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역사의 여명기
 고대 근동의 기록들은 죽음을 불가피한 운명으로 이야기한다. 고대인들에 따르면, 인간이 아닌 신들만이 불멸성을 부여받았다. 아다파 이야기(아마도 메소포타미아의 아담)는 어떻게 사람들 중 가장 지혜로운 이가 영생을 누릴 기회를 상실했는지에 대해 말한다. “아다파여 이제 오라! 왜 그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는가? 그대는(영원한)생명을 갖지 못할 것이다!”(ANET 102). 마찬가지로 길가메쉬 서서시의 중심 주제도 인간의 필멸성이다. 젊은 왕 길가메쉬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무시한 채 용감하며 심지어는 위험한 성취들로 가득 채워진 활기찬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죽음이 그의 친구를 앗아갔을 때, 그는 영원한 생명을 찾기 시작했고 이런 말만 들었다. “신들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그들은 생명은 자신들 손에 남겨두고 인간을 위해서는 죽음을 따로 떼 놓았다.”(위의 책, 90). 그러나 그것은 영생에 대한 고대인들의 탐구를 단념시키지 않았다. (402.1)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장엄한 기념물들과 값비싼 장례 관습들은 죽음에 대한 선입견과 사후 생애에 대한 신념을 증언한다. 죽음은 마치 지는 해와 같이 확실한 모든 인류의 운명이다. “죽은 자들의 왕국의 사막으로 내가 가야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거기엔 물도 없고, 공기도 없고, 그곳은 너무 깊고 어둡고 끝이 없다.”(Beyerlin 11). 하지만 한 고대 피라미드 텍스트(BC 2500-2300년)는 죽은 왕 우니스(Unis)가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했다. “오! 우니스 왕이여, 그대는 결코 죽음을 떠난게 아니라 삶을 떠났소!”(ANET 32). 애굽인들은 사자(死者)의 책이 말하는 것처럼 순전한 삶을 살고 지하 세계의 신들 앞에서 자비와 정의에 대해 호소함으로써 죽음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위의 책 34-36). (402.2)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대 세계의 무대에 비교적 늦게 도착했다. 따라서 성경 저자들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죽음에 대해 이미 널리 퍼진 사상과 친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문제에 대해 분명하고 확실한 입장을 제시한다. 구약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 역시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해 인정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그러나 그들의 이웃들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은 다양한 방편들을 통해 죽음의 본질을 회피하려 하지 않고 그것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려고 했다. “야훼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이스라엘에서 죽음에 대한 독특한 이해는 고대 근동의 다른 민족들의 이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우선 그들로 하여금 죽음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고, 내세를 무시하거나 그것에 대한 헛된 소망을 품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의 그것의 본질을 받아들일 용기를 갖게 했다. (402.3)
 욥은 죽음에 직면하여, “주신 자도 야훼시요 취하신 자도 야훼시오니 야훼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말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이 죽음을 친구로 여기거나 삶에 대한 용납할 만한 결국으로 간구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반대로 그 이웃들처럼 이스라엘은 죽음을 생명을 침해하고 그것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적으로 보았다. “대저 죽음이 우리 창문에 올라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와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렘 9:21; 참조 전 12:1-8). 죽음의 이러한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 히브리 성경은 그것을 잔존하는 영혼도 없고 인간의 일상적인 활동과 경험도 없는 무의식적인 수면 같은 상태로 설명했다(시 146:3, 4; 전 9:10). (402.4)
 이웃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생명이 지속될수있도록 죽음의 패배를 열망했지만, 인간의 노력이나 용기 혹은 기술을 통해서 죽음에게서 그 먹잇감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에 딸흐면,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활동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세가지 선물을 통해 오직 그분에 의해서만 저지될 수 있었다. 첫째는 생명의 목적들을 이루는 그분의 자녀라는 선물이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니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꼐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창 48:21). 둘째 선물은 드문 것이지만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새 생명으로 승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11)가 경험했고,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시 73:24)라는 시인의 표현에도 암시된 것으로 보인다. 셋째는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라는 그분의 위대한 선물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2). (403.1)
