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그녀는 넘어져서 둔부에 골절을 당한 지 5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은 배틀크리크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그녀는 오크 힐 공동묘지에 묻힌 그녀의 남편 곁에 안장되었다. (30.2)
 F. 초기 재림교회 역사
 안식일이나 성경 대회에 모였던 선구자들은 1840년대 후반에 성경을 오랜 시간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구하면서 올바른 교리들을 확정짓고자 하였다. 그들은 성경과 조화를 이뤄야한다고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다른 이들을 초청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구원의 문이 닫혔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선구자들의 견해는 바뀌었는데, 그 원인은 그들의 주의 깊은 성경 연구 기별에 관한 엘렌 화잇의 계시들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 점 그리고 1844년 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던 이들의 회심 등 이었다. 1852년에 이르러서 “닫힌 문”“열린 문”이 되었고, 선교적인 열정으로 말미암아 이 작은 무리는 동부의 주들에서 설교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30.3)
 1. 1850년대:출판사업
 뉴욕 주 로체스터에서 시작되어 미시간 주 배틀크리크에서 계속된 출판 사업은 1850년대 재림교회의 사업 운데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오늘날 〈애드벤티스트 리뷰(Adventist Review)〉알려진 주간지의 전신(前身)이 1850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했다. 〈청년 지도자(Youth’s Instructor)〉 1852년에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1849년부터 1854년까지 재림교회의 정기 간행물 사업은 짜종류의 팸플릿을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1852년부터 1860년까지 26가지 책이 발간되었다. (30.4)
 영어 외의 언어로 출판된 인쇄물은 1850년대 말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고 네덜란드어로 번역된 소책자들이 영어를 모르는 이민자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그들이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 떠나왔던 고향에 있는 그들의 친지들에게도 이 인쇄물들이 보내지기를 바라는 희망이 있었다. (30.5)
 1855년부터 1903년까지 유라이어 스미쓰(Uriah Smith)라는 이름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출판 사업을 의미하는 대명사였다. 이 기간 중 몇 해를 제외하고는 스미쓰가〈리뷰〉의 편집자였다. 때때로 그는 교정자이자 사업 운영자이자 부기담당자였다. 글쓰는 일에 소질이 있었던 스미쓰는 기계 조작에도 조예가 있었다. 그는 무릎과 발목이 굽혀지는 의족과 접히는 의자가 달린학교 책상을 발명하여 특허를 받기도 하였다. 요한계시록(1867년)과 다니엘서(1873년)에 관한 그의 저술들은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들(The Prophecies of Daniel and the Revelation)〉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이는 재림교인 문서전도자들이 판매한 최초의 교리 도서였다. (30.6)
 2. 1860년대:조직
 교회는 1860년에 명칭을 정하였고, 1861년에 지역 합회들을 조직하였으며, 1863년에 마침내 대총회를 설립하였다. 많은 지도층 형제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였다. 그들은 조직화는 “바벨론”과 다름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용주의적인 이들은 출판사와 교회 건물들을 소유하기 위하여 합법적인 단체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파하였고, 그들이 우위를 선점하였다. (30.7)
 1860년대에는 건강 기별이 강조되었다 엘렌 화잇이 미시간 주 오체고(Otsego)에서 건강에 관한 계시를 받은 이후로 그녀는 이 주제에 대하여 폭넓은 글을 썼다. 그녀의 남편은 사람들에게 건강의 법칙에 따라 사는 법을 가르치는 자료들을 정리하는 일에 함께하였다. 1866년에 배틀크리크에서 최초의 재림 교회 건강기관이 발족되었다. “서부건강개혁원”에서 환자들은 그들이 병에서 회복되는 가운데서도 건강한 삶의 원칙들에 대하여 배울 수 있었다. 의사들이 잘 알려진 의과대학 출신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 몇 해 동안은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다. 존 하비 켈로(John Jarvey Kellogg)이 뉴욕의 벨뷰 병원 의과대학교(Bellevue Hospital Medical College)를 졸업한 후1875년에 요양원에 합류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1877년에 첫 기관 확장이 있었다. 새로운 세기가 이르렀을 때 배틀크리크 요양원은 9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31.1)
 3. 1870년대:교육과 선교
 1870년대에 두 가지 이정표를 이루는 사건이 일어났다. 1874년 배틀크리크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같은 해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첫 공식 선교사가 유럽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미국을 출발했다. (31.2)
 1872년에 교회가 배틀크리크에 위치한 G. H. 벨(G. H. Bell)의 “실렉트 스쿨”(Select School)을 인수하면서 재림교회의 학교 시스템이 탄생했다. 1874년에 배틀 크리크 대학교가 100명의 학생으로 개교하게 되었다. 엘렌 화잇이 실용적이고 실업적인 훈련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당시에 통용되던 고전적 모델에 가까운 교과과정을 따랐다. 19세기 말에는 고전과정과 학위 수여가 폐지되었다. 배틀크리크 대학교는 1901년에 문을닫은후 미시간주 베리언 스프링스(Berrien Springs)에서 임마누엘 선교 대학교(Emmanuel Missionary College)로 다시 문을 열었다. 새 학교는 교사와 목사를 훈련시키는 일에 특화되었다. (31.3)
