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3. 야훼—“나 곧 스스로 존재하는 자” (이상적 재판장)
 이것이 성경에 처음 나오는 은혜이다. 최초 언급의 법칙에 의해 이 말이 이런 배경에서 사용된 것은 성서적 은혜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지배한다. 여기서 보는 은혜의 성격은 노아를 구원하기 위해 야훼 께서 전적으로 베푸신 섭리를 의미하며, 멸망하는 인류를 건지시는 그의 경륜을 의미한다. 이 의미는 다시 신약에서 더 풍성하게 보강된다. 우리는 이를 한 개인인 바울의 일신상 필요에 대한 일화에서 발견한다. 그가 병 낫기를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다”라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요청을 거부하시더라도 적절한 은혜를 제공하신다는 원칙이 여기서 도출된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자기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에 대한 하늘의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특별한 기능을 그가 능히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성령께서 그에게 주시는 힘으로 이해했다(고후 12:7-10). 예수께서는 사람의 필요를 보시고 하늘이 그 인생을 위해 설정한 목표가 무엇이든지 그것을 달성하는데 소용되는 모든 능력과 은혜를 풍성하게 제공하신다. (52.2)
 홍수를 내리기 전에 인류의 상태를 저울질하고 자기의 결정을 숙고하시는 야훼 를 우리는 보았다. 그 후 우리는 노아와 그의 가족, 그 밖의 다른 동물 가족들이 멸망을 피해 구원받는 것과 또 당시의 세상이 어떤 종말을 맞이했는지를 보았다. 위대한 촉진자이신 여호와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과 또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애에 맡겨진 하늘의 계획을 이행할 힘을 은혜로 제공하셨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야훼 께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임을 말해 주는 가장 완벽한 예증이다. “나는 곧 내가 만드는 대로 되도록 만드는 자”란 그의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그는 당신의 이름을 즐기신다. 그것이 바로 “나 곧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자기를 소개한 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53.1)
 홍수 현장에서의 엘로힘
 홍수를 내리기 전 이야기의 후반에서는 엘로힘 이란 이름이 사용된다. 그도 역시 사람이 타락했음을 보시고 지면에서 모든 생명이 소멸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신다. 엘로힘 은 그러나 여기서 언약 체결자로서의 신격의 본질을 나타내신다. 창조 때 그는 자기의 피조물들과 그들의 “씨”를 보존하기 위한 협약을 체결하신 바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해결책을 제시하신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명하시고 “내가 땅 위에 물들로 홍수를 일으켜 ... 모든 육체를 멸망시키리라.... 그러나 내가 너와는 내 언약을 세우리라”(창 6:14-18)고 하셨다. 크신 언약 체결자는 결코 변치 않으신다. 그래서 그는 인생들에게 피할 길을 마련해 주시고 그들과 온 우주가 죄로 인해 주어진 고난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 홍수 전에 있은 이 두 이야기 사이에는 일관성 여부의 문제가 있을 수 없다. 야훼 의 은혜와 엘로힘의 언약은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 때문이다. (53.2)
 홍수 이야기가 마쳐질 때(창 8:1-19), 우리는 다시 그 두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본성이 나타나는 것을 본다. 언약 체결자이신 엘로힘 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언제 어떻게 행할 것을 정확하게 지시하고,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던 언약을 그들에게 되풀이하신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가로질러 무지개를 나타내 보이시며, 그것을 다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으실 당신의 언약의 표로 제시하신다(창 9:1-17). 한편 재판장인 야훼 는 죄인 대신 죽은 희생 제물을 받으시고 “땅이 있는 동안에는 씨 뿌리는 시기와 추수하는 시기와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하신다(창 8:20-22). 이것은 계절과 기후의 변동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54.1)
