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본체를 붙잡다 서문 책 머리에
 1920년대 초기 나의 어린 소년 시절로부터 나의 부모는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 이외에 다른 아기들과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라합과 다윗에 대해 말하면서, 예수께서 유전으로 물려받은 육신의 유약함을 가지고, 유년 시절과 청장년 시절에 완전한 생애를 사셨다고 강조했다. 내가 당하는 시험들을 그가 아신다고 말해 주었는데, 이는 그가 나처럼 시험을 받고 또한 시험을 받을 때 그 이기신 능력을 내게도 주신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들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뿐 아니라 나의 본이 되는 분으로 바라보게 하며, 그의 능력으로 나도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었다. (22.1)
 여러 해 후에, 예수에 대한 나의 부모들의 가르침이 성경에 의해 지지를 받고, 남은 무리에게 보낸 하나님의 사자인 엘렌 G. 화잇이 여러 기사들 가운데서 이 진리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22.2)
 “어린 예수께서 당신의 본체에 인성을 취하시고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모든 어린이들이 시험을 당하는 것처럼 그분께서는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하라. 그분은 하늘 아버지의 거룩한 능력에 의존 하심으로 사단의 유혹을 저항할 수 있으셨으며 아버지의 뜻에 굴복하시고 그 모든 명령에 순종하셨다”(청년 지도자, 1894. 8. 23.). (22.3)
 “예수님은 그대가 지금 서 있는 곳에 서셨었다. 그대의 환경들과, 그대의 생애의 기간에 친족 관계를 예수님도 가지셨었다. 그분은 그대의 위태로운 기회들을 못 본체하지 아니하신다. 그분은 그대의 위험을 알고 계시다”(원고모음 4권, 235). (23.1)
 그리스도께서 출생 시부터 사망 시까지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 인간 가족 가운데 들어오신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신이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사람들에게 한 모본이 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인성을 취하시고 유년기, 소년기 그리고 청년기를 보내셨으므로 모든 사람을 동정하실 수 있으셨으며 청소년들에게 모본을 남겨 두실 수 있으셨다. 그분은 소년들의 연약함과 그들이 당할 유혹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셨다”(청년 지도자, 1873. 9. 1.). (23.2)
 나는 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에 재림교회 교사들과 목사들로부터 예수께서 모든 인간이 지닌 똑같은 육신, 곧 아담과 하와가 타락함으로 영향을 받은 육신을 취하셨다는 것을 계속해서 들었다. 가톨릭교회는 이것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죄에 대한 그들의 교리가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구회태설(원죄가 없는 임신을 만들어 냄으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처음 잉태되는 순간부터 원죄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고, 이와 같이 하여 마리아는 그녀의 조상들이나 타락한 어떤 인간들과도 같지 않음으로 그의 아들인 예수에게 타락 전의 아담의 육신과 같은 죄 없는 육신을 물려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개신교도들이 이 가톨릭 교리를 거절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가 구원하러 오신 인간의 인성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여전히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죄로 타락한 그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었을 유전학적인 유산에서 초자연적으로 벗어나 모든 인간이 총체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어떤 내적 성향들로부터도 제외되었다고 말한다. (23.3)
 비평에 의한 도전
 재림교도들은 초창기부터 예수께서 죄로 타락한 4000년이 지난 후의 인성을 갖고 태어나셨다는 것을 고수해 왔기 때문에 다른 교회들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사람들을 안식일 진리와 세 천사의 기별로부터 돌이키게 하려고 이 신조를 왜곡해 왔다. 그들의 신조의 기본이 되는 원죄론의 교리를 가지고, 그들은 만일 예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인 몸을 지녔다면 그는 죄인이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도 어떤 구주를 필요로 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24.1)
 1930년대 초 그리스도의 본성을 포함한 재림교회의 세 가지 가르침에 도전하는 기사가 <무디 몬틀리 (Moody Monthly)>지에 실렸다. 이때 <리뷰 앤드 헤랄드>(현재는 애드벤티스트 리뷰) 편집자인 프랜시스 D. 니콜(Francis D. Nichol)은 편집인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상대방의 질의에 응답하는 기사를 실었다. 그리스도께서 ‘죄 있고 타락한 육신을 물려받았다’는 가르침에 관하여 그는 말하기를, “이 주제에 대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신조는 히브리서 2장 14~18절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성경 구절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성에 실제적으로 참여하셨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인 만큼 우리도 그 것을 가르친다.” 그 후 그의 비평에 대한 진술에서 니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24.2)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타락한 인성’을 유전으로 물려받았다”는 것에 대해, 이에 대한 어떤 다른 적절한 표현이 없으므로 누군가가 그리스도께서 심지어 우리와 같은 죄인으로 태어났다고 곡해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도 기꺼이 동의하는 바이다. 과연 이것은 섬뜩 놀라게 하는 신조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우리가 믿어야 할 신조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여인에게서 태어나고 우리와 똑같은 혈육을 취하시고 한결같이 모든 점에 시험을 받아 당신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을지라도 그는 죄가 없으셨고 죄를 알지도 못하셨다는 것을 믿는다. (24.3)
 이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는 ‘죄는 없으시니라’(yet without sin)는 구절에 있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기탄없이 믿는다. 그리스도는 진실로 죄가 없으신 분이다. 우리는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이 죄가 되셨다는 것을 믿는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어떤 재림교도가 무슨 언어에 관계없이 그리스도가 인간 편에서 물려 받은 특성을 묘사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누가 절대적으로 치밀하고 그리고 어떤 오해도 없이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우리는 이미 진술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리뷰 앤드 헤랄드, 1931. 3. 12.). (25.1)
 니콜이 제시한 입장은 존경받는 비재림교 성서학자들은 물론 교회가 수 십년 동안 계속 지지해 온 신조였다. 그것은 확실히 엘렌 G. 화잇이 고수해 온 견해였다. 그녀는 기록하기를,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성을 당신 스스로 취하셨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추호도 인간의 죄에 참여하지 않으셨다. ∙∙∙ 주님은 연약한 우리의 사정을 몰라 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은 분이셨다. 그러나 그분은 죄를 알지 못하셨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완전한 죄 없으심에 관하여 의혹을 품어서는 안 된다” (가려 뽑은 기별 1권, 256). (25.2)
 대화와 변화
 1950년대 <리뷰>지의 편집자 중 한 사람으로서 나는 교회의 어떤 지도자들이 이 교리가 바른 견해가 아니며 단지 교회 안에서 ‘미치광이 같은 괴변자’의 견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런 의견의 변화는 ‘영혼 불멸’의 오류를 포함한 인간의 본성연구에 심취되었던 소수의 전도 목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우리의 입장이 ‘명백한 것’이라고 들어왔다. 이러한 의견 교환의 결과로서 이 토의에 참여해 온 여러 교회 지도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타락한 후가 아닌, 타락 전의 인성을 취하셨다고 선언했다. 타락 후에서 타락 전으로 변화된 이 추이는 180도 다른 것이었다. (25.3)
 이 드라마틱한 변화는 나로 하여금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긴장감을 갖고 연구에 몰두하도록 이끌었다. 나는 집중할 수 있는 모든 객관적 타당성을 동원하여 성경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나는 엘렌 G. 화잇의 저술들을 읽었다. 이전 100년 동안에 자신들의 견해들을 발표해 온 재림교회 사상가들의 기록들을 읽었다. 나는 재림교 저자들과 비재림교 신학자들의 사상을 비교하면서 그들의 연구서와 서적들을 검토하였다. 나는 신앙에서 이런 변화가 어떤 영향을 일으킬 것인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1)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야곱의 사닥다리가 표상하는 것.

