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중심, 사람의 중심이 있는 책
 인체의 한가운데를 헤집으면 그 중심에는 심장이 있다. 다른 장기(臟器}들도 살아서 저마다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모두 잠잠히 움직이는데, 유독 심장만은 고동을 치며 온몸에 맥박을 일으킨다. 맥박을 타고 뜨거운 피를 온몸에 보낸다. (15.1)
 성경 한가운데를 열면 으레 시편이 가슴을 펴보인다. 그리고 중심을 드러내 놓는다. 그도 그럴 것이, 1,189장으로 되어 있는 성경의 맨 가운데 장이면서 동시에 가장 짧은 장이기도 한 것이 시편 117편이기 때문이다. (15.2)
사람의 중심(中心)에는 심장(心臟)이 있어 고동치듯, 성경의 중심에는 시편이 있어 독특한 율동(律動)으로 고동치며 영혼에 뜨거운 피를 보낸다.
(16.1)
 심장이 고동을 치며 맥박을 일으키듯, 시편은 리듬이 없는 산문(散文)이 아니라, 글의 맥박인 특이한 율동(律動)을 가지고 심령을 고동치게 한다. (16.2)
 시편에서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 인간의 중심(中心)을 경험한다. 거의 3천년 전, 파란 만장한 생을 살며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용기와 좌절, 원망과 감사로 사슴의 가슴처럼 쉴새없이 고동치던 다윗의 심장을 우리는 지금도 시편의 맥박을 통해 그대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의 애환(哀歡), 그의 애증(愛僧)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애가(哀歌)에서 그와 함께 울고, 그의 참회 시에서 그와 함께 통회하고, 그의 감사 시에서 그와 함께 감사하는 변함없는 인간 영혼의 동질성에 공명(共鳴)하고 공감(共感)하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도 시편을 “영혼의 각 부분에 대한 해부학”이라 부르고, “인간이 느끼고 있는 감정 중에 이 시편에 거울처럼 드러나지 아니한 것은 없다”라고 했다. 그 난감했던 종교 개혁 시절, 시편에서 위로와 힘과 피난처를 찾았던 루터도 “시편에서 우리는 모든 성도의 심장을 들여다보게 된다”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야기했다. 시편에 그려진 예전 성도들의 결코 순조롭지만 않았던 기복이 심한 영혼의 심전도(心電圖)에서, 오늘 우리는 구급(救急)이 필요한 심령의 유고(有故)를 발견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놀라운 처방을 시편의 하나님에게서 찾게 되는 것이다. (16.3)
 온몸으로 읽는 책
 시편은 눈으로 읽는 서사시(敍事詩)가 아니고, 가락이나 운(韻)을 따라 읊는 일반 서정시(敍情詩)도 아니다. 흔히 대하는 시들처럼 인위적으로 음운(音韻)을 맞춘 것이 아니라 생각의 구조에 리듬을 맞춘 독특한 형식으로, 생각으로 읽고 온몸으로 반응하게 한 체험의 율동시(律動詩)이다. 오늘날도, 40퍼센트가 이러한 시로 이루어진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자주 머리와 몸을 함께 앞뒤, 상하로 흔드는 유대인의 관습에서, 몸으로 읽는 시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음조(音調)는 단순하지만 부드럽게 높낮이를 반복하며 위로와 비탄, 감사와 탄원 등 벅찬 감동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몸으로 읽는 시가 시편이다. (17.1)
 시의 형식이 아니라 생각에 리듬을 일으키기 위하여 시편은 여러 형태의 대구법(對句法)을 사용했다. 첫째줄과 같은 내용을 둘째 줄에서 다른 표현으로 강조하는 동의(同義) 대구법을 비롯하여, 서로를 정면으로 충돌시키는 반의(反意) 또는 대조(對照) 대구법, 강도(强度)를 더해가는 점층(漸層) 대구법, 몸을 비틀 듯 앞뒤 내용을 X로 묶어 긴장을 높이는 교차 대구법, 그 밖에 종합 및 상징적 대구법 등을 써서 그 뜻이 머리를 지나 심장에 와닿을 때까지 심화시켜, 오장 육부가 한데 엉킨 속사람의 탄원이 되게 한다. 그리하여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나이다”(143편 4절)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103편 1절)는 깊은 곳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편에서, 참으로 인생살이가 답답해질 때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吐)하”는(62편 8절) 것이 무엇임을 토한 후에 후련해진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17.2)
 시(時)로 지은 성소(聖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다. 가정에도 계시고, 직장에도 계시고, 산에도 들에도 어디에나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장소를 택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친히 계시겠다고 하신 곳이 있었다. 바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聖所)”(출애굽기 25장 8절)였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애굽기 25장 22절). 옛날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모든 감사와 찬송, 허물과 죄, 실수와 연약함을 가지고 성소에 와서 때로는 감사의 제사를, 때로는 속죄의 제물을 그리고 어떤 때는 화목 제물을 드렸다. 성소는 모든 백성이 같은 거리에서 쉽사리 올 수 있도록 진영의 한가운데 지어졌다. 거기서 높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죄로 낮아지고 허물로 연약해진 인간을 만나 죄를 사하시며 상한 심령을 싸매시고 저는 다리를 힘있게 하셔서 사슴처럼 뛰게 하셨다. 성경의 한가운데 있는 시편에서 우리는 시(時)로 지은 성소를 보게 된다. 죄와 허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고,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임을 깨달은 죄인이, 찢겨져 상한 심령을 제물로 가지고 찾아와서 부르짖는 곳이 시편이다(51편 16, 17절). (18.1)
시편의 본명은 ‘찬양들’(praises)을 뜻하는 히브리어의 ‘테힐림’(tehillim)이다. 시 아닌 노래가 없고 노래 아닌 시가 없음을 생각할 때, 시편은 이름 그대로 시집(詩集)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찬송가’이다.
