 장에서 우리는 유대인들과 구별해야 할 실제적인 절박한 상황으로 인해 안식일 대신 일요일 준수가 사실상 채택되어졌음을 살펴볼 기회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후기에 발전한 것이지 초기 시기의 예루살렘교회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186.1)
 모스나는 추론하기를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온 박해 때문에 매우 이른 시기에 자신들을 성전과 회당으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 후, 종교지도자들은 각 집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냈으며(행 8:3), 그 박해는 조만간 그리스도인들을 유대인들과 그들의 예배 행위로부터 분리시키는 원인이 되었다.(행 9:2).”26) 유대인들의 박해가 그리스도인들을 조만간 유대 종교의식과 관습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원인이 된 것은 의심 없는 사실이지만, 그러한 단절은 곧 바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스데반의 순교 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다메섹에 있는 회당으로 갔(행 9:2; 22:19절 참조)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곳에서 그들을 여전히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후기 봉사에서 사도 바울은 스스로 “자신의 규례에 따라”(행 17:2) 안식일에 회당이나 야외에서 유대인들(행 13:14; 17:2; 18:4)뿐만 아니라 이방인들(행 13:44; 16:13)을 정규적으로 만났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유대교의 집회 장소와 시간으로 부터의 급진적인 이탈 현상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86.2)
 사도행전 6-8장에 기록된 첫 유대인의 박해는 분명히 전체 교회를 향한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는 “헬라화된 유대인”들을 향한 것이었음을 또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최근의 연구 자료들에 따르면, 이들(헬라화된 유대인들)은 외견상으로는 교회의 중심 그룹과는 매우 다른 일반적 사회규범을 따르지 않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그룹들이었다.27)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 흩어지니라”고 기록된 사도행전 8:1에 의해 암시된다. 사도들은 그 도시에 남아 있도록 허락되었다는 사실은 쿨만이 주석하고 있는 것처럼, “전체 기독교 공동체는 이 그룹의 매우 독특하고 대담한 사상들을 공유하지 않았”음을 증명해준다.28) 하지만 대담하게 외치는 선교 활동으로 사마리아의 복음화를 이끌어 낸 그 헬라화 된 유대인들의 영향력은 언급되어야만 한다(행 8:1-40). (187.1)
 어떤 사람들은 이 헬라화 된 그리스도인(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 그룹이 “스스로 안식일과 관련해 예수 자신의 자유로운 태도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29) 일요일 준수를 채택하였다”고 주장한다. 정당성이 없는 추측에 기초한 그러한 가정은 그렇다 치고, 이 헬라화 된 유대인들이 사도들이 주재하고 있던 모(母)교회로부터 일찍이 분리된 급진적인 그룹만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신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그들은 교회의 대변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교회가 일반적으로 새로운 예배일을 받아들이도록 명령 할 수 없었다. 더욱이, 실제로 일요일 준수가 그들의 종교적인 관례를 구별시켜주는 특징 중의 하나였다면, 이것은 특별히 그들의 구두 선교 활동 때문에 교회와의 날카로운 논쟁을 야기시켰을 것이다.30) 그러나 그러한 논쟁의 흔적이 사도행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 회의 때에, 안식일 준수는 그 날의 주제 중에 들어 있지 않았다. 실제로 우리는 이제부터 특별히 예루살렘의 극 보수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에서 정규적으로 안식일이 준수되었음에 대한 압도적인 징후들을 고려해 볼 것이다. (187.2)
 예루살렘교회의 신학적 경향
 예루살렘교회가 일요일 준수의 발생지라고 주장하는 논제가 정당한지의 여부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예루살렘교회의 인종적 구성과 신학적 경향에 대한 연구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판단 자료들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 교회는 열두 사도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던 도시에서 생겨났다. 맨슨(T. W. Manson)이 잘 진술했듯이, 열두 제자들과 그들의 활동에 의해 개종한 첫 개종자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자랐기 때문에 ∙∙∙ 그들은 적어도 오랫동안 익숙한 종교적 관례들의 일부분을 새로운 신앙공동체 내로 유입하였음을 연역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31) (188.1)
 누가는 기록하기를 많은 유대인 개종자들 중에는 “이 도에 복종하”“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있었다는 것이다(행 6:7), 레간(F. A. Regan)은 다음과 같이 잘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그 개종자들이 어떤 점에서 옛 율법과 충돌하였다는 암시를 주지 않는다.”32) 사실, 바가티(B. Bagatti)가 제안하는 것처럼, “그들은 당연히 그들의 제사장 직무를 계속 수행하 였”을 것이다.33) 누가가 말하고 있듯이,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행 21:20)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필시 저들의 제사장 직무는 필요 했었을 것이었다. 이 개종한 제사장들은 교회의 행정 업무에서 야고보와 사도들을 도운 “장로들”과 동일한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행 15:4, 22, 23; 16:4; 20:17, 18). 브루스(F. f. Bruce)는 그 가설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야고보를 의장으로 내세우고 그런대로 나사렛인들의 산헤드린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70명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34) 이러한 정보는 누가에 의해 제공되었는데, 그는 예루살렘교회가 대부분 유대인 개종자들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전에 제사장이었던 람들에 의해 유대의 산헤드린회의 운영방식을 따라 운영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유대 종교의 계율에 대한 그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다음과 같은 누가의 간결한 진술에 의해서 가장 잘 표현되어있다. “저들은 다 율법에 열심이 있는 자라(행 21:20).35) (188.2)
