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3. 야훼—“나 곧 스스로 존재하는 자” (이상적 재판장)
 야훼 의 뜻을 드러낸 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와 온 우주로 하여금 그들의 이해력이 미치는 한도까지, 신격의 본질을 어느 때보다도 인격적으로 분명하고 충만하게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히 1:1-3). 그리스도는 성육신 이전에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특성과 본질 중 어느 것도 충만히 소유하지 않으신 것이 없었다고 바울은 강조했다(빌 2:6). 그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그러나 그는 인류와의 의사 소통을 위해 자기를 “비우사” 그 모든 것을 버리시고 사람이 되어 그들 대신 죽는 길을 택하셨다. 그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기 신격의 대권(大權 )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자의로 아버지 앞에서 포기하셨다. 그리고 사람의 환경 속에 들어와, 죄의 역사가 4,000년이나 계속된 후의 타락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시면서 무죄하신 그분은 사람이 당하는 모든 시험에 부쳐지신 바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렛 예수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에 거하”셨음을 사도 바울은 역설했다(골 2:9). (47.1)
 예수는 둘째 아담이 되어 동료 인간들과 천사들과 또 온 우주 앞에 하나님께서 창조 때 인류에게 나누어주신 신격의 모든 아름다움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분 이전에는 그처럼 찬란하게 그것이 현실로 제시된 일이 없었다. 그가 오신 것은 본향을 멀리 떠나 유산을 모두 탕진해 버린 이기적인 탕자들에게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마치 빛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처럼 그의 인성과 행위를 통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수천 가닥의 빛으로 갈라지는 것과 같았다. (47.2)
 그리스도는 크신 (I AM)를 몇 차례 신중히 설명하셨다. 이제 그의 주장들을 모아서 하나의 주석(註釋)을 꾸며 보자. 그분은 자신을 로 소개한 야훼 이시다. 이 확언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최초로 들려 왔다. 다음에 보는 모든 주장과 같이 그는 계속 는 누구인지를 말씀하셨다: 우물가의 연인에게 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 메시야라고 설명하셨고(요 4:25, 26), 세상을 향해 는 그 빛이라 하셨으며(요 8:22; 9:5), 자신 없이 쟁투에 임한 자들에게 실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 평화의 왕이라 하셨다(눅 4:43; 창 49:10; 요 9:10).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는 언제나 위대한 였다(요 13:19). 그를 잡으러 겟세마네 동산으로 몰려온 대제사장과 체포자들에게 그들이 찾는 자가 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는 자신이 여호와이심을 나타내셨다. 그 때 번뜩인 광채가 너무도 영광스러워 그들은 그 앞에 엎드려 죽은 사람들 같이 되었었다(요 18:5, 6, 8“내가 그니라”고 번역되었으나 실은 “그니라”는 원문에 없는 것을 역자들이 첨가한 말이다. 막 14:62와 비교하라). (47.3)
 야훼 는 굶주리는 세상에 생명의 떡이 되시며(요 6:25, 41, 48, 51), 앞못보고 어둠 속을 더듬는 소경에게 영원한 빛이 되신다(요 8:12; 12:46). 들어오려고 힘쓰는 제외된 자들에게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는 이시며(요 10:7, 9), 방황하는 양들에게는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 14). 일어 버린 바 된 세상에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요 3:16; 10:30), 무덤에 갇힌 사단의 포로들에게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요 11:25). 방황하는 순례자들에게 그는 길이시며, 철학자에는 진리요(요 14:6), 의로운 화평의 열매를 맺으려는 가지들에게는 참된 포도나무이시며(요 15:1, 5), 그의 백성에게는 왕이요(요 18:37), 그의 교회에게는 구속자와 주이시다(행 9:5; 22:8, 26:15). (48.1)