(18.2)
 시편에서 죄인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65편 4절)하게 된다. 그리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인생의 당혹한 문제를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 깨달았”(73편 17절)다고 부르짖게 된다. (18.3)
 실제로 시편은 개인 예배는 물론 성전 예배에 관련되어 크게 쓰여졌다. 시편에서 우리는 예배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보게 된다. 비록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이방의 포로 신세가 되었을 때에라도 그들은 시편 속에 지어진 성소에서 상한 마음으로 제사하고, 감사의 노래로 예물을 드렸다. 시편에 성소와 성전이 그토록 많이 등장하는 일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시편에서 우리는 죄인의 하나님을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경험으로 고백하는 정직한 시인들에게서 듣는다. (19.1)
 성소에서 우리는, 죄로 이간(離間)되고 불화하게 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마침내 화목에 이르는 감격을 본다. 문화와 역사, 교리와 성례(聖禮), 교회 정치 형태의 차이 때문에 어차피 갈라져 서로 등을 돌린 유대교, 개신교, 로마 가톨릭 교회와 희랍 정교가 모두 시편으로 노래하며 함께 영송(絲桶)할 때, 그들은 시편의 하나님께 시편에 고동치는 인간의 중심을 가지고 연합과 화합을 경험하는 것이다. 시편은 하나님, 인간과 천연계, 죄와 구원 등 심오한 신학적 주제를 망라하여 취급하면서도 그것이 결코 논란이 되도록 말의 논리로 다루지 아니하고, 누구나 동감을 가지는 경험에 바탕하여 그것에 시의 옷을 입히고 노래의 날개를 달아준다. 그리하여 어린아이도 깨달을 수 있고 노인에게도 어렵지 않은 신학, 못 배운 사람에게는 쉬우면서도 많이 배운 사람에게는 심오한 말인 평등의 신앙을 선물한다. 시편은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분의 하시는 일을 체험으로 설명함으로써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공의로우심을 함께 깨달아 믿게 한다. 그래서 오직 바보 곧 “어리석은 자”만이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14편 1절)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시편은 이렇듯 하나님을 불신하는 사람들을 말로 설득하려 하지 않고 “와서 여호와의 행적(行積)을 볼지어다”(46편 8절)라고 확신을 가지고 초청한다.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自信)이 있는 것이다. (19.2)
 노래로 부른 기도, 기도로 드린 노래
 시편이 모두 다윗의 시는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사무엘하 23장 1절) 다윗이 썼거나 수집했거나 그의 이름에 돌려지는 시가 시편 150편의 절반쯤인 73편이다. 그리고 3,500년 전 사람 모세의 기도(시편 90편)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포함되어 있고, 모세와 같은 때 광야의 성소에서 봉사하다가 반역을 주도한 형벌로 땅이 꺼져 죽은 고라의 자손들이 조상의 죄에 참여하지 아니하고 성전의 찬양 지휘자로 아름다운 이름을 지키며 찬송을 이끌어 나갔다. 그들의 이름에 돌려지는 시는 12편이나 된다. 역시 같은 레위 지파로 다윗 시대의 성전 음악을 담당했던 아삽의 자손에게 돌려지는 시가 또한 12편이나 되며, 그 밖에 솔로몬에게 두 편(72, 127편), 헤만(88편)과 에단(89편)에게 각각 한 편씩 돌려진다. 그리고 나머지 삼 분의 일에 해당하는 시에는 그 표제(標題)에 아무 연고자의 이름도 붙어있지 않아 쓸쓸하게도 ‘고아의 시’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20.1)
 150편이나 되는 시가 지금처럼 이렇게 한데 묶여진 데는, 기원전 5세기의 학자요 레위인 제사장으로 바벨론 포로 귀환과 예루살렘 재건에 크게 이바지한 민족 지도자 에스라의 숨결과 손길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시편(137편)에는 바벨론 포로 시절의 서러움과 외로움을 신앙으로 달랜 고아의 시가 포함되어 있어, 시편에 포함된 시들은 모세 때인 기원전 15세기부터 바벨론 포로 이후 시기인 기원전 5세기까지 1천 년간 기록된 시들이 편집되어 있는 셈이다. 멀리는 3,500여년, 가까이는 2,500여년 전의 시를 우리는 오늘에 읊고 부르며,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고동치는 심장을 가지고 사는 우리 인간에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셔서(히브리서 13장 8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는(시편 100편 5절)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하고 있다. (20.2)
 시편의 본명은 ‘찬양들’(praises)을 뜻하는 히브리어의 ‘테힐림’(tehilhm)이다. 오늘날 쓰고 있는 ‘시편’(Psalms)은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옮긴 칠십인역 성경에서 ‘현악의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들’이라는 뜻의 헬라어 ‘(프)살모이’(psalmoi)에서 나온 말이다. 시 아닌 노래가 없고 노래가 아닌 시가 없음을 생각할 때, 시편은 이름 그대로 시집(詩集)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찬송가’이다. 성악은 물론, 비파와 수금과 제금 그리고 나팔을 함께 불며 성전에서 노래했고(역대하 5장 13절), 전쟁할 때 노래했으며(역대하 20장 19~23절), 특별 의식 때 노래했다(느헤미야 12장 27절). 시편은 하나님 백성의 찬송가였고 노래로 부른 기도였으며, 기도로 드린 노래였다. 노래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고, 찬송 없는 예배를 상상해 보라. 시편 없는 신앙을 오아시스 없는 사막, 심장이 뛰지 않는 정적(靜寂)의 인체에 비교한들 무슨 무리가 있겠는가. (22.1)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