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키나의 그림자 속에서 제6장 승리의 문턱에서 패배를 나꿔챔 (민수기 13~15장)
 40년은 긴 시간이다. 광야의 생활조건은 이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실수이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이 견뎌야 했던 것은 이런 류의 지체였다. 그들의 상황은 그들 세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더 나았다. 왜냐하면 살아서 약속된 땅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길고도 따분한 40년 동안, 그들은 백성들이 그들 뒤에 남긴 무덤들의 자취 빼놓고는 조금도 전진하지 못하고, 목적지 없이 이곳저곳으로 하릴 없이 유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징역 생활을 해야 할 것이었다. (111.2)
 그 40년 간, 여호수아와 갈렙은 모세, 아론, 그리고 미리암과 더불어 가나안에 있었어야 했다(출 2:15-25; 7:7). 그들은 좀 더 옛 세대에 속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기전 수십 년 동안 이미 기다려왔었던 사람들이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이전 임차인들을 추방시키고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위하여 집들을 단기간에 만들려고 계획했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평화롭게 안주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들은 패배가 확정된 자들의 팀에 묶여버린 승리자들이었다. 그들의 상황은 만성적 우울증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111.3)
 마스터 가이드들인 갈렙과 여호수아가 다음 세대에 속하는 힘 있는 십대들을 찾아내서, 패스파인더 군대를 조직하고,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하여 나서려고 하는 유혹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로부터 나오는 것은 애굽-혹은 바벨론-을 떠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다. 그러나 그들은 과오가 많은 그들의 백성들과, 그들의 장례 행렬과 함께 있었다. (112.1)
 40년 동안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릴 없이 지내지 않았다. 그들은 후세대를 훈련시켰고, 그들의 사역은 성공적이었다. 젊은이들은 완전하지 않았지만 가나안을 정복할 시간이 다가오자, 하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기꺼이 그렇게 하고자 하였으며,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여호수아서를 보라). 그것은 군사 훈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나라로부터 일어날 새 생명을 위하여 믿음을 꼴 짓는 신학적 교육이었다, 즉 공동묘지로부터 세미나리를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112.2)
 마틴 루터 또한 그의 주요 필생의 사업으로부터 격리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기다린다는게 무엇인지 알았다. 비텐베르그 대학 정문에 그의 유명한 95개 논제를 게시한 지 4년 후, 그리고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그의 저작물들에 관하여 저 유명한 연설을 한 직후에 루터는 “납치”당했다. 루터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작센의 선제후 프레데릭은 그의 안전을 위하여 외딴 아이제나크 소재의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복면을 한 일단의 마부들을 시켜 루터를 데려가도록 주선했다. (112.3)
 거의 일 년 간 죄수처럼 살았지만, 그는 그 기간을 그저 징역살이가 아니라 봉사의 시간으로 활용하였다. 그가 후일 칭하듯이, “광야”, 혹은“밧모”의 경험기간 동안에, 그는 다른 저술활동과 아울러, 대단히 유명한 번역인 독일어 신약 성경을 번역해냈다. 이것은 복음사업에 대한 가장 위대한, 불후의 기여들 중 하나였다. (113.1)
 만일 우리가 “광야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우리가 하늘 “가나안”을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많은 긍정적인 요소들이 있다. 연합시켜야 할 가족들과 교회들, 가르쳐야 할 아이와 어른들, 나누어주도록 독려하는 일, 전도해야 할 이웃들, 드려야 할 중보기도 등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 그리고 성령의 선물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육성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께 “예”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내내 그분을 전심으로 좇으면서,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한, 우리는 약속된 땅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113.2)
 여전히 미래가 있다
 언뜻 보기에 민수기 15장 1절부터 16절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고 앞의 책 레위기에 속해야 마땅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번제(레 1장 참조)와, 그리고 드리는 자가 일부를 먹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희생제사들에 부수적인 소제나 전제를 위한 지시 사항들을 본다(레 3장, 7장 참조). 동물 희생 제물에 부수적인 이런 것들은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수행하는 사자들에게 고기가 곁들여진, 가루로 만든 떡과 음료를 포함하여, 풀코스 식사를 제공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위한 완벽한 풀코스 “증표(證票)의 식사”를 차렸다(창 18장; 창 19:1 참조). (113.3)
 아브라함은 그가 초자연적 존재들을 접대하고 있으며 여호와께 대한 그의 접대가 진정 희생제사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실제적으로 적용한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예수께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가 어떤 사람들이든 그를 돕기 위해 우리가 하는 여하한 일도 또한 그분을 위하여 하는 것이라고 언명하셨다(마 25:34-40). (114.1)