 죽음에 대한 이 놀랄 만한 이해가 당대에는 최초기의 문명들의 견해에 도전을 주었고 우리 시대에도 시의적절하고 현대적인 사상으로 보이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403.2)
 B. 헬라, 로마 그리고 유대인의 개념들
 고대 세계에서 독특했던 죽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그 문제에 대한 후기 서방과 그리스도교 사상에 단지 한 가지 기여를 했을 뿐이다. 헬라 철학이 부차적인 기여를 했다. 철학자들의 출현하기 전 호메로스 시대(BC 9세기)에 헬라인들은 죽음이 의식과 사고에 종지부를 찍고, 몸이 없고 어둑어둑하고 무의식적인 “존재”만 남긴다고 믿었다(Illiad 23:69-107; Odyssey 11:204-223). 유명한 오르페우스의 신화는 지하세계로부터 자신의 아내를 구출하는 데 거의 성공한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소아시아에서 초기 헬라의 “과학” 철학자들의 도래(BC 7-5세기)와 더불어 생명, 본질 그리고 당연히 죽음의 성격에 대한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헤라클리투스(BC 544-484년경)는 불이 세상의 궁극적 본질을 구성하고, 인간의 영혼은 그 불의 일부라고 결론지었다(On the Universe 20,67,77). 따라서 인간의 몸은 사망 시 단지 다른 형태로 바뀌는 반면, 영혼은 죽음 후까지 생존한다. (403.3)
 같은 맥락에서 개별적 생명보다 더 위대한 뭔가에 참여함으로써 얻는 불멸성이 헬라 도시(폴리스)에서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도시를 위해 죽은 자들을 위한 폐리클레스의 추도사(투키디데스에 의해 보고됨. 펠로폰네소스 전쟁 2. 35-46)는 시민들을 위해 죽어 그들의 행동 때문에 도시에서 기억되는 이들에 대해 말한다. 이들의 경우에서 불멸성은 타고난 불멸적 영혼에서부터 파생되지 않고 육체적이거나(예를 들어, 우주적인 불멸적 불) 사회적인(예를 들어, 도시) 영원한 본질에 속하는 것들로부터 파생한다. (403.4)
 하지만 소크라테스(BC 470-399년)와 플라톤(BC 427-347년) 시대에 와서 영혼의 불멸성은,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는 <파이돈(Phaedo)>에 예시된 것처럼 공적 담회에서 분명하세 표현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사망 시 영혼이 육체로부터 자유하게 되어 독립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순결하지 않은 육체로부터 해방된다는 자신의 신념을 표현했다. (403.5)
 “물론 그대는 사람이 죽을 때∙∙∙그의 가시적이고 육체적인 부분, 곧 이곳 가시적 세계에 있으며 우리가 그의 육신이라 부르는 것이 썩어 부분들로 나뉘어 흩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안다. ∙∙∙그러나그 자체가 영광스럽고 순결하며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는 비가시적 부분인 영혼, ∙∙∙만일 그것의 본질이 내가 묘사한 그런 것이라면, 일반의 견해처럼 그것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해체되고 파괴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진실은 훨씬 더 이와 같다 만약 그 해방의 순간에 영혼이 결코 삶에서 육체와 자발적으로 어울리지 않고 그것을 피했기 때문에 순결하고 육체의 오염물을 옮기지 않는다면-그것 자체가 그런 것처럼 비가시적이고 신성하고 불멸적이고, 또한 현명한 장소로 떠난다. 그러나 내가 추측하건대, 해방의 때에 만약 영혼이 항상 육체와 어울리고 그것에 관심을 갖고, 또 그것을 사랑했기 때문에 오염되고 부정하다면∙∙∙내 생각에 그것은 육체적인 것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존재에 의해 오염된 영혼은 괴로움을 당하고 가시적 세계로 끌려가게 된다. ∙∙∙[묘지에서 실제로 보이던 어둠의 유령들은 가시적인 것의 일부가 제거되지 않고 여전히 그것을 보유하고 있는 그 영혼들의 유령들인데, 그 가시적 특성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다.”(Phaedo 80c-81d). (404.1)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이 예리한 묘사는 즉각적으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년)는 개별적 존재와 구별되는 형식적 존재에 대한 플라톤의 강조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대신 개념들의 형식은 오직 물질세계에만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누구도 영혼의 비물질적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육체가 없는 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주제 이탈에서 돌아와, 영혼의 애착들은 동물적 생명이라는 물질적 기충(基層)과 분리될 수 없음을 되풀이해서 말해야 한다.”(On the Soul 1.403b. 17). (404.2)
 이러한 회의론은 라틴 저술가들에 의해 되풀이되었는데, 그들 중 루크레티우스(Lucretius, BC 98-55년)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며 조금도 중요하지 않는데, 마음의 본질이 필멸적인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즉 우리를 하나의 전체로 구성하는 육체와 영혼 사이의 분리가 일어나게 되었을 때, 정말로 그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우리에게 결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On the Nature of Things 3.830-842). (404.3)
