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한편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AD 200년경)는 영혼에 관한 플라톤적 개념들이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과감하게 침투하기 위한 길을 예비했고(On First Principles 4. 1. 36 [ANF 4:381]), 그 결과 죽음이 결국 영혼의 정결을 위한 계속적 과정 속에서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단계로 축소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입장은 테르툴리아누스(AD160-240)를 필두로 한 라틴 교부들에 의해 더욱 발전하였다. 이제 영혼은 실제적으로 육체만큼이나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의 사후 존재는 매우 자세히 묘사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영혼은 하데스 안에 감금된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찌하여 영혼이 어둠이나 영광에 대한 어떤 기대 가운데서 심판의 양자택일을 기다리는 동안 하데스에서 심판과 위안을 경험한다고 가정할 수 없을까?∙∙∙ 보상이 육체적인 것 외의 것을 통해 주어질 경우 부활의 충분한 과정에 대한 편견 없이 하데스에서 어떤 보상적 징계를 경험한다는 것을 누구도 믿기를 지체할 수 없다”(Treatise on the Soul 58 [ANF 3:234, 235]). 힙포의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년)는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 곧 영혼이 “지상에서 이끈 삶에 의해 얻은 공로에 비례하여 쉼을 누리거나 고난을 당하는 장소인 감추어진 은신처”(Enchiridion 109)에 보존되는 때에 대해 이야기했다. (405.4)
 따라서 AD 4세기에 이르러 세세한 부분이 채워질 여지만 남긴 채, 죽음에 관해 당시에 출현하던 중세적 이해가 분명한 윤곽을 드러냈다. 확실히 몸의 부활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완전을 향한 영혼의 여정에 있어서 최후의 단계로 여전히 두드러졌다. 토마스 아퀴나스(AD 1225-1274년)에게 몸의 부활은 필수적이었는데, 이는 영혼이 그 특성상 몸을 필요로 하고, 인간의 행복도 그것에 의존하며, 죄에 대한 최후의 심판도 육체 없는 영혼에게 할당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망 후에도 지속되는 존재에 대한 플라톤적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다. 사망 후에도 계속되는 영혼의 존재는 인간의 경험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위한 필요에 내포되었고, 그러한 공의는 모든 비육체적인 영혼의 불가피한 운명인 보상이나 심판으로 구성된다(Summa Theologiae 3, Suppl. 75.1,2). (406.1)
 여전히 더욱 더 발전이 필요한 죽음에 대한 중세적 이해의 나머지 요소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결과 관련되었다. 이 수단을 통해 로마가톨릭교회는 회개한 죄인들에게 부활에서 하나님의 궁극적 보상을 받기 위한 준비로 그들을 정결케 하기 위한 의무 혹은 “배상”을 부과하였다. 이생에서의 끝나지 않은 배상의 과업들은 다음과 같이 죽음 후 완성될 것이다. “연옥의 심판은 육체 가운데서 완전히 달성되지 않은 만족을 보충하도록 의도된다.”(위의 책, 71.6). (406.2)
 이 견해에 대한 궁극적 표현은 단테에 의해 예중된 것처럼 육체의 모든 기능을 비물질적인 영혼의 탓으로 돌리고(그리하여 사망 후 정화 과정의 온전한 유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주의를 부활로부터 죽음과 부활 사이의 결정적 기간으로 옮기는 것을 수반했다. 결과적으로 부활은 임시적 정화의 결과를 단순히 확인하기 위한 의미로 축소되었다. 죽음에 대한 이런 견해는 중세 중기 동안 우세했다. (406.3)
 D. 16세기 종교개혁과 그 후의 발전들
 개신교 종교개혁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있어서 전환점이 될 것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마르틴 루터(1483-1546년)는 고해성사 제도와 그것의 당연한 결과인 연옥에서의 영혼의 정화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이런 견해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동안 발견한 구원에 대한 그의 이해와 충돌했다. 당신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길, 곧 믿음을 통한 구원과 불신을 통한 멸망의 길을 제시하셨다고 그는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그는 수용되어서는 안 되는 연옥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유익과 은혜를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Table Talk 3695). 죽음 이후의 중간상태에 관한 이런 결론은 영혼의 비불멸성을 지지하는 후기 종교개혁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406.4)
