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4년 10월 23일 하이럼 에드슨(Hiram Edson)과 한 밀러주의자 친구는 자신들과 함께 실망을 겪은 이들을 격려하러 나섰다. 그들이 함께 기도하며 에드슨의 옥수수 밭을 가로질러 가고 있을 때, 에드슨은 갑자기 한 번뜩이는 통찰을 얻었다. 밀러주의자들은 정결하게 될 성소(단 8:14)가 지상의 교회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죄로부터 정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에드슨은 정결하게 될 성소가 지상이 아닌 하늘에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10월 22일은 원형적인 속죄일의 끝이 아닌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지상으로 내려오시기 전 특별한 일을 수행하시기 위해 하늘 성소의 지성소로 들어가셨다. (25.2)
 에드슨과 그의 밀러주의자 친구들은 이러한 빛 가운데서 성경을 다시 연구하게 되었다. 1845년 오웬 R. L. 크로지어(Owen R. L. Crosier)는 에드슨의 관점을 확장시켜 훗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이 취할 입장을 설명하였다. 1844년 10월 22일은 하늘 성소의 정결과 재림 전 조사심판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스도의 지상으로의 재림은 아직 미래의 일이었다. 그 어떤 날짜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가시적인 재림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일치하였다. 그 후에는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하늘에서 왕 노릇 할 천년기가 뒤따를 것이었다. 천년기 끝에 지구는 다시 새롭게 단장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설립이 있을것이었다. (25.3)
 D. 초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가르침
 1844년 이전부터 이미 예배의 날로서의 제7일 안식일(토요일)이 계속 유효하다는 사실은 몇몇 밀러 주의자들에게 관심거리였다. 동시에 레이철 오크스 프레스턴(Rachel Oakes Preston)이라는 제칠일침례교 신자가 그녀의 교회의 출판물 몇을 뉴햄프셔 주의 워싱턴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소개하였는데, 그들은 다른 재림신도들과 함께 “그들의 구속”을 바라고 있었다. 그들의 설교자는 프레더릭 휠러(Frederick wheeler)였는데, 그는 곧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하였고 1844년 말쯤에 이르러 그 회중은 첫 안식일 준수 재림신자들이 되었다. 안식일은 하늘 성소와 더불어이 신자들에게 “현대 진리”가 되었다. (25.4)
 대부분의 밀러주의자들이 죽은 자의 의식적 상태를 믿었지만, 죽은 자들은 무의식 상태에 있으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가르침을 옹호하는 무리가 있었다. 1842년 죽은 자들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는지를 연구한 다음 전직 감리교회 설교자였던 조지스토스(George Storrs)는 스토스의 〈여섯 개의 설교문(Six Sermons)〉 알려진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이 죽은 자들이 선하든 악하든 아무것도 모르며 비유적으로 부활 때까지 잠을 잔다고 가르친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윌리엄 밀러와 다른 지도자들은 이 가르침을 반대하였지만 자신들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자신들의 관점이 옳다는 것을 설득하지 못하였다. 1845년 죽은 자들의 상태나 악한 자들의 영원한 형벌에 대하여 합의하지 못함에 따라, 1845년 알바니 총회에 참석하였던 밀러주의자들은 단지 의로운 자들이 재림 시 그들의 상급을 받는다고만 진술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조셉 베이츠(Joseph Bates), 엘렌 하몬티(Ellen Harmon) 그리고 제임스 화잇(James White) 등 재림교회 지도자들은 곧 있을 부활에 대한자신들의 믿음에 따라성경이 가르치는 조건적 불멸과 수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25.5)