 존 네빈스 앤드루스(Jphn Nevins Andrews, 1829-1883년)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공식적으로 해외로 파견한 첫 선교사였다. 1874년 앤드루스는 어머니를 잃은 그의 두 아이와 함께 리버풀을 경유하여 스위스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재림교인 신자들을 방문하고 전도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인정한 대로 육체적으로 약한 학자였기 때문에글을 쓰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1876년 스위스의 바젤에 출판소가 세워졌다. 앤드루스는 영어와 독일어뿐 아니라 프랑스어로도 재림교회의 교리들에 관하여 폭넓은 저술을 남겼다. (31.4)
 1860년대에 미국의 남북전쟁 동안 앤드루스는 워싱턴 D.C.에 있는 교회를 대표하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이 비전투복무 입장을 옹호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는 또한〈안식일과 주일 중 첫째 날의 역사(History of the Sabbath and the First Day of the Week)〉를 기술하였는데, 그 마지막 증보판은800쪽이 넘는분량이었다. (31.5)
 1870년대에 이룬 또 하나의 발전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중요한 것이었다. 십일조 제도가 채택되어, 각 교인에게 자신의 수입 중 10분의 1을 드리도록 촉구했다 1850년대에 선구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여하신 임무라고 느꼈던 사업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고투했다. 1863년에 제임스 화잇은〈리뷰 앤드 헤럴드〉에 하나님이 수입의 10의1 미만은 요구하실 수 없으며, 이는 그분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과 같은 것이었다고 기술하였다. 그때부터 수입에서 십일조를 드린다는 생각은 점점 더 일반화되었다 1876년의 대총회 회기는 모든 교인들이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어떠한 원천의 수입에서든 그 10분의 1을 헌신”하여야 한다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나아가서 목사들이 그들의 교인들에게 이 제도에 대하여 교육하도록 하였다. 1879년의 대총회 회기에서는 4월 17일에 다음과 같은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결의. 우리는 모든 곳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이 이 제도[십일조]를 확고하게 그리고 전심으로 지지하도록 요청하는 바이며, 이는 사업의 재정적 상황을 발전시킬 뿐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도 커다란 축복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Business Proceedings” 1870, 133). 십일조는 주님의 것이었으며(레 27:30), 목회 사역을 운영하는 데 사용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해외에서 교회를 확장하는 데 필요한 탄탄한 재정적 토대가 세워졌다. (31.6)
 G. 19세기의 종막
 1880년대에는 이미 그리스도인들이던 자들에 의하여 지도된 해외 선교가 엘렌 화잇이 유럽에서 체류한 일 그리고 미국의 교회 잡지에 그녀가 유럽에 관하여 쓴글들로 인해 가속화되었다. 동시에 다른 대륙들에서도 주로 문서 선교인들에 의해 선교가 진행되었다. S. N. 해스켈(S.N. Hastell)이 이끄는 한 무리의 선교사가 1885년 호주로 항해했다. 1886년에는 남반구 최초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멜버른에 조직되었다. 1879년에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최초의 전단지들이 브라질에 상륙했으며, 독일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10년 내에 여러 가정이 안식일을 지키게 되었다. 1888년에는, 선원으로 살다가 캘리포니아에서 양을 치던 일에서 물러나 자급 사역자가 된 에이브럼 라 루(abram La Rue)가 홍콩의 부두에서 영어를 구사하는 선원들을 대상으로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네바다 주 출신의 한 광부는 남아프리카로 다이아몬드를 캐러 가던 길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출판물들을 가지고 갔다. 1885년경에는 첫 회심자가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곧이어 그는 피터 웨슬스(Pieter Wessels)라는 다른 남아프리카인과 합류하게 되었는데, 그는 성경을 통하여 제칠일 안식일이 올바른 예배일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32.1)
 1880년대에는 교인수가 두 배로 증가하였다(15,570명에서 29,711명으로). 그러나 이 시기의 현저한 사건은 1888년의 미니애폴리스 대총회였다. 이 회의에서 젊은 편집자들이었던 앨런조 T. 존스(Alonzo T. Jones)와 엘리트 J. 왜거너(Ellet J. Waggoner)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일련의 기별들을 전하였다. 엘렌 화잇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강조하는 것에 대하여 찬성하였다. 교회의 몇몇 지도자는 존스와 왜거너의 가르침이 그들이 교회의 임무라고 인식해 왔던 안식일을 전하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을 높이는 일에 지장을줄까봐 두려워하였다. 오해와 분열이 이 회의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이 회의 후에 엘렌 화잇과 이 두 젊은 설교자는 대륙을 횡단하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설교하였다. 많은 교인이 이 새로운 역설을 환영하였으나 다른 이들은 십자가가 아니라 율법을 재림교회의 핵심으로 바라보는 율법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회의 이후에 엘렌 화잇이 펴낸 저술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더욱 강력한 강조를보여 준다. 예를들어 다음의 진술을보라. “우리의 소망의 유일한 근거는 우리에게 입혀주신 그리스도의 의에 있고, 또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의에 있다.”(정로의 계단, 63). 미니애폴리스 대총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는 기별을 새롭게 강조하는 전환점을 이뤘다. (32.2)
 1890년대 말엽에 ‘피트케언’(Pitcairn)이라는 선교용 선박이 태평양의 피트케언 섬에 도착하였다(이 선박은 미국 내 재림교회들의 안식일학교 헌금으로 건조되었다). 제임스 화잇은 바운티(Bounty)에서 일어난 폭동 소식에 자극을 받아 1876년 그곳에 출판물을 보내게 되었다. 재림교회 선박의 목수인 존 테이(John Tay)는1886년에 피트케언에서 5주를 보내면서 주민들에게 호소하여 안식일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