 하지만 영혼불멸성의 문제에 대해 루터는 일관성이 없었다. 종종 그는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된 삶을 누린다는 중세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지지했다. 그러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영혼의 상태를 묘사할 때, 그는 때때로 다음과 같이 신약에 나타난 영혼 수면에 대한 묘사를 받아들였다. “인간 영혼은 모든 감각이 매장된 상태로 잠자고 있으며, 우리의 침대는 무덤과 같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골치 아프거나 곤란한 것이 없다. 따라서 죽은 자의 장소에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죽음과 부활 역시 이와 같을 것이다. 우리는 떠나고, 또 우리가 그것을 알기 전 마지막 날에 돌아올 것이다”(Lectures on Genesis; 창 49:33). 루터교회는 본질적으로 중세 전통으로 회귀하는 조건적 불멸성에 대한 루터의 일관성 없는 전례를 따르지 않았다(참조 Althaus 410-417). (406.5)
 장 칼뱅(1509-1564년) 역시 “합법적이지도 마땅하지도 않은”(Institues 3. 25. 6) 것이라며 영혼의 중간 상태(연옥에서)에 관한 추측된 견해를 거부했지만, 영혼의 불멸성을 획증했고 그의 동의 아래 이것과 다른 이설들로 인해 처형을 당한 미구엘 세르베투스(1511-1553년)를 포함하여 그것을 부정한 이들을 논박했다. 사실상 칼뱅은 인간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된 본질적인 무엇”(위의 책, 1.15.2)이라고 단언했다. 따라서 영혼들은죽음후에도 육체보다더 오래 생존 할 것이며, “그곳에서 유쾌한 기대 가운데 그들은 약속된 영광의 즐거움을 기다린다. ∙∙∙버림받은 자들의 운명은∙∙∙그들을 위해 할당된 형벌에 처해지기까지 쇠사슬에 묶여 있게 될 것이다.”(위의 책, 3. 25.6). (407.1)
 비록 종교개혁자들이 연옥에서의 영혼의 정화에 관한 중세의 가르침에 도전하고 그것을 거부했다 할지라도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플라톤적 개념은 종교개혁 이후까지 살아남았고 대중적인 그리스도교인 대다수에게 영구적인 정착물로 남았다.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 플라톤적인 사변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성경적 실재론을 압도했던 것 같다. (407.2)
 죽음이 모든 삶을 끝장내고 어떤 영혼도 살아남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이 수면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무의식을 포함하기 때문이며 오직 부활에서만 생명이 죽은 자들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참된 성경적 입장이 머지않아 다양한 진영으로부터 재출현했다. (407.3)
 예를 들어, 존 밀턴(1608-1674년)은 이렇게 기록했다. “몸의 죽음은 생명의 상실 혹은 소멸이다 죽음이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구성된다고 가정하는 일반적 정의는 수용할 수 없다.”(Christian Doctrine 1.13). (407.4)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에 관한 새로운 철학들은 검증이 불가한 실재에 대한 플라톤적 사변을 거부함으로써 죽음에 관한 이 견해에 그들의 지지를 보냈다. 존 로크(1632-1704년)는 창세기 2:17을 주석하면서 “여기서 죽음과 동시에 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고 단지 존재를 멈출 뿐임(즉 생명과 감각의 모든 행동을 상실함)을 고백해야만 한다.”라고 설명했다(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1). (407.5)
 성경적 입장을 고수했던 많은 지도자중한사람이 프랜시스 블랙번(1704-1787년)이다. “따라서 첫째 사람의 죽음으로부터 맨 마지막 사람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살아있고, 의식적이고 활동적이며, 또한 행복과 불행을 느낄 수 있다고 가정하고, 또한 이성과 철학에 의해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체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체계 전반을 뒤집는 것임에 틀림없다.”(A Short Historical View of the Controversy Concerning an Intermediate State, 69, in CFOF 2:211,2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부분의 경우에 전통에 의해 지배받기를 거부한 개신교인들이 이 문제에 관해서 가장 암묵적인 존중을 보여 주었던 것 같다.”(위의 책, XIV, in CFOF 2:210)라고 진술했다. (407.6)
 최근 몇 년 동안,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와 특히 그것의 결과인 지옥에 대한 역사적 교리에 대응하면서 오스카 쿨만을 비롯하여, J. R. W. 스토트, 클라크 H. 피노크, J. W. 웨넘 같은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조건적 불멸에 찬성하여 설득력 있는 주장을 폈다. 자신들이 몸담아 왔던 교회의 입장을 전혀 교의화하지 않고 그들은 성경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교인들 간의 솔직한대화를 호소하고 있다. (407.7)
 E.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입장
 18세기에 대서양 양편의 성직자와 학자들이 개진한 이 소수자의 입장은 19세기 중반에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신생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의해 수용되었다.

