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새 연구 제 7 장 위대한 노년(단 6장)
 다) 승리의 비결
 참으로 메대와 페르샤의 변경할 수 없는 법에 의해 헤어날 길 없는 궁지에 빠진 다니엘은 어떻게 활로를 찾았는가. 그것은 다음의 여건을 구비한 기도였다. (116.81)
 기도의 장소(A Place of Prayer) (116.82)
 다니엘은 기도하는 장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기도드렸다. 근동지방의 집들은 지붕이 평평하였는데, 아마도 다니엘은 그의 집에 기도하는 방을 마련했음에 틀림 없다. 베드로도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 갔으며 (행 10:9), 사도 바울도 유럽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에 이르러 「안식일에 기도처가 있는가」하여 찾아나섰고, 거기서 기도처를 찾아나온 두아디라성의 자주옷 장사 루디아를 만났다 (행 16:13, 14). 야곱은 그가 하나님과 교통한 곳에 돌베개를 세우고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했다(창 28:18).

  (116.83)
 「기도를 습관적으로 늘 하는 곳으로 가서 하도록 기회를 찾으라.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참으로 원하는 자들은 기도회에 참석할 것이요, 또 저희의 의무를 신실히 행하며, 저희가 얻을 수 있는 모든 유익을 얻으려고 열심으로 갈망하게 될 것이다」 (정로의 계단, 79). (116.84)
 「우리는 가정 안에서 기도할 것이요, 무엇보다도 은밀한 기도를 등한히 하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기도는 영혼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기도를 등한히 하면서 영혼이 번영할 수는 없다. 가족 기도와 공중 기도만으로는 넉넉하지 않다. 홀로 조용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 앞에 우리의 심령을 내어 놓을 것이다」 (정로의 계단, 80). (116.85)
 기도의 시간 (A Time of Prayer) (116.86)
 다윗 왕은 하루 세번씩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기도드렸다(시 55:17). 후기 유대인의 전통에서도 하루 세번씩, 제 3 시, 제 6 시, 제 9 시에 기도드렸는데, 제 3 시와 제 9 시는 성전에서 아침과 저녁 희생을 드리는 제사 시간과 일치되었다. Berakoth, IV. I. 베드로도 제 6 시에 기도하기 위해 지붕에 올라갔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하루 세번씩 기도드린 기록이 나온다. Didache, 8. (116.87)
 「생애의 분주한 활동이 그대로 하여금 기도가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장 필요로 하는 때, 기도를 소홀히하게 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업무에 지나치게 골몰함으로써 영혼으로부터 경건을 몰아낼 위험이 있다. 그대가 사용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능력과 하늘의 지혜를 영혼으로부터 박탈하는 것은 큰 악이다. 그대에게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 빛이 필요하다」(5T, 560). (116.88)
 「기도는 그대의 능력의 근원임을 기억하라. 성급한 기도를 드린 뒤 소홀히 여겨지거나 잊혀지게 될까봐 염려하는 사물을 돌보러 급히 달려 나가는 일꾼은 성공을 거둘 수 없다. 그는 다만 급하게 하나님을 조금 생각하였을 뿐이다. 그는 육신적, 영적 능력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주님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기다리는 일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 그는 곧 지쳐버린다. 그는 하나님의 영의 고상하게 하고 고무시키는 감화를 느끼지 못한다. 그는 참신한 생명에 의하여 기력을 얻지 못한다. 그의 지친 몸과 피곤한 머리는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접촉을 통하여 위로함을 받지 못한다」 (7T, 243). (116.89)
 기도의 자세 (A Posture of Prayer) (116.90)
 다니엘은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다. 그것은 복종과 겸손을 나타내는 자세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윗처럼 앉아서 기도드릴 수 있고(삼하 7:18), 엘리에셀(창 24:26)이나 엘리야처럼(왕상 18:42) 엎드리어, 혹은 한나처럼 선 채로(삼상 1:26), 기도드릴 수도 있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자세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고(눅 22:41), 에스라(스 9:5), 스데반이 그랬으며(행 7:6, 59, 60), 사도 바울이(행 20:36) 그렇게 기도드렸다. (116.91)
무릎 꿇는 낙타

날이 저물면 낙타는 모래 벌판에
무릎을 꿇는다.
온종일 지고다닌 무거운 짐을 내리게 하여
휴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영혼아, 해가 지고 한 날이 저물 때
너도 무릎을 꿇으려므나.
그래야 네 주인께서도 네 짐을 들어 내리시고
네게 휴식을 주실 수가 있으시니까.

