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라는 명칭은 1860년에 채택되었다. 이 명칭을 선택한 이들은 그들의 독특한 신앙적 신조들, 곧 주 중 일곱째 날을 하나님의 거룩한 날로 지키는 것과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확신에 비추어 그들 자신을 대변하기로 결정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출판 협회가 1861년에 발족되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대총회는1863년에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다. (22.1)
 공식적인 교회의 출범은 1860년대 초반으로 되돌아간다. 교회의 배양기는 수십 년을 거친다. 재림교회 선구자들이 자신들을 신약 전통의 계승자로 보았다는 점에서 그 뿌리는 사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2.2)
 A.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탄생하기 직전의 선구자들
 19세기 초반, 전 세계적으로 성경 해석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의 임박성에 관한 저술을 펴내고 설교하였다.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에 관한 열렬한 연구를 통해 많은 이들은 예언적 기간들이 바야흐로 종결될 때가 되어간다고 결론짓게 되었다. 마누엘 데라쿤자(Manuel de Lacunza)는 칠레에서 태어난 예수회 회원으로, 성경을 20년간 연구한 끝에 〈영광과 위엄 가운데 오시는 메시아(La venida del Mesias en gloria y magestad)〉라는 책을 저술했다. 라쿤자의 저 작은 에드워드 어빙이라는 런던의 설교자에 의하여 번역되었는데, 어빙은 거기에 제1회 앨버리 예언 대회 보고서를 덧붙였다. 1826년부터 1830년까지 매해 개최되었던 앨버리 집회에는 여러 교회와 단체에서 온 성직자들이 모여 재림의 임박성,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도출되는 교회의 의무들”에 관하여 연구하였다(PFOF 3:276). 요제프 볼프(Joseph Wolff)는 1826년 집회에 참석한20명 가운데 한사람이었는데, 그는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두루 여행하며 그리스도께서 1847년경에 돌아오셔서 예루살렘에 천년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고 가르쳤다. 스위스에서는 프랑수아 고상(Francois Gaussen)이 1837년부터 다니엘서의 예언들에 관해 주일 학교에서 강의했다. 여기서 그는 다니엘과 요한 계시록이 세계 역사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 역사가곧끝날 것이라고 가르쳤다. (22.3)
 북미에서 19세기라는 시대는 굉장한 종교적 열성의 시대였다. 이 “대부흥”의 시대로부터 강력한 해외 선교 운동 독특한 찬양을 곁들인 찬양 집회, 주일 학교 운동 그리고 미국성서공회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종교적 사상과활동의 동력 중많은부분이 예언이었다.”(PFOF 4:85). 설교, 팸플릿 그리고 책들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새 천년기의 전조일 수밖에 없다고 선포했다.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적 기간들은 마지막에 다다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이 일어났다. (23.1)
 다른 한편으로 재림교회의 뿌리는 훨씬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에 마르틴 루터는 심판의 날이 300년 이상 지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초적인 “재림신도들”(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자들)은 사도들 자신이었다.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을 큰 기대를 가지고 고대했다(살전 4:16). 이 모든 믿음의 표현들은 궁극적으로 “내가 다시 오리라”(요 14:3)는 예수님 자신의 약속에 기초해 있었다. (23.2)
 B. 밀러주의 운동
 뉴욕 주의 로우 햄프턴(Low Hampton)에서 윌리엄 밀러라는 농부가 자신의 회심 시기인 1816년 성경을 주의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2년의 탐구 끝에 그는 다니엘 8:14의 예언에 따르면 “약 25년 후∙∙∙현재 우리 상태의 모든 일이 종말을 맞을 것이다.”(Miller 12)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밀러는 또 다시 5년을 보내면서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논증 및 그 믿음에 반하는 논증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였다. 그 후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뿐 아니라 그가 믿고 있는 바를 나눠야 할 의무에 대해서도 확신하게 되었다. 독학으로 공부했고 천성적으로 내성적이던 밀러는 그의 예언 연구에서 발견한 바를 일어서서 선포하기가 두려웠다. (23.3)
 1831년 윌리엄 밀러는 하나님께 서약하기를, 그가설교하도록 부탁을 받으면 “가서 그들에게 제가 성경에서 주님의 재림에 대해 찾은 바를 말하겠다.”라고 하였다(위의 책, 17). 밀러가 기도하고 있던 그 시간에 한 청년이 부흥회에 강사로 성경 연구자인 그 농부를 초청하기 위해 길을 가고 있었다. 그의 기도에 대한 신속한 응답에 놀란 밀러는 기도하면서 한 시간을 더 고뇌한 끝에, 가까운 거리에 있던 드레스덴에서 강의하도록 부탁하는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23.4)
 1832년 밀러는 버몬트의 한 신문에 8개의 기사를 싣게 되었다. 1834년 그는 그의 모든 시간을 전적으로 설교하고 저술하는 데 바쳤다. 1836년 그는 책을 펴냈고, 후에 이 책은 연대기와 예언 도표를 포함하여 확장되었다. 1834년 10월에서 1839년 6월까지 밀러의 일지는 직접적 초청에 대한 응답으로 800차례의 강의를 하였다고 기록한다. (23.5)