 야고보를 의장으로 선택한 것과 그를 높인 사실은 예루살렘교회가 “유대인”들의 신학적 경향을 더욱 더 확실하게 비준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 중 하나였던 야고보가 아닌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갈 1:19)가 그 교회의 지도자로 선택되어졌는가? 교회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와 이전에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보다도 혈통 인자(子)가 분명히 더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이미 누가와 바울이36) 야고보에 대해 암묵적으로 언급한 것처럼, 이런 논거는 유대—그리스도인에 의해 기원된 몇몇 후대의 작품들 속에서 명백하게 발표되었다. (189.1)
 2세기 팔레스틴 원주민으로 유대인 개종자인 헤게시푸스(Hegesippus)와 야고보의 원 복음(The Proto-evangelium of James), 히브리인들의 복음(The Gospel of the Hebrews), 목수 요셉의 역사(the History of Joseph the Carpenter), 도마의 복음(The Gospel of Thomas), 야고보의 몇 개의 묵시들(the divers Apocalypses of James), 클레멘타인의 인사와 훈계(the Clementine Recognitions and Homilies) 등의 작품들을 쓴 익명의 다양한 저자들은 야고보의 인물됨을 매우 높이고 있다.37)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합법적인 대표자,38) 그리스도 앞에 가장 먼저 나타났던 그리스도의 친 형제,39) 교회의 머리,40) “그를 위해서 하늘과 땅이 만들어진” 존재, 41)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 유일하게 성소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어진” 제사장, 한 제사장의 아들, 그리고 “어머니의 요람에서부터 성인이 된 자”42) 등으로 칭송된다. 따라서 바가티가 잘 요약한 것처럼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눈에는 다음과 같은 사람으로 나타난다. (189.2)
야고보는 ∙∙∙ 베드로나 바울보다 높은 존재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다윗의 후손이었고, 예수님과 같은 혈통으로 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으며, 따라서 성직자 부류의 합법적인 대표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영웅적 행위의 항목으로 율법을 준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특권을 주장할만한 사도는 달리 없었다.43)
(190.1)
 야고보를 이렇게 추앙하는 현상은 후대에 예루살렘교회의 역할이 희미해졌던 시점에서 그 교회의 입지를 고양시킬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에 발전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은 야고보가 그리스도와의 혈연관계에 있음을 주장할 수 있었고, 그래서 합법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가 표면상으로라도 지도자로서 선택되어졌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그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의 ”제사장직과 지도력이 그 도시에서 얼마나 유대교 지향적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유대인들의 율법적 의무사항들에 대한 야고보와 그의 분파들의 기본 태도는 예루살렘에서 일요일 준수가 기원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연구를 더한층 분명하게 해준다. (190.2)
 A.D. 49-50년에 그리스도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요구 조항들에 대해서 심의해야할 상황에 맞닥트렸다. 그 회의는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선동가들이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 15:1)고 가르침으로 안디옥 교회에서 발생한 분쟁에 의해 야기되었다. 이 유대화 된 사람들은 야고보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주장했는데, 반면에 야고보는 그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한 적이 없다고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행 15:42). 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사도들과 장로들”과 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 필요성이 대두되었다(행 15:3). 그 회의에서는 “많은 변론이 있었고(행 15:7), 베드로, 바울, 바나바의 의견 발표가 있었다(7, 12절). 끝내는, 의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이는 야고보가 이렇게 제안했다. 즉,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은 할례 받는 것으로부터 면제되어야 하지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도록 편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고 했다(20-21). (190.3)
 그 제안은 “사도들과 장도들”에 의해 승인되었고, 그것이 확실하게 이행 되도록 즉각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약간은 다른 형태로 세 번씩(행 15:20, 29; 21:15)이나 언급되고 있는 그 회의의 결정은 유대인의 율법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태도와 관련된 몇 가지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그 몇 가지 점들은 주목할 만한 것들이다. (191.1)