 사랑하는 구세주여, 나에게 주의 영을 보내사 내 삶을 주의 임재와 능력으로 넘치게 하옵소서. (48.2)
 그러면 이제 두 번째 펼쳐지는 창조 이야기(창 2:4-25)로 돌아가서 야훼 가 어떻게 아담과 하와를 다루시나 살펴보자. 우리는 이미 먼저 소개된 창조 기사(창 1:1-2:3)를 통해 엘로힘 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이 두 이야기의 차이는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야훼 의 본성이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거기에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48.3)
 야훼 의 계시
 야훼 는 모든 무생물과 생물을 만드시기 전에 먼저 그것들을 마음속에 하나하나 신중하게 그려보시고 고안하셨다(창 2:4, 5). 창조 과정을 미리 생각해 보실 때,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원소들이 필요한지를 그는 아셨다. 이 두 번째 기사에서는 “심히 좋았더라”는 평가의 말 같은 것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식물들은 습기가 필요했으므로 그는 땅에서 올라온 안개가 그 일을 하게 마련하셨고, 동시에 땅을 적시기 위해 그는 큰 강 넷을 만들어 지면에 흐르게 하셨다(창 2:5, 10-14). 땅을 관리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는 그의 청지기를 만드셨다(창 2:7, 15-17). 그것이 거룩한 촉진자의 일이었다. (49.1)
 사람의 기원에 대한 이 기사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모델로 했다는 말이 없다. 그 대신 사람이 땅의 원소로 만들어졌음을 영감은 조심스레 강조한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만들어졌으므로 본질적으로 조금도 그것들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의도적으로 나타낸다(참고 창 1:24, 25; 2:19, 7; 전 3:18-22). 그러므로 인간은 그 자체로서는 무력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몸은 한 줌의 “흙”을 물에 개어 가죽부대라는 특별한 자루에 넣은 것인데, 그 무게의 거의 8할은 물이다. 그러나 다른 동물의 경우와는 달리 사람은 오로지 야훼 께서 “그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기에 하늘이 귀하게 보는 생령(生靈)이 된 것이다(창 2:7). 그러므로 우주 앞에 사람의 생명과 가치는 땅이 준 것도 아니고, 자기가 본연적으로 소유한 것도 아니다. 인간의 가치는 전적으로 야훼 로 말미암을 뿐이다. 타락 이후에도 인간의 가치나 공로는 전적으로 갈바리에서 부어진 신적 투자의 결과이다. (49.2)
 야훼 엘로힘 께서 꾸며 놓으신 동산에는 “생명나무”“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었다(창 2:8, 9, 16, 17). 구속의 경륜이 개시된 이래 옳고 그름, 생명과 사망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분명히 제시되어 그들의 생각을 자극했다. 야훼 엘로힘 은 선택의 능력을 사람에게 맡기시고 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환경 속에 그들을 두셨다. 뜻을 정하고 그 뜻한 바를 이행하는 이 능력 때문에 사람은 그 많은 동물들 중 가장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다. 땅에는 동물이 많아도 사람 이외에는 선악을 분별하여 자기의 행동 노선을 선택할 능력을 가진 동물이 없다. 그 능력 때문에 사람은 시험기 동안 에덴에 살면서 동산을 돌보고 수고하는 책임을 통해 그곳을 자연 그대로 유지하면서 모든 다른 생물들의 생활을 돌보는 감독자가 되었던 것이다. (49.3)
 야훼 는 심판자
 야훼 엘로힘 은 이런 행복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첫 사람에게 설명하시고 그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셨다(창 2:16, 17). 사람은 땅 위의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이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인 행위의 기준에 정확히 따라야 할 필요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점은 나중에 다시 다루어진다. 야훼 는 입법자(立法者)일 뿐 아니라 인간을 그 행위의 질 여하에 따라 판정하고, 거기에 따라 상벌을 내릴 권세를 가진 심판장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지구 성에 아직 아무런 범죄 행위가 있기 이전에 불가피한 판결이 어떠할 것을 그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50.1)