 요약: 홍수에 대한 두 기사를 비교해 보면 엘로힘야훼, 두 이름이 암시하는 요점이 확실하게 밝혀진다. 야훼 는 제물 희생의 수단으로 죄인에게 은혜 베푸시는 심판자의 성격을 나타낸다. 그는 표준을 세우고 사람들이 거기에 도달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순종이 용이하도록 만들어 주신다. 그는 각 남녀의 입장을 일일이 조사하시고 궁극적으로 실패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내리신다. 비록 그는 죄인의 죄를 무죄로 치지는 않으시나 그들의 필요를 돌보시기 위해 성령의 힘을 풍성히 제공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께 기대할 수 있는 확실한 은혜이다. 그러나 야훼 가 암시하는 절대적 공의의 특성은 엘로힘 이 제공하는 영원한 언약의 내용에 의해 균형 있게 이해되어야 한다. (54.2)
 한편 엘로힘 은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생명의 언약을 체결하셨다. 그는 자기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그 사랑의 언약을 지키셔야 한다. 그는 사람이 직면한 불가피한 멸망을 아시고 그를 신뢰하고 그의 길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자들을 위해 피할 길을 마련하신다. 그러나 엘로힘 의 이름이 암시하는 불변의 사랑과 관심에 나타나는 특성은 야훼 의 불변하는 공의의 법에 의해 상쇄되어야 한다. 은혜로 평형이 유지되는 하나님의 공평 무사(公平無私)하심과 자비로운 언약적 사랑으로 유지되는 긍휼은 성경에서 결코 분리되는 법이 없다. (54.3)
 야훼엘로힘 에 대한 이분적(二分的) 이해의 위험
 이점에서 신학적으로 하나님을 분리해서 한 쪽은 보복적이고 굽히지 않는 성질, 다른 한 쪽은 너그럽고 용서하는 성질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위험이 있다. 지난 수 백년 동안 부주의한 자들이 그 함정에 빠지곤 했다. 이미 우리가 아는 것처럼 어떤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신약의 하나님”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는 그런 과오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서로 배타적인 야훼엘로힘 의 태도에 익숙해져야 한다. 사실 그것은 불가분의 온전하신 신격, 하나이신 복합적 신성의 각 부분임을 알아야 한다. (55.1)
 우리는 다시 한번 고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이를 확인해야 한다: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엘로힘 야훼 는 오직 하나인 야훼 시니”(신 6:4). 하나님은 불가분(不可分)의 하나님이시다. 여기 보는 “하나”에하드('eḥaḏ, 창 27:38)란 말을 우리는 창조의 첫 날이 마쳐질 때 처음으로 만났다. 그 구절을 가장 원문에 유사한 영어로 옮긴다면 “It was evening, it was morning, day one”(창 1:5)이 된다. 저녁과 아침은 분명히 서로 다르고 구분이 가능한 것이지만, 그들은 함께 하루라는 하나의 개체를 이룬다. 에하드('eḥaḏ,“하나”)는 그러므로 별개의 개체들이 합해져서 만드는 하나의 복합적 단위라 할 수 있다. 그런 “하나 됨”은 둘, 셋, 또는 그 이상의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질 수 있다. (55.2)
 우리는 이 에하드 란 말을 하나님께서 최초로 결혼식을 주례하신 기록에서 다시 발견한다. 그는 아담과 하와에게 “자라며 한 육체가 되어야 한다”(창 2:24, 히브리어 원문은 “grow into one flesh”를 의미함)고 설명하셨다. 여기서도 역시 단위는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아담과 하와는 별개의 인격체들이나 결혼으로 한 단위를 이루었다. 에하드('eḥaḏ)와 비슷한 뜻의 히브리어는 야히드(yaḥiḏ, “유일한[only]”)이다(창 22:12 등). 야히드 는 성경에 도합 12번 나오는 말인데, “독특한,” “분리된,” “홀로,” 등의 뜻으로 쓰이며 하나님께 적용된 일은 전혀 없다. (55.3)
 모세가 하나님을 더 알기 원했을 때 하나님은 전적으로 협력하셨다. “주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시어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야훼 의 이름을 선포하시고, 야훼 께서 그의 앞을 지나시며 선포하시기를, 야훼 로다.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오래 참고 선하심과 진리가 풍성한 야훼 엘로힘 이로다. 자비를 수천 대까지 간직하며, 행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나 죄악이 결코 깨끗케 되지는 아니하리라. 아비들의 죄는 그 자손과 그 자손의 자손들 삼사 대까지 미치게 하리라 하시니라”(출 34:5-7). 여기 그의 선한 측면과 심한 측면이 나란히 나온다. 두 측면은 모두 쪼갤 수 없는 한 하나님 야훼 엘로힘 의 특성이다. 공의와 자비는 복합적 신성 속에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이름을 하나씩 별도로 구원의 드라마에 나오는 대로 모든 본문을 찾아 깊이 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 연구를 쉽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야훼엘로힘 의 의미를 분명히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55.4)