 민수기 15장의 서두는 왜 예식에 관련된 이 지시들이 여기에 실려 있는지 가리켜준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내게 주어 거하게 할 땅에 들어가서 ∙∙∙ ”(민 15:1,2). 이전 장의 비극적인 이야기 이후에 오는 말씀이어서인지, 이 말씀들은 격려로 가득하며, 여호와께서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 (젊은 세대들)에게 가나안을 주실 계획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그분의 은혜는 그분의 아들의 궁극적 희생을 가리킨 희생제물을 통하여 여전히 얻을 수 있다(요 1:29). (114.2)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 “그 땅의 양식을 먹을”(민 15:17-21) 때 효력이 발생할 다른 지시에도 여분의 격려가 주어져 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원해왔던 것이 아닌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존성을 기억하고, 그분의 부양하시는 능력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시 145:15,16 참조), 그들은 매년 수확하는 곡물로 만드는 첫 반죽 덩어리로부터 떼어놓은 “기부물”(donation)을 그분께 드릴 것이다. (114.3)
 이스라엘 공동체나 개인이 미래에 부지불식중에 어떠한 여호와의 명령 중 어떤 것이든 범한다 하더라도이 죄들이 제거되고 그들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용기를 북돋워준다(민 15:22-29; 레 4장 참조). 하지만 그러고 나서 민수기 15장 30,31절은 강력한 경고를 발한다. 고의가 아닌 죄를 범하는 사람들과 극명히 대조되게, 반항적인 (문자적으로 “손을 높이 쳐든”) 죄인들은 동물 희생을 통하여 용서를 받을 아무런 기회도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비방하고, 그분의 말씀을 경멸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죄의 책임을 지고 “끊어”져 내세를 상실하게 된다. 몇몇 의도적인 죄들은 동물 희생을 통하여 용서받을 수 있었으나(레 5:1,5,6; 6:1-7), 반항적으로 범한 죄들은 그렇지 못했다. (114.4)
 정탐꾼들의 보고에 이어 일어난 반역 이후에 주어지기 때문에(민 13,14장), 이 경고의 취지는 명약관화하다. 즉, 젊은 세대는 그들의 부모 세대가 했던 것처럼 결코 반항적으로,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런 종류의 죄는 아무런 구제 예식도 주어지지 않은, 돌이킬 수 없는 형벌을 초래한다. (115.1)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반항적인 죄의 본보기를 필요로 할 즈음에, 그들이 광야에 머물고 있는 동안, 한 남자가 안식일에 나무 조각들을 거둬들이는 일을 하였다(민 15:32). 그의 행동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선포하셨고(출 20:8-11), 다른 경우들에도 말씀하신(출 23:12; 31:12-17; 34:21; 35:2,3; 출 16:23-30) 십계명 중 하나에 대한 노골적인 위반이었다. 여호와의 명령이 내리자마자 온 회중이 그를 돌로 쳐서 죽였다(민 15:33-36). (115.2)
 그 사람은 그의 세대의 태도를 대표하였다. 그는 애굽을 떠났지만, 애굽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를 자유케 하셨지만, 그는 여전히 바로의 종처럼 행동하면서, 구속, 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모든 생명을 만드시고 유지하시는 창조주께 대한 의존을 경축하는 그 날(출 20:8-11; 신 5:12-15; 단 5:23 참조)에 나무 가지들을 줍고 있었다(출 5:4-12 참조). 여호와의 생명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경축하기를 거절함으로써 그는 죽음의 길을 선택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사형을 집행한 공동체는 그가 대표한 세대 사람들로 대부분 이루어져 있었다. 그 사람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15.3)
 그렇다면 반항적인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악한 왕들 중에서 가장 악한 왕 므낫세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그는 너무도 많은 폭력, 우상숭배, 어린이를 제물로 바친 일, 그리고 주술과의 장난질 등의 죄를 범하여 마땅히 죽어 “끊쳐질”만 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았는가(대하 33장; 레 20:2,3 참조)? 어떻게 여호와께서 그를 용서하셨는가?(대하 33:12,13).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116.1)
 사도행전 13장 39절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용서를 위한 진정한 능력이 오로지 거기에만 있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히 10:1-18), 모세의 법(동물 희생 제사제도를 포함한)이 아무런 구제책도 갖고 있지 못한 죄들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을 기회가 있다.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임으로 자비를 얻는 통로가 되는 이러한 예식 시스템은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지는가를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116.2)
 오래 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그분은 죄, 즉 반역적인 죄를 담당하고/용서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동물 희생을 통해서는 아니었다(출 34:7). 그분의 명망을 대표하는 그분의 성소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는 공언하는 백성들의 반역적인 죄들(레 20:3; 민 19:13,20; 단 8:12 참조)은 대속죄일에 제거된다(레 16:16; 단 8:14 참조). 하지만 그 정결케 하는 일은 반역적인 죄인들 자신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가져다주지 않았다(레 16:30, 단 8:25 참조). (116.3)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구원을 받는다. 즉, 하나님의 아들의 선물을 통하여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누구든지”는 아무런 예외 없이 “누구든지”를 의미한다. 못 들어가게 되는 유일한 사람들은 끝끝내 아들을 믿기를 거절하는 자들이다. 그리하여 가장 악의적인 므낫세도 믿었을 때,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확실한 지옥으로 가는 편도 승차권으로부터 나꿔채질 수 있었다. 이것은 죄인들이 이생에서 그들의 행동의 결과를 (아마도 죽음조차도) 피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약속은 내세의 삶을 위한 것이고, 그것은 영원한 삶이다. (1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