 그 때 야훼 엘로힘 은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의 상태가 만족스럽지 못함을 보시고 아내가 있어야 좋을 것이라 생각하셨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남자를 돕는 적당한 “배필”을 만들기로 하셨다(창 2:8). 여기서 다시 우리는 무엇이 좋지 않은지 평가하고, 무엇이 가장 좋은지 저울질해 보고, 필요한 것을 마련하시는 야훼 를 보게 된다. (50.2)
 아담은 우선 흙으로 만들어진 모든 짐승들과 새들을 돌아보았다(창 2:19, 20). 그들의 성질을 이해한 후 그는 그들 하나 하나에 적합한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자기에게 적합한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일을 통해 그는 관찰하고 식별하고 가려내는 능력을 활용하는 훈련을 받은 것이다. 야훼 엘로힘 은 이미 그에게 특별히 “만든” 짝이 있어야 할 것을 아셨으나, 아담은 이제 거기에 공감할 준비가 되었을 뿐이다. (50.3)
 “나는 곧 내가 만드는 대로 되도록 만드는 자”란 그의 이름의 깊은 뜻이 암시하는 것처럼, 야훼 엘로힘 은 첫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신다. 그는 아담을 잠들게 하고, 갈비 하나를 들어내신다. 그것으로 그는 첫 여자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 신부로 선사하신다. 그가 선택한 뼈는 아담의 머리나 발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 그것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는 머리나 남자에게 밟히는 종이 아님을 의미한다. 갈비는 심장 가까이 있어 심장을 보호하는 것이므로,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지키는 자라는 뜻이다. 이 진리는 여자는 남자 가까이 그의 반려자로, 친구로, 그와 평등한 존재로, 그의 팔에 안길 수 있는 그의 아내로 가까이 있어야 할 것을 조용히 노래한다(창 2:21, 22).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인류의 생명 강이 아담에게서 발원했음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인류의 생명 강이 오염된 것은 아담의 범죄로 시작된 것이지 하와의 범죄로 된 것이 아니다(롬 5:12, 14, 15, 17; 고전 15:22). (51.1)
 남자와 여자가 둘 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창 2:25)을 야훼 께서 보셨다. 여기에 그들의 무죄하고 천진 난만한 상태가 분명히 나타난다. 이 창조의 두 번째 이야기 전체를 통해 야훼 엘로힘 은 사람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시고 단계별로 차츰차츰 창조가 완성되었던 여섯 째 날의 “심히 좋았다”고 한 상태로 남녀를 복원시키시는 자신을 계시하신다. 야훼엘로힘 은 이렇게 동일한 목적을 가지신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하나이시다. (51.2)
 인류 창조에 대한 이 두 평행적 기사를 통해 엘로힘야훼 란 두 이름이 말하는 하나님의 본성이 밝혀진다. 두 이름은 삼위의 하나님께 해당되는 이름인 까닭에 하나님의 이름들은 신격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위해 고안된 것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언제나 엘로힘 이란 이름이 나머지 구약 성서에 언급되었을 때는 창조에 관한 처음 기사에서 밝혀진 특성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구속사에 야훼 가 등장할 때는 두 번째 창조 기사에 나타낸 특성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엘로힘야훼 란 칭호를 결코 부주의하거나 무분별하게 쓰지 않으시므로, 신중한 독자는 이 두 이름의 차이를 항시 마음에 명심하고 그 구분을 지켜야 할 것이다. (51.3)
 야훼 와 대홍수
 이 이야기를 우리는 노아의 홍수에 대한 두 개의 기사를 중심으로 관찰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창조 이야기에 나왔던 엘로힘야훼 의 순서가 바뀐다. 홍수 사건 때는 야훼 께서 먼저 세상 상태를 돌아보고 땅의 온 거민이 당신의 다스림을 거부한 것으로 판단하시고, 성령의 노력을 침묵시키신다. 그들에게 선도의 여지가 없음을 보시고 여호와께서는 지상의 모든 생명을 멸하리라 말씀하신다. 그러나 거기엔 조건이 있다. 그의 조사에서 유독 노아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은 것이 발견된다(창 6:3-8). 재판장은 그와 그의 가족에게 응분의 보상을 내리신다. (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