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케언 호와 함께 재림교회의 선교는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전 세계의 교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면서 선교 프로젝트들이 배가되었다. 1893년에 두 문서 선교인이 인도의 마드라스(Madras)에서 책을팔기 시작하였다. 조지아 버러스(Georgia Burrus)는 교회가 인도로 파송한 첫 공식 선교사로, 1895년에 캘커타에 도착하였다. 이듬해에 그녀는 여자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출판 사업은 90년대 말에 이르러 확고하게 되었다. 1894년에 케이프콜로니(Cape Colony)의 총리 시슬로즈(Cecil Rhodes)의 부지 기증으로 짐 바브웨의 불라와요(Bulawayo) 주변의 12,000에이커를 얻었다. 그렇게 하여 솔루시 대회가 시작되었고, 이는 오늘날의 솔루시 대학교(Solusi University)이다. 호주의 아본데일 대학교(Avondale College), 아르헨티나의 리버 플레이트 대학교(River Plate University) 그리고 독일의 프리덴사우 대학교(Firedensau University)가 20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설립되었다. (32.4)
 H. 교회 재조직
 1900년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1,500명의 일꾼과 75,767명의 교인을 갖고 있었다. 교회의 행정 조직도 1863년 교회가 처음 조직되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본부는 예전대로 미시간 주의 배틀크리크에 소재해 있었고, 출판소, 대학교 그리고 요양원도 그대로 있었다. 배틀크리크의 행정자들은 그들의 결정들에 영향을 받는 지역들의 상황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소통은 속도가 느렸고 어려운 일이었다. 모든 권한은 대총회장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행정적인 상황의 어려움에 더하여 해외 선교사들은 세 개의 서로 독립된 단체, 즉 “외방 선교위원회”(Foreign Mission Board), 대총회, “의료선교와구호협회”(Medical Missionary and Benevolent Association)에 의하여 파송되고 있었다. (33.1)
 이미 19이년 전에도 교회 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몇몇 조치가 취해졌었다. 1882년부터 유럽의 교회는 지역의 주도권을 허용하는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 1888년의 대총회는 유럽 모델을 따라 북미지역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는 안을 제의하였다. 1894년에는 호주와 뉴질랜드 합회들이 오스트랄아시아 연합회(Australasian Union Conference)를 조직하였다. (33.2)
 엘렌 화잇은 점점 목소리를 높여 분산화를 촉구하였다 “새 합회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연합시키실 것이다. 새 합회들을 조직하는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다.”(GCB 1901, 69). 동시에 그녀는 대총회 위원회가 사업의 모든 분야를 대표하는 철저한 재조직을 제안하였다. (33.3)
 1901년의 회의의 결과로 여섯 가지 주요한 변화가 진행되었다.