 (2)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목적,

 (3)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기에 합당하게 하는 그분의 인성 관계(히 2:10; 시대의 소망, 745; 예수의 이야기, 155).

 (4) 죄 있는 육신대신 죄 없는 육신으로 원수와 싸우는 관계상의 차이점.

 (5) 겟세마네와 갈바리의 좀 더 깊은 의미.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

 (7) 나의 모본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생애의 가치. (26.1)
 40년 동안 나는 이 연구를 계속하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바른 견해를 굳게 붙잡는 것의 중요성뿐 아니라 왜 단순한 진리가 때때로 혼동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엘렌 G. 화잇의 두 가지 인용문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26.2)
 1. “신학자들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은 명백하게 나타나 있는 것을 신비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에서 쾌감을 누리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단순한 가르침들을 어두운 그들 자신의 이성으로 옷 입혀서, 그들 자신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의 마음을 혼란시키고 있다”(영문시조, 1896. 7. 2.). (26.3)
 2. “학식이 많다는 사람들이 하나의 신비라고 단정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넘겨 버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이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운 사람들에게는 안위와 교훈으로 가득 차있는 것들이다. 허다한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명확한 이해를 갖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들이 실천하고 싶지 않은 진리들에 대하여 스스로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26.4)
 “성경 진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탐구하는 데 사용되는 지적 능력에 의존된다. 기보다는 오히려 목적의 단순성, 곧 의에 대한 진지한 열망에 좌우되는 것이다”(안식일학교 사업에 관한 권면, 38). (27.1)
 최근 수십 년 동안 다수의 저술가들이 그리스도가 아담의 타락 전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을 저들의 신조로 만들려고 시도해 왔다. 저들이 주장하는 성경 구절들은 단지 저들이 추구해 온 선입관과 일치하여 해석될 때만 힘을 얻게 하는 것들이다. 때때로 그들은 타락 후 입장을 지지해 온 유명한 재림교회 교수들과 목사들의 신임을 떨어뜨리려고 노력하는 일에 전념해 왔다. 내가 아는 바로는 저들이 시도하는 것이 마치 평판이 좋은 변호사가 “만일 그대가 승산이 있는 사건을 다룰 때는 정곡을 찌르고, 불리한 사건을 다룰 때는 이슈를 혼란시키며, 어떤 방법도 취할 수 없을 때는, 의견의 일치를 못보게 하여 배심원이 평결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라”고 하는 것과 같이 그들의 본을 따르고 있다. (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