만약 그대가 짐을 진 채로
온 밤을 지샜다면
어떻게 할 일이 태산 같은 내일을
내일로 맞이할 수가 있을까.

날이 새면 낙타는 다시 무릎을 꿇어
그의 주인으로 다시 짐을 지우게 한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사막 길을 힘차게 달린다.

나의 영혼아, 먼동이 트거든 너도 무릎을 꿇어
네 하나님께서 네게 일과를 주시게 하라.
그 분은 네가 지기에 너무 큰 짐을
결코 지우지 아니하실 줄 확신하여라.
—Anna Temple—
(116.92)
 예루살렘을 향하여(Toward Jerusalem) (116.93)
 다니엘은 신앙과 인생의 방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온 종일의 분주한 일과에 골몰하는 동안, 그의 생각은 때때로 외교(外交)문제와 인사(人事) 행정에 몰두되기도 하고, 때로는 국내 문제와 국가 산업에 전념하기도 했지만, 하루 세번씩 기도드리는 시간이 되면 그의 방향 감각은 정위치(正位置)에 되돌아왔다. 폭풍을 만나 요동하는 배가 이리저리 선체를 가누어도 나침판의 바늘이 정남북(正南北)을 가리키듯, 다니엘의 영혼은 하나님의 임재가 약속된 곳 예루살렘을 향하였다. 떠나온지 70년이 다 되어가고, 지금은 황무한 채 적막만이 드리웠을 예루살렘이 다니엘에게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그립고 소중한 약속의 도성이었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두고 맺어진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 때문이었다. 성전이 낙성되었을 때, 솔로몬이 드린 봉헌(奉獻)의 기도는 하나의 예언이요 언약이기도 했다. (116.94)
 「솔로몬이 ∙∙∙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천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주의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하므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땅의 원근을 물론하고 끌어간 후에 ∙∙∙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돌아와서 ∙∙∙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곳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와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대하 6:12-14, 24, 36-39, 25). (116.95)
 바로 이 일을 다니엘이 하였고, 이를 위한 기도를 다니엘이 드린 것이다. 다니엘은 자신이 선지자로 예언을 기록했지만, 동시에 이미 기록된 성경의 허락을 자신이 성취시키기도 한 것이다. (116.96)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중에 하나님에 대한 더욱 명랑하고 분명한 견해를 가지게 되고, 바라봄으로 우리는 변화된다. 선함과 우리 동포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꾸밈 없는 본성이 된다」 (실물교훈, 368, 369). (116.97)
기도하는 다니엘

페르샤제국이 그의 현명한 통치에 허리를 굽히고
일백도 넘는 행정구역이
날마다 그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으며
정원들이 들어찬 여왕 같은 도성이
그를 향해 화사하게 미소했지만
그의 마음은 멀리 멀리에 있었네.

위엄과 권세를 뒷전에 제쳐두고
‘하루에 세 번씩’ 외 딴 방을 찾아가
거기서 그의 위로를 구했네.
서편으로 열려진 창문을 통하여
저 멀리 멀리에 두고 온 예루살렘 향하여
그의 기도를 띄워 보냈네.

아침과 한 낮, 그리고 저녁이 어느 새 지나갈 때
저로 하여금 세상의 헛된 쾌락과
첩첩이 쌓인 근심 걱정으로부터
제 마음의 문을 닫게 하시고
여가를 찾게 하여 주소서.
저기 보이는 저 수평선을 지나
저 멀리에 감추어진 그 복된 도성
그 하늘의 보화를 향해
제 영혼의 창문들을 활짝 열게 하소서.
-Richard Wilson-
(116.98)
 다. 위대한 승리