   (1) 연합회들의 조직,

   (2) 모든 기관의 소유권과 운영권을 그들이 위치한 지역의 행정부에 전부 양도함,

   (3) 대총회 산하 부서들의 탄생(예를 들면, 안식일학교부, 교육부, 출판부 등),

   (4) 위원회 내에 다양한 지역의 대표자들을 천거함으로 위원회를 강화함,

   (5) 사업이 진행되는 곳에 있는 이들에게 교회 사업의 세세한 부분에 대한 책임을 위임함,

   (6) 대의제적인 대총회 위원회의 탄생. (33.4)
 1901년의 재조직 이후 대총회 위원회는 25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북미에서 6명의 합회장들, 유럽에서 1명의 회장, 호주에서 1명의 회장이 포함되었다. 이에 더하여 부서의 의장들(후에 비서[secretaries]로 불리고 최근에는 부장[directors]이라고 불림)은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더욱 큰 권한이 이 위원회에 부여되었는데, 위원회는 전 세계 교회를 대표하였다. 이 위원회의 의장은 매년 위원들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33.5)
 아써 G. 대니얼스(Arthur G. Daniells)가 최초의 의장이 되었는데, 1922년까지 회장직을 맡았다. 대니얼스는 긴 재임 기간 외에도 언급할 점이 많은 사람이다. 1902년에 그는 교회의 본부를 배틀크리크에서 워싱턴 D.C.로 이전하는 일을 지휘하였다. 또한 그는1901년에 시작된 재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광범위하게 여행하였으며, 교회를 지도하기 위해서는 선교지 현장에 가서 일차적인 정보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대니얼스가 재임하는 기간 동안 해외로 파송된 선교사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다. 이뿐 아니라 그는 목회부의 설립과〈목회(Ministry)〉라는 잡지의 발간을 지도하였다. 그의 저술 중 〈그리스도 우리의 의〉라는 책과 엘렌 화잇의 사역 및 삶에 관한 책인〈변함없는 예언의 선물〉이다. 두 권이 주목을끈다. (33.6)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조직과 함께 생긴 추가적인 발전은 “지회”의 설립이었다. 처음에는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진행되는 사업은 대총회 부회장 한 사람의 감독을 받고 있었다. 1913년에는 유럽 지회 합회를 위한 헌법과 조례들이 승인되었다. 다른 지회들도생겨났다. 1922년에 이르러서는 대총회 행정 위원회의 지부들로서의 지회들이라는 현재의 형태가 발전되었다(참조II. F). (34.1)
 I. 켈로그와의 갈등
 20세기의 첫 10년은 재림교회에 있어서 특별히 어려운 시기였다. 엘렌 화잇은 교회가 배틀크리크에 집중되는 것에 대하여 거듭거듭 경고하였다. 어떤 이들은 1902년 요양원과 출판소가 전소된 사건을 그녀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 대한 응징으로 이해하였다. 어쩌면 워싱턴 D.C.로 대총회와 리뷰 앤드 헤럴드사를 이전하도록 만든 화재보다 더 어려웠던 점은 교회 지도자들과 존 H. 켈로그 의사 사이의 갈등이었다. (34.2)
 능력 있는 의사이자 유명한 외과의였던 존 하비 켈로그는 5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대부분 의학에 관련된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배틀크리크 요양원을 1876년부터 그가 사망한 1943년까지 이끌었다. 건강개혁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켈로그는 수치료, 운동 그리고 채식주의 식단을 지지하였다. 발명가로서 그는 물리치료를 위한 기계들을 고안하였고, 일찍이 고기 유사 식품들을 만들었으며, 최초로 콘 플레이크(corn flakes) 제조하였는데, 이를 그의 동생인 W. K. 켈로그가 후에 상업화하였다. 1895년부터 1910년까지 그는 미국의료선교대학교를 시카고에서 운영하였다. 시카고에서 행한 그의 의료 선교에는 저렴한 식사와 숙소가 제공되는 노동자 숙박소, 미혼모나 극빈자 어머니들을 위한 보호소, 다양한 진료소, 출소자들을 위한 고용 중개소 운영 및 우편 주문 카탈로그 가게 운영이 포함되었다. (34.3)
 1894년에 배틀크리크 직원들은 멕시코에 “과달라하라 진료소”(Guadalajara Clinic)를 개관하였는데, 이는 미국 밖에서 재림교회가 처음으로 시도한 의료 사업이었다. 초기의 시도들은 선교 학교와 요양원으로 성장하였다. 이 기관 및 배틀크리크와 시카고에 있던 기관들은 켈로그의 “국제 의료선교 및 구호협회”(International Medical Missionary and Benevolent)의 소속이었으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소유가 아니었다. (34.4)
 켈로그는 교회 지도자들의 권고에서 이탈하여 독립적으로 행동하였다. 엘렌 화잇은 그에게 지도에 따르라고 거듭거듭 탄원하였다. 배틀크리크 요양원이 전소되자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에게 단 한 채의 건물만 세우되, 그 건물이 5층을 넘지 말 것이며 길이도 450피트를 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그러나 공사가 시작되면서 켈로그가 애초에 합의한 것보다 훨씬 큰 규모와 화려한 구조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켈로그의 책 〈살아있는성전(The Living Temple)〉 은 1903년에 출간되었는데, 범신론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엘렌 화잇이 그의 이설적인 저술을 책망하자 켈로그는 교회를 떠났다. 그의 “국제 의료선교 및 구호협회”에 소속되어 있던 기관들도 그와 함께 떠나게 되었다. (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