   (1) 그것은 철학적 억측과 교회의 전통으로부터 자유롭고, 특별히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이미 유감스럽게 여겨진 연옥에서의 영혼의 정화에 대한 전통에서 벗어난 성경적 견해를 대표한다.

   (2) 그것은 초기교회에 의해 고수되다가, 종교개혁기 동안과 그 후에 재등장했다.

   (3) 그것은 죽음을 수면과 같은 무의식으로 본 성경적 묘사를 지지하면서, 죽음 후 영혼이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입장을 거부한다.

   (4) 그것은 불멸성이 영혼의 본질 가운데 내재되었다거나 사망 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에서만 주어진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지지한다.

   (5) 그것은 죽음 이후에 영혼에게 부여되는 어떠한 공로도 고려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제시하는 신약의 강조를 분명히 한다. (407.8)
 이것은 종종 “조건주의자 입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불멸성의 선물, 즉 정죄 받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에 조건들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인간 영혼의 어떤 타고난 자연적인 특질이 아니라 오직 그 선물만이 불멸성의 조건이다. (408.1)
 조건적 불멸의 입장을 수용하도록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인들을 이끈 직접적인 동력은 감리교 목회자인 조지 스토스(George Storrs, 1796-1867년)에 의해 제공되었다. 1842년에 〈한 가지 질문 악인들의 영혼은 불멸적인가?〉라는 책에서 발표된 그의 견해들은 제임스 화잇(1821-1881년), 조셉 베이츠(1792-1872년), E. G. 화잇(1827-1915년), 유라이어 스미쓰(1832-1903년) 같은 초기 재림신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조건적 불멸의 입장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가르침에 확고하고도 영구적으로 정착되었고, 성경의 가르침에 분명하게 기초된 교리적 “기둥”으로 인정되었다. (408.2)
 엘렌 화잇은 죽음과 영혼의 비불멸성에 관한 이 이해에 대해 그녀의 여러 저술에서 주의 깊고 광범위한 관심을 보임으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신학에서 그 자리를 확고히 했다. 첫째, 그녀는 그것을 “현대 진리”(present truth, “이미있는 진리”)로 간주했는데, 그것은 마귀에 의해 세상에 맨 먼저 소개되고(창 3:4) 또한후에 이교와 거짓 그리스도교에 의해 널리 전파된 기만으로 간주되는 강신술에 대한 대중적이고 광범위한 흥미를 교정하는 핵심적이고 적절한 성경적 원칙을 의미한다. 이 기만은 죄인들이 죽지 않고 산 자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육체 없는 영혼들로 생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초기문집, 262; 각 시대의 대쟁투, 531-562). (408.3)
 둘째, 화잇은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은 인간이 자연법과 건강 법칙을 포함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무시를 통해 야기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통찰은 인간 발달에 대한 그녀의 전인적 이해와 결합되어, 결국 건강관리와 건강 교육에 대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헌신을 불러일으켰다(식생활과 음식물에 관한 권면, 21,40; 부조와 선지자, 68). (4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