 1845년을 시작으로 초기 재림신도들은 그들의 관점을 팸플릿과 그들의 정기 간행물 그리고 그들에게 우호적인 신문에 출판하였다. 하늘 성소와 안식일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선포하는 소책자와 전단지들이 재림교회 지도자들의 펜으로부터 흘러나갔다. 〈현대진리(Present Truth)〉 첫 호가 1849년에 발행되었다. (26.1)
 1848년부터 1850년까지 “안식일 대회”들이 뉴 잉글랜드 지역 여러 곳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들은 안식일의 가르침을 확증하였고, “셋째 천사의 기별과 관련된 위대한 진리들에 대하여 형제들을” 연합시켰다(J. White 5). 이 회의들에서 신자들은 성경을 연구하였고 올바른 교리의 명확한 이해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 여러 종교 단체의 대표자들이 재림교회 신조의 기둥들에 대하여 일치된 이해를 갖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안식일, 재림 그리고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한 가르침이 포함되었다. 그들의 일치된 신학은 이후 교회의 발전에 기초를 제공하였다. (26.2)
 E. 초기 재림교회 지도자들
 밀러주의 운동에서 배출된 이들 중 가장 탁월했던 이들 그리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설립하는데 지도적 역할을 하였던 이들중에는 조셉 베이츠, 제임스 화잇 그리고 엘렌 화잇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물론 다른 선구자들도 자신들이 새로운 종교적 운동의 설립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그들은 자신들을 진리의 계승자와 무너진 곳을 수보하는 자로 인식하였다. 즉 그들은 창시자가 아니라 개혁자들이었다. 그들은 교리를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발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궁극적으로는 구약과 신약에서 찾았다. (26.3)
 1. 조셉 베이츠(Joseph bates, 1792-1872년)
 교회 설립자 3인조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었던 조셉 베이츠(선원, 개혁자, 설교자)는 1792년 뉴 잉글랜드에서 출생하였다. 베이츠는 15세에 바다로 나가서1820년 선장의 자리까지 승진했다. 그의 자서전은 그의 항해 모험들과 전 세계의 항구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1824년 무렵 회심한 후에는 그가 지휘하던 배 안에서 음주가 금지되었고, 욕설이 금지되었고, “일요일엔 옷을 빨고 고치는 일”이 금지되었다. 그의 해양 생활은 1827년 끝났으며, 곧이어 그는 매사추세츠 주의 페어헤이븐(Fairhaven)에 있는 ‘크리스천 처치’(Christian Church)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의 아내 프루던스(Prudence)는 이미 그 교회의 교인이었다. 상당한 재력이 있었던 베이츠는 사업가로서 자리를 잡았으며, 절제, 노예제 반대 그리고 교육 등 사회적인 문제에 관하여 큰 관심을 보였다. (26.4)
 1839년 베이츠는 재림에 관한 밀러의 해석을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그는 그의 모든 관심을 밀러주의 운동에 쏟았다. 1844년 그는 자신의 집을 팔고 장부를 정리한 후, 설교자가 되었다. 1845년 초반 베이츠는 T. M. 프레블(T.M. Preble)이 작성한 안식일에 관한 기사를 보았는데, 얼마 전 〈이스라엘의 희망(The Hope of Israel)〉이라는 잡지에 출판된 후였다. 그 후 그는 뉴햄프셔의 워싱턴으로 이동하여 프레더릭 휠러(Frederick Wheeler)와 밤을 새워가며 연구한 끝에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다음 해에 베이츠는 “제7일 안식일, 영원한 표징”(The Seventh-Day Sabbath, a Perpetual Sign)이라는 48쪽짜리 소책자를 만들었다. 거기에서 그는 십계명에 기초하여 안식일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도덕적 지침이자 규범으로 제시했다. 이듬해 그 책의 두 번째 판에서 베이츠는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온 세 천사 기별의 맥락 안에 안식일을 두었다. 베이츠는 거기에 등장하는 짐승을 로마 교황권으로 해석하면서 매 주일의 경배의 날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시킨 일이 교황의 권위에 의해 일어났다고 믿었다. (26.5)