 할례로부터의 면제는 오직 “이방인 형제들에게”(23절)만 승인되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혁신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이것은 바울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 공동체를 끊임없이 괴롭힌(갈 3:1; 5:12; 6:12; 빌 3:20) 할례당들이 그 회의가 끝난 이후에도 야고보의 후원 하(갈 2:12)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지적될 뿐만 아니라,(약 10년 후에) “야고보와 장로들”이 바울에게 전한 다음과 같은 명백한 고소 내용에 의해서도 지적 된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행 21:21).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이러한 소문(약 A.D. 58년)에 대해 염려했다는 사실과 그 고소를 무마시키도록 하기 위해서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여 서약을 하도록(행 21:24) 바울에게 제안한 사실은 그들이 여전히 할례와 같은 유대교의 제도들에 얼마나 깊이 연루되었는지를 보여준다. (191.2)
 더욱이, 야고보에 의해 제안되고 그 회의에서 채택된 바로 그 조항들은 이방인들이 율법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자유를 부여받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 교령에 나타난 4가지 훈계들 중, 하나는 윤리(“음행”을 멀리하라)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세 개는 의례에 관한 것이다“ 우상의 제물과 ”목매에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 20절). 의식적 더럽힘과 음식에 관한 규례에 대해 이처럼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실제로 의식 법을 존중하는 태도가 여전히 상당히 우세했음을 반영해 준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편견을 거스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방인 개종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들은 어떤 것이든 먹지 않았고, 심지어는 우상숭배와 관련된 음식이 제공될 것이 분명하였던 자신들의 지방 축제를 용인하지도 않았고 그 축제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또한 교살된 동물의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써 유대인들의 음식법을 따르기로 했다. 이처럼 음식과 이방인들과의 관련성에 대한 유대인들의 도덕관념들을 존중하기 위하여 야고보와 제자들이 쏟은 이런 지나친 관심(행 15:20)을 고려해 볼 때 안식일 준수와 같은 더 중요한 문제가 이의 없이 폐지되었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44) (192.1)
 그러나 “일요일 준수가 모든 사도 시대의 교회에 의해서 승인되어졌고 바울 시대의 교회들에 의해서 채택되어졌다는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가” 되었을 법한 안식일 논의가 그 회의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45) 예배일에 대한 변경과 같은 과감한 변화가 분쟁을 일으킴 없이, 이의 없이 이루어졌고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몇 가지 요소들에 비추어 볼 때 믿기 어렵다.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던 것처럼,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의 관습과 제도들을 존중하고 준수하는데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풍토에서 여전히 매우 존중되고 있던 안식일과 같은 일천여년의 역사를 가진 제도를 바꾼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192.2)
 이 점과 관련해서 야고보가 그의 제안을 지지하기 위해서 한 다음의 진술은 또한 중요하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행 15:21), 야고보의 제안(20 절)과 이 설명적인 진술(21절) 사이의 관계는 다양하게 이해되어졌다. 이것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이 “안식일마다 그리스도인들의 회당과 집회에서 여전히 읽혀지고 있으므로,”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자유가 그 율법의 준수를 침해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한다.46) 다른 사람들은 그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모세의 율법의 교훈들이 매 안식일마다 열심히 가르쳐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동료 유대인 신자들의 편견을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다음의 의미로 해석한다.47) 즉, 그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에 자신들의 규례대로 회당에 참석하여 레위적 규율들을 잘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금지조항을 임의대로 혹은 눈에 거슬리게 이해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었다는 것이다.48) 야고보의 “의견은 아마도 모든 토라가 반드시 이방인들에게 가르쳐져야 한다는 것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겼던 예루살렘교회 내에 존재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오해들을 진정시키려는 의도로 제안되었다”고 브루스는 생각했다.49) (193.1)
 비록 위의 해석들이 야고보의 소견을 다른 사람들(이방인 그리스도인, 유대인 그리스도인, 그 둘 모두,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모든 해석들은 야고보가 회당에서 매안식일에 관례상 선포되고 읽혀졌던 모세의 율법이 여전히 본질에 있어서 구속력을 가지고 있음을 재확인해주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 회의에서 야고보가 모세의 의식율에 대해 그처럼 엄청난 존중심을 나타낸 사실과 안식일에 회당에서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낭독과 설교가 관례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명백하게 언급한 사실은 안식일이 이미 일요일로 대체되었다는 가정을 단호히 배격하는 증거이다. (1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