 하지만 이런 개념이, 영혼의 지속적 존재에 대한 생생한 예증이 완비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이 우리 시대까지 존속하고 있는 대중적 신념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진 못했다. 그것은 죽음을 애도하는 자들과 특히 핍박, 전쟁 혹은 질병으로 조사(早死)에 직면한 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심지어 성경적 유산과 더불어 성장했던 유대인들의 사고도 그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마카베오2서 6:30은 경건한 엘레아제르의 죽음을 다음과 같은 말로 기록하고 있다. “육체적으로는 내가 이런 구타로 무서운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영혼으로는 그것을 달게 받는다.” 그리고 마카베오2서 12:43-45은 죽은 자들을 위해 속죄하기 위해 드린 은화 2,000 드라크마의 속죄제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404.4)
 초기교회 시대에 와서는 죽음에 대한 두 개의 충돌하는 이해가 등장했는데, 각각 다른 방식으로 죽음의 문제에 대응하였다. 죽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생명의 분명한 종결로서,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새로운 재창조의 행위로써만 회복될 수 있고, 또한 죽음에 대한 헬라적인 이해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서, 사망 시 몸으로부터 분리된 후 영혼이 계속적으로 생존하는 것을 확증한다. 오스카 쿨만은 개인적으로 죽어가는 경험에 직면한 예수와 소크라테스의 방식들에 대한 예중적 대조를 통해 이 차이를 극적으로 설명했다(Cullmann 19-27). (404.5)
 예수의 경험을 통해 예중되는 것처럼 성경은 죽음을 대적이자 하나님의 원수요 생명의 파괴자로 제시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의 손아귀로부터 당신의 성도들을 부활의 몸을 입은 새로운 생명을 가진 존재로 해방하실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경험에 의해 예증되는 것처럼 헬라 사상은 몸에 오랫동안 감금된 영혼들을 새로운 영의 생명으로 해방시켜주는 환영받는 친구로 죽음을 묘사한다. 죽음에 대한 예수의 사실적 표현은 전 연령층의 죽음을 부활의 소망으로 이끄는 반면, 소크라테스에 의해 제시된 죽음에 대한 화려한 묘사는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제시한다. 교회가 출현할 때 이미 분명하게 그려진 죽음에 대한 이 두 그림은 그리스도인들과 서구세계 전체가 이 두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초청하였다. (405.1)
 C. 초기 및 중세 교회
 죽음에 대한 고전적(헬라적) 이해와 성경적(히브리적) 개념 사이의 대조는 심오하다. 그러나 이 분명히 상충되는 이해는 그리스도교 가르침과 혼합되었고, 그 결과 생명, 죽음, 연옥에서의 영혼의 운명, 부활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 대한 중세적 이해가 출현했다. 이 가르침은 거의 천 년간 지속된 길고 평탄치 않은 발전으로부터 서서히 출현했다. (405.2)
 널리 유행하는 견해로서 죽음과 더불어 몸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된다는 플라톤의 죽음에 대한 정의는 초기교회에서 전반적으로 수용되었다. 그 주장이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 부활을 기다리며 무의식의 상태(수면)에 있는 것으로 죽음을 이해한 성경적 견해는 초기교회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AD 107년경)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서로 서로 함께 일하라 하나님의 청지기들, 동료들 그리고 종들로서, 단체로 노력하고, 함께 달리고, 함께 고난 받고, [죽음 가운데] 함께 자고 그리고 [부활 가운데] 함께 깨어라”(To Polycarp 6. 9, 10[ANF1:95]). 리옹의 이레나이우스(AD180년경)는 반복요약(recapitulation)의 원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 후 부활을 기다리신 것처럼, 그의 제자들의 영혼 역시 사망 시 “하나님에 의해 그들에게 할당된 보이지 않는 장소, 곧 부활 사건을 기다리며 그때까지 머물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때 주님께서 일어나셨던 것처럼 자신들의 육체를 받아서 몸을 입은 온전한 상태, 곧 육체로 일어나서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오게 될 것이다”(Against Heresies 5. 31. 2[ANF 1: 560]). 물론 이레나이우스는 여기서 영혼을 육체 및 영과구별되게 이야기하지만 플라톤적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오직 부활만이 생명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에 대해 억측을 거부하는 것은 영혼이 항상 육체와 함께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캅파도키아 출신의 닛사의 그레고리우스(AD 335-395년경) 사상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연합으로 융합되든지 아니면 붕괴로 분해되든지 간에 몸의 원자들 가운데 영혼의 존재를 방해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영혼은 한때 그것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실제 원자들 속에 존재하며, 그들과의 결합으로부터 그것을 갈라놓을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On the Soul and Resurrection). (4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