 다른 교파의 설교자들이 밀러에게 합류하자 신자들의 수가 증가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자들은 “밀러주의자들”(Millerites) 또는 “재림신도들”(Adventists)이라고 일컬어졌다. 1840년 조슈아 하임스(Joshua Himes)는 〈시대의 징조(Signs of the Times)〉를 발행하였다. 이는 방대한 양의 밀러주의 출판물의 첫 발행이 되었다. 같은 해 보스턴에서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총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이 회의는1841년의 두 번째 회의로 이어졌다. 참석한 200명의 사람들은 그들이 대표하는 교파들에서 재림 기별에 대한 책자를 보급하고 설교하는 일에 관한 전략을 제시하였다. (23.6)
 “밤중소리를 통하여 죄인들을 깨우고 그리스도인들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람들 앞에 드높이기 위하여” 1842년부터 밀러주의 장막 집회가 열렸다(Hale, Plumer, and Cole 88). 밀러는 훗날 어림잡기를, 200명의 목사들, 500명의 공중 강사들 그리고 5만 명의 신도들이 많은 다른 교회와 단체에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들의 도표, 책, 정기 간행물을 통해 그리고 큰 장막 집회들 가운데서 밀러주의자들은 당시 동북부 주들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그들은 또한 주류 교회들로부터 반감을사기 시작했다. (24.1)
 밀러주의자들의 광신적 신조들에 관한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신문들은 진실보다는 소설에 가까운 기사들을 내보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은 재림신도들이 승천복(ascension robe)을 준비한다고 말하였다. 밀러주의자들이 늘 맞닥뜨려야 했던 공공연한 조롱으로 1843년에는 그들 중 많은 이가 그들이 속해 있던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24.2)
 C. 대실망
 밀러는 세상이 1843년 어느 때에 끝날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 해 여름이 되자 그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실망은 표했지만, 신자들에게 주님의 오심을 계속해서 기다리라고 권면했다. 1844년 2월에는 한 무리의 재림신도 설교자들(밀러는 포함되지 않았다)이 다니엘 8:14의 2300주야 예언이1844년 가을 이전에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에 이르게 되었다. 얼마 안 가서 구체적인 날짜인 1844년10월 22일이 정해지게 되었다. (24.3)
 재림에 대한 이 새로운 날짜는 카라파(Karaite) 유대력으로 일곱 번째 달의 유대 속죄일 날짜에 기초하여 산정되었다. 우리의 유월절 제물이신 그리스도가 유월절 양이 살해되는 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요제절 날에 부활하셨으므로, 그분이 속죄일에 하늘의 지성소에서 내려와 희년의 시작을 선포하시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합리적이었다. (24.4)
 10월 22일이라는 날짜는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간이 다가오자 열광이 점점 고조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칠월 운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밀러 자신도 1844년 10월 22일이라는 날짜가 올바르다고 결론지은 것은 그 운명적인 날이 오기 불과 2주 전이었다. (24.5)
 엄숙한 기쁨과 커다란 기대감으로 밀러주의자들은 집에서 또 교회에서 1844년 10월 22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기 위하여 모였다. 그러나 오! 그들의 희망은 산산조각 났다. 그들의 실망에 더하여 조롱자들의 조소가 더하여졌고, 설상가상 단지 두려움 때문에 재림에 대한 믿음을 공언하던 자들 중 일부도 조롱하는 무리에 합세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의 운동을 이끄셨다고 확신하던 신실한 자들은 그들이 어디서 잘못된 길로 갔는지 알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24.6)
 대실망 이후 재림을 기대하던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왜 오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그들의 상이한 의견들을 따라 각각 나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2,300주야 예언을 재림에 적용하는 것이 옳았다고 확신하였다. 즉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시간을 계산한 것에 실수가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적은 부류는 그들이 사건과 시간 모두에 있어 옳았다고 생각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자들의 삶에서 “영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해주의자들”(Shpiritualizer)로 알려졌고 그들 중 많은 이가 셰이커 교도들(Shakers)이 되었다. 또 다른 이들은 재림의 새로운 날짜를 정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또다시 실망을 겪게 되었다. 또 다른 이들은 시간은 옳았으나 사건에 있어 오류가 있었다고 여기게 되었다. 바로 이 무리 가운데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창설자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24.7)
 윌리엄 밀러는그 시기 계산의 기초가 된 역사적이고 시기적인 자료들에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예수님의 재림을 계속해서 고대했다.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그의 기대감 때문에 그는 시간이 아닌 사건에 있어서 오류가 있었다고 믿은 무리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켰으며, 그러는 와중에도 그들을 그리스도인 형제들로 대하였다. 그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초기 선구자들과는 달리 하늘 성소, 죽음 후의 수면 또는 안식일 준수 등과 같은 새로운 이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849년 밀러는 곧 오실 구세주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세상을 떠났다. (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