 재림, 안식일, 하늘 성소 그리고 수면으로서의 죽음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베이츠는 1849년 미시간을 향해 서쪽으로 여행하였다. 잭슨(Jackson)이라는 곳에서 한 무리의 회심자들을 얻은 그는 1852년 배틀크리크(Battle Creek)으로 이동하였다. 1855년 이후로 재림교인들의 사역은 미시간 주의 배틀크리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교회의 태동기에 여러 합회의 회장직을 맡아달라는 요구가 주로 베이츠에게 들어왔다. 그는 1860년의 회의를 주재했는데, 이 회의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Seventh-day Adventist)라는 명칭이 이제 막 시작된 출판사의 이름으로 채택되었다. 그는 또한 1861년에 미시간 합회의 회장을 맡았다. (27.1)
 베이츠는 건강한 생활습관을 옹호하고 실천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건강한 삶을 살고 비교적 장수했다. 76세에 베이츠는 미시간 주 라이트(Wright)라는 곳에서 1868년 개최된 첫 재림 장막집회를 위해 섭외된 강사 중 한 사람이었다. 18기년 이미 79세가 된 베이츠는 지역 교회에서의 예배 외에 최소한 100개의 집회를 열었다. 그는 배틀크리크의 건강 기관에서 1872년3월 사망하였다. (27.2)
 2. 제임스 스프링거 화잇(James Springer White, 1821-1881 년)
 1821년 메인 주 팔미라(Palmyra)에서 태어난 제임스 화잇은 어려서부터 질병들을 앓았다. 그의 심각한 건강 상태로 인해 그는 19세가 되기까지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그 후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하여 교사 자격증을 얻을 목표로 12주 동안 매일 18시간씩 공부하였다. 1년 동안 교직을 맡은 후 화잇은17주동안 학교과정을 더 이수하였다. 이것이 그가 받은 공식 교육의 전부였다. (27.3)
 제임스는 크리스천 커넥션(Christian Connection)에서 15세 때 침례를 받았다. 2년의 교사생활 후 그는 어머니로부터 밀러주의 가르침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다. 1842년 화잇은 밀러의 설교를 처음으로 들었다. 그 후 그는 곧 스스로 예언 도표를 준비하였고, 말 한마리를 대여한 후 재림 기별을 선포하러 나아갔다. 1843년 그는 크리스천 커넥션의 목회자로 안수를 받았다. (27.4)
 대실망 이전부터 제임스 화잇은 엘렌 하몬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훗날, 1845년 그들이 메인 주 동부에서 광신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할 때 함께 일하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1846년 8월 30일 메인 주 포틀랜드에서 치안판사에 의해 혼인예식을 올렸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게 되었다. (27.5)
 1848년부터 제임스는 자신을 사역에 온전히 바쳤다. 그 후 1848년 후반 매서추세츠 주 도체스터(Dorchester) 회의에서 엘렌은 계시 가운데서 여기저기 흩어진 가난한 안식일 준수자 무리들에게 진리를 설명하는 잡지를 제임스가 발행해야 한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제임스는 1849년부터 〈현대 진리(Present Truth)〉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잡지의 주요 강조점은 안식일 기별 및 성소에 관한 재림 신도들의 견해였다. 1850년 재림교인들은 처음으로 〈애드벤트 리뷰(Adventist Review)〉발행했는데, “지난날 하나님의 놀라우신 행적 가운데서 이루어진 예언의 성취를 보임으로써 신실한 신자에게 기쁨과 힘을 주기 위하여” 발행되었다(Himes, Bliss, and Hale 1). 제임스 화잇이 이 두 잡지의 편집인이었다 그 해11월 두 잡지는〈애드벤트 리뷰 앤드 새버쓰 헤럴드(Second Advent Review and Sabbath Herald)〉 명칭으로 통합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애드벤티스트 리뷰(Adventist Review)〉전신(前身)이었다. (27.6)
 1855년 화잇 부부는 미시간 주의 배틀크리크로 이동하였다. 1860년 제임스는 교단의 명칭을 정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새로 형성된 배틀크리크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출판사가 미시간 주의 법에 따라 1861년 5월 설립된 후 제임스 화잇이 그 사장이 되었고, 그는 또한〈리뷰 앤드 헤럴드(Review and Herald)〉지의 편집인이었다. (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