 하와는 야훼 를 잊었었다
 창세기와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서 인류 역사의 시초에 있었던 이 사건을 조사해 보자. 상상으로 하와가 선악과나무를 쳐다보는 장면을 그려 보라. 그 나무 가지들 가운데 날개 달린 뱀이 번쩍이는 것이 보인다. 동산에서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운 동물이다. 그녀가 금단의 열매를 눈여겨보며, 거기에 마음이 끌릴 때, 아마도 하와의 얼굴에는 의혹의 빛이 서려 있었으리라. 그것을 본 간사한 뱀은 “아니 저걸 왜 먹지 못하게 하실까?”하는 의구심이 하와에게 생긴 것을 눈치챈다. 그 때 사단은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을 던진다: “헤?(히브리어로 이와 흡사한 소리다.) 그래 엘로힘 이 정말 이 열매를 먹으면 안 된다고 그랬어?”(창 3:1). (56.1)
 야훼 께서 아담을 동산에 두시고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 파멸된다고 경고하실 때 하와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후에 아담의 증언을 들었을 뿐이다. 이 상황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나는 들은 적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가 될 수는 없다! 나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십계를 말씀하시는 것도 들은 적 없고 두 돌 판을 들고 하산하는 모세의 얼굴에서 빛나는 영광이 빛을 본 적도 없다. 나는 예수께서 “너희는 거듭나야 하리라”고 말씀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 때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런 사실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증인들의 증언을 따라야 할 필요에서 나를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 (56.2)
 하와가 아담과 떨어져 혼자 배회한 것은 남편 곁에 있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행위였다. 그녀는 금단의 열매에 홀리도록 자신을 용납하고 나무에 접근했을 때 마침 남편이 일러준 말이 생각났다. 그러다가 사단이 던진 의혹의 말에 걸려들어 그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신 야훼 의 지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57.1)
 금단의 열매 이야기를 할 때 사단은 야훼 의 이름을 전혀 거들지 않고 말했다는 사실을 독자는 알고 있는가? 그는 야훼 께서 만지지도 말라고 했어?”고 묻지 않고 엘로힘 이 만지지 말라고 하더냐?”고 물었다. 이 차이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래 그 사랑 많으신 언약 체결자인 엘로힘 이 저렇게 보기 좋고 맛좋은 열매를 먹지 못하게 했어? 이해심 많고 사랑 많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게 하실까?” (57.2)
 사실 사단은 하와에게 이런 논리를 제시했다: 엘로힘 은 네가 이걸 먹으면 엘로힘 과 같이 될 것을 아신다. 즉 뱀은 이 논리를 펼 때 실제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잘 생각해 보라. 사랑의 엘로힘 은 절대로 그런 요구를 부과하지 않을 거라는 암시를 은근히 던지며, 그는 야훼 란 이름에 깊숙이 파묻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계시를 하와의 뇌리에서 뭉개 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마귀는 그의 엘로힘의 성품과 본질을 그녀가 오해하고 있다는 암시를 넌지시 비쳤다. (57.3)
 오늘날 뱀을 따르는 자들은 “우리 하나님”은 어떻다느니 왈가왈부(曰可曰否)하며, 저희 하나님은 남의 하나님보다 사랑과 이해심이 많다고 선전한다. 갈바리의 선물을 주신 신약의 하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던 구약의 하나님보다 더 사랑과 이해가 많은 분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사실 마귀가 에덴에서 시작한 농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57.4)
 만일 뱀이 야훼 의 이름을 썼다면 하와는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본성을 생각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표준의 총화(總和)이신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경계했을 것이다. 마귀는 하와의 생각을 야훼 에서 엘로힘 쪽으로 편향(偏向)하게 만들어서 그녀의 정신이 양분되게 했다. 그는 하나님의 본성을 엉뚱하게 나타내어 하와로 하여금 계명을 무시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그는 일단 하와를 꾀는 데 성공한 후 하와를 이용하여 아담을 유혹했다. (5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